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아, 하느님!
유령: 극악무도하게 살해된 아비의 원수를 갚아 다오.
햄릿: 살인이라고요?
유령: 그래, 살인치고 사악하지 않은 살인이 없지만
나의 경우는 가장 사악하고, 인륜과 천륜을 저버린 것이다.
햄릿: 어서 빨리 알려 주세요.
그래서 명상처럼, 신념처럼 빠른 날개를 달고
복수에만 맹진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유령: 그래야겠지.
그러지 않는다면 레테의 강둑에 태평하게 뿌리 내린
무성한 잡초보다 우둔한 녀석이겠지.
간단히 말해 주마.
내가 정원에서 잠자다가
뱀에 물려 죽었다는 헛소문에
온 덴마크 사람들이 형편없이 속고 있다.
그러나 고매한 젊은이인 너는 알아 두어라,
네 아비의 심장을 물어뜯은 자가
지금 왕관을 쓰고 있는 바로 그자라는 것을.
햄릿: 낌새가 이상하더라니. 숙부가, 숙부란 자가!
--- p.47
햄릿: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성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견디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아니면 고해의 바다에 맞서 끝까지 대적하여
끝장을 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죽어서 잠을 잔다. 이게 전부란 말인가? 그래, 전부야.
아니, 잠을 자면 꿈을 꾸겠지. 맞아, 그것이 문제야.
사멸할 이 육신의 허물을 벗어 버리고
죽음의 잠 속에서 우리는 무슨 꿈을 꾸게 될까?
그 때문에 우리는 망설이고
이 장구한 인생의 재난을 이어 가는구나.
그게 아니라면 그 누가 시대의 채찍과 조롱,
억압자의 횡포와 거만한 자의 비방,
짝사랑의 고통과 법의 게으름,
관리의 오만함과
훌륭한 사람들이 하찮은 사람들로부터
참고 받아 내는 업신여김을 견디겠는가?
차라리 단검 빼어 들고 이승을 하직하는 편이 낫지.
그게 아니라면 누가 지루한 인생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고 땀 흘리며 그 무거운 짐 지고 가겠는가?
여태껏 아무도 되돌아온 자 없는 그곳,
그 미지의 나라,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의지를 마비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알지 못하는 저승으로 달려가기보다
이승의 질곡을 참고 살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숙고는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고
자연스러운 결단의 색깔은
뻗어 나가는 생각과 더불어
창백하게 변하는구나.
중대한 계획도 이 생각 때문에 물줄기를 틀어
실행이라는 이름조차 잃는구나. 자, 가만,
아름다운 오필리아! 님프여, 그대의 기도 가운데
내 모든 죄악들을 기억하여 주오.
--- pp.96~97
햄릿: 제 맥박도 어머니나 마찬가지로 정상적으로 뛰며
건강합니다. 광기가 아니니 시험해 보시지요.
말씀을 하시면 그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겠습니다.
미친 사람은 그러지 못하고 헛소리하기 십상이죠.
어머니, 제발 자비를 바라신다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제가 미쳐서 헛소리를 한다며
영혼에 아첨의 고약을 바르지 마세요.
고약은 단지 아픈 곳을 감싸 줄 뿐입니다.
그동안 썩은 고름은 보이지 않게 번지기 마련입니다.
하늘에 고백하고, 지난 일을 회개하고,
앞으로의 기회를 피하십시오.
잡초에 거름을 뿌려 더 무성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저의 이 미덕을 용서하여 주세요.
이 살찌고 늘어진 시대에는 미덕이 악덕에게 용서를 빌고,
그렇지요, 악덕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고개 숙여 허락을 간구해야 하니까요.
--- pp.134~135
로미오: (줄리엣의 손을 잡으며) 저의 미천한 손이
이 신전을 모독한 것이라면, 얼굴 붉힌 두 순례자 같은
제 입술이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더럽혀진 곳을
씻고자 하는 것은 가벼운 죄에 불과하겠지요.
줄리엣: 착한 순례자님, 손을 너무 부당하게 대하시는군요.
이처럼 착실히 헌신을 다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순례자들이 손으로 만지는 성상에도 손은 있고,
손바닥을 서로 맞대는 것이 순례자들의 입맞춤이죠.
로미오: 성상에 입술은 없나요? 순례자들에게도?
줄리엣: 아, 순례자님, 입술은 기도할 때 써야죠.
로미오: 아, 성상이여, 그러면 손이 하는 것을 입술이 하게 해주세요.
믿음이 절망으로 변하지 않도록 입술이 기도하게 해주세요.
줄리엣: 기도를 들어 주더라도, 성상은 움직이지 않아요.
로미오: 그럼 제가 기도의 효험을 받을 동안 움직이지 마세요.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키스한다)
이제 당신의 입술이 제 입술에서 죄를 씻어 주었네요.
줄리엣: 그럼 그 죄가 제 입술에 있겠군요.
로미오: 제 입술에 있던 죄요? 아, 잘못을 감미롭게 꾸짖는군요!
제 죄를 다시 가져갈게요.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다시 키스한다)
--- pp.252~253
줄리엣: (로미오를 보지 못한 채) 아, 로미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아버지를 부정하고 당신의 이름을 버리세요.
그럴 수 없다면 내게 사랑을 맹세하세요.
그러면 나는 이제 캐풀렛 가문을 포기할게요.
로미오: (방백) 더 듣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 답을 할까?
줄리엣: 당신의 이름만 내 원수일 뿐이에요.
몬터규란 무엇인가요? 그건 손, 발,
팔, 얼굴, 신체의 어떤 부위도
아니에요. 아, 다른 이름이 되세요!
이름이란 무엇인가요? 장미는 이름이 바뀌어도
그 달콤한 향기는 변치 않으니
로미오 또한 로미오로 불리지 않아도,
그 명칭이 없어도, 그의 소중한 완벽함은
그대로일 거예요. 로미오, 당신 이름을 버리세요.
당신의 일부분이 될 수 없는 그 이름 대신에
나의 전부를 가지세요.
--- pp.262
로미오: (……) 아, 사랑하는 줄리엣,
그대는 왜 이렇게 여전히 아름다운가요?
저 실체 없는 죽음이 사랑에 빠져, 저 깡마른
혐오스러운 괴물이 그대를 자신의 애인 삼으려
이 어둠 속에 붙잡아 두고 있는 걸까요?
그럴까 두려우니, 내가 항상 그대 곁에 머물며
이 어두운 밤의 침대를 결코
떠나지 않겠어요. 난 여기, 이곳에서
그대의 침실 시녀인 구더기들과 있을게요. 아,
이곳을 영원한 내 안식처로 삼아
세상에 지친 이 몸에서 불길한 별들의 속박을 떨쳐 낼게요.
두 눈아, 마지막으로 봐두어라.
팔들아, 네 마지막 포옹을 해라.
아, 숨결이 드나드는 입술아, 제대로 된 입맞춤으로
뭐든 삼키는 죽음과 영원한 계약을 맺어라.
--- p.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