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여자 친구가 이발하라고 돈 만 원을 쥐어 줬다. 그 다음엔 목욕탕 가라고 또 만 원을 줬다. 목욕 다 하고 탕 앞에서 바나나 우유 마시며 기다리고 있으니까 얼굴 뽀얘져서 막 빨간 볼 하고 바나나 우유 두 개 들고 나오다가 나 먼저 먹고 있는 거 보고 뒤로 감췄다. 상설 매장 가서 옷 깔끔한 거 사 주고, 막 맞춰 보면서 잘 어울린다고 좋아해 주고, 내가 수줍어 하니까 귀엽다면서 막 웃고, 데려다주는 길에 집 앞에서 이제 깔끔해지고 말쑥해지고 멋있어졌으니까 자기보다 더 좋을 사람 만나라고···.
--- 「여자 친구와 만 원」 중에서
라면에 말아 먹기엔 역시 찬밥이 제일이라 밥솥의 전원을 빼놓았는데 아버지가 일 나가기 전에 일어나서 “정전됐었니?” 하고 물어보셨다. 자는 척했더니 아버지 혼자 부엌에서 찬밥에다 물 말아 드시곤 출근하셨다. 엄마가 돌아와 “아빠 찬밥 먹고 나가게 하니까 좋아?” 하고 묻는데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이 서른여섯에 백수로 산다는 것. 서른여섯, 백수, 산다는 것. 셋 중 어떤 게 더 잘못된 걸까?
--- 「나이 서른여섯에 백수로 산다는 것」 중에서
나는 왠지 귀여워 보이는 줄임말이나 단어는 결코 말할 수가 없다 ‘빅맥’을 말하기까지 32년이 걸린 나다. 그 이후로 4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앞 글자의 받침인 ‘ㄱ’과 뒷글자인 ‘ㅁ’ 사이의 어색한 떨림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 그 떨림 때문에 성대에서부터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그런데 초바와 딸바라니···. 왠지 새침한 기분에 식당에서 하이라이스도 주문하지 못하는 나인데 저렇게 귀여운 줄임말을 서른여섯 백수가 말하기에는 지나친 민폐가 아닌가···.
--- 「초바 딸바 같은 건 죽어도 말할 수 없다」 중에서
동네 버려진 집에 장롱이 하나 있었다. 애들이 나보고 거기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그럼 나중에 자기들이 찾으러 오는 그런 놀이라고 했다. 그런데 몇 시간이고 좁고 깜깜한 장롱에서 가만히 쭈그려서 숨죽이고 있었는데 항상 날 찾으러 오는 건 퇴근하고 달려온 엄마였다. 엄마는 나를 보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가 미안하다···. 봉철이 많이 힘들었지?” 이러는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난 그냥 친구들이랑 놀았던 건데···.
--- 「장롱 속의 아이」 중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봉철이를 떠올렸다. “저기··· 이런 말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넌 잘못이 없어. 그냥 다들 잘 몰랐던 거야. 아버지는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어떤 점이 잘못됐는지, 그리고 나를 어떻게 달래 줘야 했는지, 그리고 너는 학창 시절과 가정에서 겪었던 폭력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했는지, 그냥 잘 몰랐던 것뿐이야” 하고 말해줬다. 그러자 어린 시절의 봉철이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는 지금 왜 그래?’”
--- 「내면 아이」 중에서
그렇지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 손자 아저씨의 말을 떠올리며 나름의 기준을 세웠다. 나의 오랜 경험을 통해 나와 잘 맞지 않는 성 씨가 있다는 걸 알고, 그것을 골라내기 위해 고용주의 성을 유심히 살펴보기로 했다.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윤, 장, 임···. 그러고 보니 나랑 맞는 성씨가 없는데…
--- 「나랑 잘 안 맞는 성씨」 중에서
“봉철 님의 위치를 생각하세요”라는 말이 나에게는 최후의 통첩처럼 느껴진다. 누가 어떻게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든 나의 현재의 위치는 그 모든 것을 그냥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며 폭력과 폭언을 휘두르던 나의 유년 시절과 현재의 내 상황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울어야 할까, 아니면 웃어야 할까. 나의 위치는 나의 의지대로 눈물과 웃음을 보이는 일이 가능한 자리일까?
--- 「봉철 님의 위치」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미지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시작을 주저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자기 자신에 달려있다.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도 우주선에 올라 출발하기 직전까지도 ‘아, 뭐야. 나 진짜 가는 건가’ 하고 얼떨떨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대기권을 벗어나고, 중력 가속도 때문에 얼굴이 찌부러지고, 엄청나게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평온한 상태로 파란 별 지구를 내려다보고 나서야 “오, 지구 짱이다. 완전 파래. 장난 아냐” 하고 감격했겠지.
---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 중에서
한강이 바다인 줄로만 알았던 그녀는 서울로 올라와 투피스를 입은 세련된 멋쟁이 새댁이 될 줄 알았으나, 머리엔 두건을 쓰고 앞치마를 맨 채로 하루 종일 일을 해야만 했다. “미안해. 나 자리 잡을 때까지만”이라는 남편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것도 벌써 몇 년째였다. 큰 아이는 벌써 말도 곧잘 하도 둘째는 엉금엉금 기며 걸을 기미를 보였다. 포대기에 둘째를 싸매어 등에 업고 찬거리를 사러 간 시장에서 그녀는 토막 난 고등어를 봤다. 도다리. 서울로 오면 매일 먹을 수 있을 것 같던 도다리. 어떻게 생겼을까? 맛은커녕 생김새도 모를 도다리. “엄니, 지는 서울 가서 도다리 매일 먹을 거구만유” 하고 이장님 집에서 흑백 티브이로만 보던 그 도다리. 도마 위에 올린 고등어에 소금을 뿌리며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 「도다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