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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프롤로그 나의 황금색 스팽글 셔츠
17년차 번역가입니다 17 난생처음 비행기 타고 출장 간 날 28 패딩 사던 날 39 번역으로의 도피-고문과 축복 사이 47 어쩌면 사랑 이야기 55 생활 지능이 떨어집니다 62 마흔여섯 폴리애나 살려고 하는 일들 71 내 시간의 주인 77 극단적 문과생은 자라서 이런 사람이 됩니다 83 박미경 언니는 여전히 최고지만 90 취미에도 투자가 필요하다 97 살려고 하는 일들 102 다시, 라디오 걸 109 스포츠 팬의 마음 115 마라토너의 징크스 122 한여름 밤의 꿈과 악몽 사이 130 오늘의 리듬 평범하고 멋진 날들 139 이사 과몰입 중입니다 145 평범하고 멋진 날들 150 샤이 법륜 팬입니다-한때 〈즉문즉설〉을 듣던 이들을 위하여 157 동물원 가는 길 164 후천적 경청자 170 메이크오버 쇼의 진정한 재미 176 뉴저지 여인의 추억 183 그 겨울의 과일가게 189 소울 메이트란 신화 198 가족의 취향 208 모던 러브 216 자전거로 코스트코 다녀오기 늦여름 밤은 놓쳐선 안 되니까 225 마감, 의식의 변화 231 안녕, 홍대입구역 9번 출구 238 아줌마력 243 그 코트 어디 갔지? 250 So Can You 257 늦여름 밤은 놓쳐선 안 되니까 |
노지양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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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그저 아기를 맡기고 일하고 싶다거나 그저 번역이 좋아서 이 일에 매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나의 독립성과 자존감과 미래를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했고 앞으로도 더 사랑하고 싶어서 일을 사랑하기로 결심했던 것이 아닐까.
--- p.54 이수역의 문화학교 서울에서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과 데릭 저먼의 〈카라바조〉를 (괴로워하면서) 본 90년대 대학생은 이수역의 아트나인에서 열 명이 채 안 되는 관객 사이에서 예술 영화를 보고 있는 아주머니가 된다. 영화를 보고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고 오뎅 국물을 훌쩍이는 모습도 오려 붙인 듯 똑같다. --- p.80 언젠가 내가 그린 그림 사진을 핸드폰 문자로 보내니 엄마가 답장했다. “우리 딸 정말 잘 그리네. 하이팅. 엄마는 너무 늦었나 봐.” 보자마자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엄마는 너무 늦었나 봐”라는 문장을 그 뒤로도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너무 늦었나 봐. 아니야, 안 늦었어. 늦었나 봐. 그렇다. 인정하기 싫지만 엄마는 정말 늦은 걸지도 몰랐다. --- p.95 원래 남편도 신청을 해놓았었는데 취소하고 나 혼자 나온 길이었다. 부부싸움의 등급을 1부터 10으로 나눈다면 최악인 10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었다. 누가 잘못했고 누가 밉고의 수준이 아니라 나의 운명, 아니 이 운명으로 이끌었을지 모를 전생까지 저주하는 상태, 이성애 결혼과 XY 염색체에게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져 슬픔마저 느껴지지 않고 앞으로의 계획 따위도 하지 않는, 고통에조차 무감해진 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 --- p.115-116 금강불괴 르브론 제임스라도, 2년 연속 우승했던 마이애미 시절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뭐라고 10년 전과 같은 힘과 속도로 살아야 하나. 우리는 나이를 차곡차곡 먹고 있고 어떤 기능은 퇴화하고 있다. 매일 집밥을 차리고 몇 시간 만에 책 한 권을 뚝딱 읽고 퇴근하고 외국어 학원에 가던 30대의 나는 될 수가 없다. 중요한 건, 그만두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 아닐까. --- p.135 드라마 〈길모어 걸스〉의 주인공 모녀 로리와 로렐라이처럼 대화 속에서 문학과 음악과 영화의 레퍼런스를 쉴 새 없이 사용해도 서로 찰떡같이 알아듣는 모녀가 되고 싶었다. 나에게 그런 성향이 강하니 당연히 나에게서 그런 딸이 뿅 하고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러나 아이는 소설은 전혀 읽지 않고, 아이돌 춤을 추고, 임창정 노래를 좋아하고, 〈신과 함께〉와 〈암수 살인〉을 보는 아이로 자라났다. --- p.204 방대한 양을 번역하신 존경하는 번역가 선생님에게 마감 후에 무얼 하시냐고 물으니, 오전에 마감을 하고 나면 오후에 산책을 하고 와서 다음 책을 시작한다고 하셔서 우리 모두 그분의 스토아적인 태도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어머나 그건 아니 되어요. 마감 의식은 화끈하게 해야 한다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분이 일중독자라서가 아니라, 놀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하셨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 p.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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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희일비하는 번역가의 일상
