아우슈비츠, 그 파국의 직접적 체험은 결코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일 수 없다!
'자살 작가', '불가지론자', '세상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상가', '잃어버린 세대'. 이 책의 저자인 장 아메리(Jean Amery, 1912~1978)의 삶과 사상을 말해주는 핵심어들이다.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파시즘 야만이 불러온 유례없는 인류사의 파국을 직접 체험했던 그는, 또 다른 아우슈비츠의 생환 작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리모 레비(Primo Levi)와는 또 다른 결의 글로 '지나간 불편한 과거'가 결코 화해되거나 용서할 수 없는, 그래서 더더욱 정신적 긴장과 불협화음 속에서 그 진정성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독일의 저명한 사상가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나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말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와는 달리, 아메리는 파국의 직접적 체험이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으로 변하고, 추상적인 개념어가 진짜 공포를 대신하는 사태에 대해 결코 동의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즉 아도르노와 아렌트는 죽음을 넘나드는 여러 차례의 고비에도 불구하고 결국 망명에 성공했고, 그 후 다른 나라에 체류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객관적이고 사변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면, 아메리는 극단적인 고문을 비롯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지옥 같은 집단 수용소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다섯 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의 대표작으로, 1965년 발표되어 서구 지성계에 충격을 던진 가장 유명한 글 「고문」(拷問)을 비롯하여 모두가 자신의 생생한 체험에 근거하여 집필된, 지난 20세기 인류가 저지른 '파국'에 대한 직접적 고발이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대해 그래도 기억해야만 하는, 또한 되도록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일상성의 함정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고문, 그것은 두 당사자 중 한 사람의 동의가 없는 성행위, 즉 강간이다"
1943년 망명지였던 벨기에에서 반(反)나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그는, 브뤼셀 주재 게슈타포 본부가 관할하는 생질(Saint-Gilles) 수용소에 수감되지만, 같은 날 브렌동크 요새로 옮겨져 친위대(SS)에게 심한 고문을 당한다. 이 당시 겪은 생생한 고문의 경험은 "고문을 경험한 자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편하지 않다"라는 인식에 이르게 한다. 즉 자아가 세계와 만나는 가장 일차적인 경계가 바로 '몸의 경계'인데, 누군가가 우리를 구타하고 고문한다면 그 사람은 타인에게 자신의 육체성을 강요하는 것으로, 타인의 신체 혹은 피부를 침범함으로써 상대방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아메리는 그것을 "두 당사자 중 한 사람의 동의가 없는 성행위, 즉 강간"으로 본다. 이를 경험한 자는 그 어떤 인간적인 의사소통을 통해서도 상쇄될 수 없는 세계에서의 낯설음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을 더 이상 이 세상을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와 같은 처절한 체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방송과 신문 기고, 책을 통해 끊임없이 불편하지만 적확한 분석을 시도했던 아메리는 1978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극단적 상황에서 인간의 '정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메리는 사실, 196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아우슈비츠 재판이 있기 전까지는 자신의 체험에 대해 침묵했다. 이 재판은 아메리로 하여금 그동안 독일인들이 부인하거나 축소하려고 시도해 온 나치 과거를 다시금 돌이켜 보게 만들었다. 그는 이 책에 실린 첫 에세이 「정신의 경계에서」에서 나치 전체주의에 의한 총체적 파국은 육신의 절멸과 더불어 '정신의 무용함'을 입증했다고 주장한다. 신앙이나 정치적 신념과는 달리 정신이나 형이상학, 인문적 교양은 수용소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음을 많은 사례를 들어 증언한다. 즉 그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인문적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미학적이고 관념적인 사유가 극단의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단순히 개인 차원의 인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는 결국 수세기 동안 유럽 문화 속에 동화되어 살아온 유대 지식인들의 권력 앞에서의 무능력함에 대한 비판일 뿐 아니라 서구 지성사 혹은 정신사 전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지성 혹은 정신은 그것의 필요성이 진정으로 요구될 때 한없이 무력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런 정신의 무력함은 결국 언어의 무력함으로 이어진다. 모국어의 상실과 언어의 파괴가 바로 그것이다.
원한! 그러나 그 극복은 계몽의 언어로부터 ……
인류 역사에 있어 최대의 파국을 몰고 온 이 사태(유대인 대학살)를 그러면 어떻게 해결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결국 전후 패전국 독일의 처리 문제로 귀착된다. 영원히 폐허 상태로 남겨놓을 것인지 아니면 재건을 도와 유럽 사회에 다시 편입일 시킬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그것이다. 이 같은 결정에 있어 나치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유대인들의 태도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망명을 갔거나 살아남은 유대인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편에서 독일과의 화해를 추구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스라엘로 건너가 예루살렘 대학에서 가르쳤던 마르틴 부버, 실존주의 철학자인 프랑스계 유대인 가브리엘 마르셀, 영국계 유대인이자 출판인이었던 빅터 골란츠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아메리는 전후 유대인들의 이 같은 화해의 노력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가 이런 관대한 움직임에 대해 신뢰나 동조의 눈길을 보내지 않는 것은 이들이 아우슈비츠를 직접 경험한 피해자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공유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아메리는 네 번째 글 「원한」에서 화해 대신에 원한의 감정과 원한의 수사(修辭)를 옹호한다.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 나아가 전 세계가 원했던 화해나 용서 대신 원한과 분노를 지속적으로 간직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같은 역설적 주장을 통해 자신이 받을 비난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는 단어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원한에 찬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어는 근본적으로는 '계몽의 언어'이다. 계몽의 원칙에 입각한 그의 글쓰기는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나 한 치의 가감 없이 사실만을 드러내려는 그의 의도와 관련된다. 모든 허구적인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진실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철저히 자신의 체험과 사유에 바탕을 둔 그의 글쓰기는 풍부한 전거와 인용을 포함한, 치밀하고 세부적인 것에까지 파고드는 분석적 언어에 있다. 그는 말한다.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어떤 갈등도 해소되지 않았으며, 어떤 내면화하기도 단순한 기억이 되지 않았다. 일어났던 것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난 일어났던 것을 단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는 저항한다. 나의 과거에 대해, 역사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역사로 냉동시켜 버리고, 그렇게 해서 화가 치밀 정도로 왜곡시키는 현재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