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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때

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때

정명섭 저 / 산호 그림 | 들녘 | 2020년 07월 1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2 리뷰 41건 | 판매지수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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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7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346g | 128*188*20mm
ISBN13 9791159255601
ISBN10 115925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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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서 채취한 석영을 정제해 만든 관측창으로 본 지구는 온통 잿빛이었다. 왠지 숨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K-기준은 공용어인 영어로 중얼거렸다.
“지구는 밝고 찬란한 녹색이라고 하지 않았나?”
“웬걸. 데이모스보다 더 어두운데.”

그들에게 Z.A. 이전의 지구는 물과 대기가 무한하고, 필요한 광물질이 모두 존재하는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어쩌면 그런 꿈같은 기억 때문에 인간들은 지구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좀비에게 희생당하고, 핵폭발로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말이다.
여하튼 드디어 인간이 이 땅에 다시 돌아왔다.
백 년 만에.

K-기준은 낡은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넘겨보며 중얼거렸다. 책상 위에는 제법 많은 종이가 흩어져 있었고, 모퉁이에도 낡은 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그는 라이트가 앞을 비출 수 있도록 소총을 옆구리에 끼고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한 장 한 장 흙먼지를 털어내자 글씨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제 구출될지 모르는 상태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는 두려움 대신 호기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천천히 종이 위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병에 걸리면 갑작스럽게 사망한다는 말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사망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은 아무래도 믿기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부활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고 했다. 공격당한 사람들은 감염되어서 죽었다가 부활하고, 또다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이 무한 루프처럼 반복된다는 것이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지난 몇 달간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어떤 인간은 좀비가 되었고, 어떤 인간은 짐승이 되었다. (…) 하지만 오늘 나는 나 역시도 별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사의 기로 앞에서 인간다움은 통조림 캔 하나만큼의 가치도 되지 못했다.
(…) 요새로 돌아와서는 말없이 소주를 꺼내 들고 한 잔씩 돌렸다. 앞으로 더 힘들어지겠지만 지금처럼만 하면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었다. 인간들이 사라져가는 세상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고 싶었다.

대형 캡슐은 지정된 장소에 정확히 착륙했다. 외피 곳곳에 프레임을 둘러치는 등 대기권 진입을 위해 보강한 흔적이 보였다. 자세 제어 노즐에 남은 연료들이 타들어가는 동안 캡슐 양측에서 대형 슬라이딩 도어가 내려왔다. 날아드는 실리콘 펜스와 흙먼지를 피해 엎드려 있던 원정대원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N-형식이 말했다.
“드디어 노아의 후예들이 돌아왔군.”

“제1 방어선 돌파. 후방에 좀비들이 추가로 나타났다.”
“젠장, 도대체 백 년 동안 뭘 먹고 살아남았느냔 말이지.”

점차 희미해지는 조명 사이로 좀비들이 벌레떼처럼 새까맣게 벙커에 달라붙은 것이 보였다. 좀비들은 그대로 벙커를 들어서 뒤집어버렸다. 벙커 안의 보병들이 지르는 비명에 헤드셋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쉽진 않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하며 소총을 둘러메고 계단 손잡이에 올라섰다. 양쪽에서 다가오는 좀비들의 악취가 느껴지던 순간, 젖 먹던 힘까지 짜내 풀쩍 몸을 날려 겨우 철골을 움켜잡는 데 성공했다. 좀비들이 내가 신고 있던 게리슨 워커를 붙잡으려 했지만, 다행히 불과 몇 센티미터 차이로 원하던 난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좀비들은 주로 남동쪽에서 나타났네. 하지만 나흘 전까지는 그쪽에 위협이 될 만한 좀비 집단이 없었어. 그런데 이걸 봐. 사흘 전 저녁에 찍은 거야.”
홀로그램 이미지가 변하면서 좀비를 뜻하는 녹색 점이 지도 위에 표시되었다.
“좀비 무리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마법처럼 갑자기 나타났어. 그리고는 곧장 우리 쪽을 향해 진군해왔네. 마치 군대처럼 말이야.”
“그래도 출몰한 곳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의심 가는 곳이 있긴 하지.”
사령관이 손으로 홀로그램 지도의 끝을 찍자 지도가 그쪽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인공적인 구조물들의 홀로그램이 솟아났다.
“이건 뭡니까?”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구조를 보면 군사용임이 틀림없어. 지명도 확인했다네. 평택이야.”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그래, 꼬맹아. 인간이 지구를 되찾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해. 하지만 적어도 그 피는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지 않고 대지에 뿌려지겠지. 지구에서 인간으로 죽는 거야.”

우리는 동시에 배를 움켜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스쿠터가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자빠질 때까지. 와당탕 넘어지면서 그녀와 부딪치는 바람에 이마가 얼얼했지만 나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내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입술에 키스했다. 짧은 입맞춤 후 그녀는 두렵지만 이겨내보겠다고 말했다. 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지켜주겠다고 대답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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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 없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기묘한 이야기! 장르 마니아가 좀비와 종말이라는 고전적 소재로 만들어낸 새로운 서사이다. 진짜 서브컬처의 맛을 경험하라!
- 연상호 ([부산행], [반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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