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만약 자신을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갖고 스스로 어떤 역할을 연기할 수 있다면 자아가 비대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지니고 있다면 여러 역할을 맡는 것도 가능합니다. 서장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자신’은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개의 ‘자신’을 연기함으로써 의외로 편해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페르소나, 즉 가면을 쓰고 거짓이든 어떤 것이든 일단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인생의 연출가가 되어 자신을 창작하고 연출하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픽션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p.55 「1장. 인생의 드라마트루기를 생각한다 ― 기노쿠니야 홀」
여러분도 ‘가치관의 다양화’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텐데, 거기에도 원리원칙은 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철학자는 포스트모던을 ‘대서사의 종언’이라고 했습니다만, 거기에서는 우리가 예전에 배웠던 모럴이나 인간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서사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가족이나 사회를 위해 땀 흘리며 30년간 열심히 일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해도 “그래서 뭐? 우리는 하루에 10억엔 벌어”하고 깨끗이 부정당하고 맙니다. 어쩌면 그것은 허상이고 가짜인지도 모르지만,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가짜에도 미학이 있고, 가짜라도 가치가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겁니다. 척하는 것이 전혀 없기에 인간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거리. 그러므로 저는 여기에는 문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롯폰기라는 거리의 개성인 것입니다. 아무리 파도 근대의 지층이 나오지 않기에 직접 포스트모던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 pp.66-68 「2장. 도시에 우뚝 솟은 바벨탑 ― 롯폰기힐스」
CCTV, 휴대전화의 GPS 기능, 역 개찰구의 통과 기록 등 일상생활에서 감시를 가능케 하는 다양한 신기술이 도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들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조차 적어졌습니다. 관리되는 것이 관습화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주 듣게 되는 것이 “자기만 떳떳하다면 CCTV가 있다고 한들 무슨 상관인가”, “소지품을 검색한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하는 의견입니다. 하지만 이런 비난은 프라이버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프라이버시는 ‘떳떳한지’, ‘ 떳떳하지 않은지’와는 상관없이 그 공개를 당사자의 자유에 맡겨야 하며, 그것이 정당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프라이버시인 것입니다. ……
좀 더 말하자면, 사회를 투명하게 하고 감시하면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느냐 하면 실은 그렇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주민기본대장 네트워크시스템이나 도청법 같은 것을 만들어 위기를 관리하면 할수록 위기를 관리하는 그 시스템 자체가 새로운 위험을 낳습니다. 위험은 더욱 차원이 높아지고, 역으로 사회는 위험에 취약해지는 것입니다.--- p.126 「3장. 수조 안은 안전합니까? ― 시나가와 수족관」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이미 물질적으로 충족되어 있고 문화적으로도 나올 게 다 나와 버렸으니 그것을 고쳐 만들거나 반복할 뿐입니다. 저는 이를 ‘에피고넨(epigonen, 아류)의 시대’라고 부릅니다만, 모든 것이 정점에 달하고 만 지금,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을 찾아내기란 어렵습니다.
…… 어떤 책을 만나느냐에 따라 사람과의 만남은 달라지고,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에 따라 책과의 만남도 달라집니다. ‘어떤 책과 만났느냐’가 당신의 사람됨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pp.138-139 「4장. 아날로그적 지의 세계를 거닐다 ― 진보초 고서점가」
이러한 기지에 풍부한 유머를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대상의 거리입니다. 거리를 두기 때문에 우스꽝스러움도 나오고, 그 결과 웃음이 낯설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대상이 자기 자신인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을 상대화하여 ‘보잘것없는 자신’을 자학적으로 비웃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라는 존재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믿음에서 다소 해방되는 것입니다. 다만 대상과 거리를 두는 작업은 지적으로 고도의 기술이므로 성숙한 감각이 필요합니다.
한편 비극에는 거리감이 없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대상이 일체화될수록 비극이 됩니다. 대상과의 일체화는 무척 기분 좋은 일이지만, 사실 자신에게 취해 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최근에는 영화나 책을 읽고 마음껏 울고 싶다거나 눈물을 흘리며 등장인물과 일체화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숙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p.142 「4장. 세련된 도회인이 사랑한 ‘웃음’ ― 신주쿠 스에히로테이」
…… 동물적 욕망과 인간적 욕망에는 원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형 소비사회에 의해 소비자의 필요는 기계적으로 직접 충족되게 되었습니다. 음식도 슈퍼마켓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편리’라는 이름하에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없어졌지만,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1971~ )도 말했듯이, 이는 상당히 ‘동물화’한 사회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풍요로움이라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포스트모던과 맞닿아 사회적 시민이라든가 인권이라든가 자아라든가 하는, 주체성을 가진 ‘인간’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련된 소비문화를 통해 자기실현을 꾀하는 시대가 온 것이라고들 말하게 되었습니다. 오타쿠 문화는 그 아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p.171-174 「5장. 어딘지 쓸쓸한 오타쿠의 성지 ― 아키하바라」
…… 빈곤의 그러데이션이 산야를 중심으로 퍼져 가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도시에는 이런 거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이는 ‘필요악’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노숙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구조가 바뀌지 않으니 형태를 바꿔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빈곤은 없는 편이 낫다”고 누구나 말합니다. 그러나 빈곤은 반드시 생깁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적으로 산야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노숙자들을 쫓아내고 거리를 깨끗이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p.190 「5장. 빈곤과 고령화를 안고 있는 거리에서 ― 산야」
…… 예컨대 사업에 성공해 재산을 축적했다고 해도 정치적인 동물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순수하게 사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이고, 인간의 본질은 ‘공적인 존재’로서 나타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公)’이란 무엇일까요. 국회의사당에서 발언하는 것만이 공적인 것은 아닙니다. 회사에서 퇴근할 때 동료와 한잔하면서 “우리의 고용은 어떻게 될까?”, “연금은 어떻게 될까?”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자마자 공적 공간의 창구가 열리고 우리는 공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와 동시에 타자와 공동체의 이해를 생각하며 논의하는 것, 이것이 본래의 정치라는 것입니다.--- p.201 「6장. 그 한 표로 정치는 바뀐다 ― 국회의사당」
‘스트레인저’라는 건 ‘이방인’이라는 의미잖아요. 실제로 저는 구마모토 현 출신 ‘이방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방인으로 살아가자’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도쿄로 올라와 대학에 들어간 무렵에는 어쩐지 도쿄를 배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적막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촌놈일수록 도쿄에 관심을 가지고, 도쿄를 걸어 보자는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야 가까스로 도쿄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보며 걸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드디어 도쿄와 화해했다고 할까요.--- p.230 「대담 ― 도쿄, 교차하는 기억과 미래」
그런 기억의 장소가 있는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기억의 장소라는 게 있거든요. ……
제가 자란 구마모토의 풍경과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억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고, 거기서 느낀 슬픔이나 좌절이나 기쁨은 구마모토라는 장소에 간직되어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p.235 「대담 ― 도쿄, 교차하는 기억과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