예민하고 지나치게 감성적인 탓에 실수도 잦고 때로는 낭패를 자초하기도 하는 사람. 그저 라디오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학창시절부터 꿈꾸던 라디오 작가가 되었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자 돌아갈 일터가 허망하게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일 없이 사는 인생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번역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만만치 않은 초보 번역가로서의 서러움과 인고의 세월의 지나 어느덧 안정적으로 일감이 들어오고 인정받는 중견 번역가가 되었다.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딸 하나를 학교 보내고 작업실로 출근하는 프리랜서. 이렇게 써놓고 보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생활에서 번역가와 주부라는 두 직업이 결합했을 때 발생하는 특수 상황들은 그다지 멋있지만은 않다. “번역가이자 가사·육아 노동자인 사람은 항상 날짜와 시간 계산을 하면서 카페, 도서관, 작업실, 마트, 시장 집만 오가면서 바퀴를 쉼 없이 굴려야 넘어지지 않는다. 노동 강도에 비해 보수나 보람은 적고 현기증이 올 때까지 일해야 그나마 욕을 먹지 않는 수준이 유지되며 하루만 게을리하면 그 즉시 표시가 나는 것도 두 가지 일이 닮았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갈아’ 일을 해왔기에, 첫 저서를 내고 지방 독립 서점에 강연을 가는 길이 더없이 감개무량하다. 인정받는 것이 어색하지만 그만큼 감사하다. 10년 만에 새 집으로 이사를 앞두고 지은이는 문득 자신이 너무 과하게 들떠 있음을 깨닫는다. 그건 물론 낡고 좁은 아파트에서 고생하며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새로 시작하고 싶은 욕구, 더 나은 나로 살고 싶다는 갈망’ 때문이었다. 살아오며 예전보다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기에, 새로운 장소에서 펼쳐나갈 자신의 삶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 로맨틱 코미디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소울 메이트’라는 존재를 꿈꾼다. 내가 어젯밤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하고,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연인. 그러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 환상임을 깨달았다. 남편은 소울 메이트라기보단 생활 메이트였고, 한때나마 ‘이 아이야말로 나의 소울메이트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했던 딸아이는 사춘기가 되자마자 마음 변한 연인처럼 매몰차게 떠나버렸다. 그런데 내 인생에 소울 메이트란 없음을 인정하자 진정한 해방감이 찾아온다. 누군가에게 굳이 나를 맞출 필요도, 내 가치관을 굳이 바꿀 필요도 없다. 나를 완전하게 해줄 누군가가 없었어도, 내가 지나온 수많은 순간 나는 나 자체로 완전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우리는 타인과 어울려 살아야만 한다. 지은이에겐 그것이 늘 어려웠다. 감정기복이 심한 탓에 관계를 그르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심지어 일종의 왕따 공포증도 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그룹을 지어 놀러 가면서 “우리 노지양은 빼자”라고 한 말을 전해들은 뒤로 생긴 트라우마다. 하지만 자신이 그리 인기 있는 타입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 적어도 한 가지는 노력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만나면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자고. 그래서 약속이 있을 땐 일부러 말을 줄이고 상대의 말을 듣자고 주문처럼 외며 외출을 한다. 그런 경청이 습관이 되면서 언젠가부터는 정말로 앞에 앉은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노력으로 얻은 긍정적 변화다. 타고난 성격을 바꿀 순 없지만 적어도 태도는 바꿀 수 있었다. 나이가 든다고 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 언젠가부터 아무도 그 사람에게 꿈을 묻지 않게 된다. 나이 든 여성은 ‘아줌마’라는,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치부된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욕망이, 하고 싶은 일이, 이루고 싶은 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은이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 빈손으로 상경해 평생 악착같이 일을 해 세 딸을 키웠다. 자식들이 다 장성한 뒤 평생 관심 있었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엄마와 함께 지은이는 홍대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배워보지만, 엄마는 조급하기만 하다. 그러다 또래들이 있는 동네 문화센터를 다니게 되셨는데, 그곳에는 벌써 십수 년 전부터 그림을 시작해 수준급의 작품을 그리는 주부들이 대부분이었다. 엄마는 점점 수업에 빠지더니 그림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너무 늦었나 봐’라는 문자를 받고 먹먹해하며 지은이는 깨닫는다. 그래, 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늦었을 수도 있다고. 엄마에게 하고 싶은 것이 있냐고 10년만 먼저 물었다면 엄마의 노년이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았을까 후회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마음이 동했을 때 하고 싶은 걸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은이 역시 번역을 하면서도 줄곧 자신의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어왔는데, ‘난 이제 늦었어’라고 생각만 했다면, 자기 이름이 ‘지은이’로 새겨진 책을 손에 쥘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당장 이룰 수 없는 종류의 꿈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꿈을 간직하고 있을 때,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을 내뿜는다. 실제로 이루어지든 아니든 꿈을 품고 있는 한, 그것을 위해 내딛는 오늘 하루가 달라질 수 있기에 꿈은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