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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설탕으로 만든 사람 빈뇨 감각 뒷장으로부터 에세이 내 어깨 위의 도깨비 해설 바로 여기, 뒷장으로부터―소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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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을 열면 판도라의 상자처럼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마구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알고 있지. 판도라는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있더라도 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작은 희망 하나를 보기 위해 일부러 절망을 만들어내곤 하니까.
--- p.31 「프롤로그」 중에서 오랜만에 꾼 꿈 때문일까. 나갈 준비를 하면서 소설을 쓰려고 애썼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고 비참한 예감이 들었다. 윤조가 나오는 나의 소설은 분명히 끝을 맺었지만 윤조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독하게 살아남아서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 p.41 「설탕으로 만든 사람」 중에서 산에 오르고 싶다기보다 녹음이 짙은 숲속에 들어가 길을 잃고만 싶었다. 이를 어쩌면 좋지, 라는 마음을 가지고 오랫동안 해가 질 때까지 숲속을 헤매다가 외딴집 하나 발견해서 그곳에 잠시 머물고 싶었다. 이 마음은 결국 헤매는 데 중점이 있는 게 아니라 쉴 곳을 만나고 싶은 것에 가까운가. 그렇다면 참 시시하다. (……) 이해되지 않는 것들은 왜 모조리 다 슬픈 것인지. --- p.73~74 「설탕으로 만든 사람」 중에서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에 앉았다. 마려웠던 느낌에 비해 소변 양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나는 다 눈 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분명히 남아 있을 잔뇨를 기다렸다. 그동안 엄마와 언니 그리고 내게 비어 있는 무언가를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결핍된 부분을 욕망하기 마련인데, 우리 세 사람이 욕망하는 건 다르게 보면 다르지만 또 비슷하게 보면 비슷한 것도 같았다. --- p.97 「빈뇨 감각」 중에서 괜찮은 것과 별개로 나는 산에 가지 않아. 엄마는 산에 가서 마음의 정리, 그러니까 제대로 된 끝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가능성을 품고 싶은 걸까. 산에 가는 걸로는 부족해 엄마. 내가 해봤는데 실패했거든. 하지만 실제로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 p.107 「빈뇨 감각」 중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윤조가 누구인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걱정했던 게 우스울 정도로, 엄마와 언니는 윤조를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대했다. 원래 함께 살고 있던 가족의 일원이니 이 집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나 혼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윤조를 힐끔거렸고 네 명이서 밥을 먹는 게 어색해 숟가락을 자주 떨어뜨렸다. (……) 보석함에서 기어 나온 게 윤조가 아니라 나인 것만 같았다. --- p.115~116 「뒷장으로부터」 중에서 딱히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손톱을 깎아줄 수는 있지 않을까. 윤조의 손톱을 깎아주는 사람이라는 수식은 길어서 꽤 마음에 들어. 어떤 사람의 손톱은 아주 아주 느리게 자랐다. 나는 그 속도를 이해해야 했다. 양말을 벗어볼까 하다가 공원에서 봤던 사람들처럼 뒤로 걸어보았다. 뒤로 걷기는 쉬웠다. 뒷걸음질 치는 건 내 특기니까. 뒤로. 더 뒤로. --- p.144~145 「뒷장으로부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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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세계,
그러나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선명한 갈증 “윤조가 나오는 나의 소설은 분명히 끝을 맺었지만 윤조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독하게 살아남아서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 소설집의 제목은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말한 ‘녹색 갈증’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에게는 자연과 생명체에 이끌리는 경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으로의 회귀본능은 자연스러운 증상이라는 그의 주장이다. 즉, ‘녹색 갈증’은 다른 형태의 생명체와 연결되고 싶어 하는 욕구라고 할 수 있다.”(해설, 소유정 문학평론가) 그런 의미에서 ‘녹색 갈증’은 최미래의 소설에서도 유효하지만, 단순히 ‘녹색 갈증’에 목말라하는 도시 생활자의 삶을 그려낸 것이 아닌 한층 더 입체적인 욕망으로 그려진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녹색 갈증’을 느낀 이들이 주로 찾는 공간은 ‘산’이다. 하지만 여기서 ‘산’은 실제적 공간이라기보다 “연필을 굴리지 않아야 그려지는 그림”처럼 오직 상상으로만 닿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연필을 굴리지 않아야 그려지는 그림이 있다는 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 감각을 설명할 수 있을까. (……)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그곳의 날씨는 자유자재로 바뀌었으며 처음 디뎌본 곳인데도 이미 예전에 와본 적 있는 것같이 익숙했다. 긴 시간 뒤에 찾아올 거라고 예상한 미래가 바로 눈앞에 당도한 것처럼. (「프롤로그」, 28쪽) 주인공인 ‘나’에게 산으로 가는 법을 알려준 ‘윤조’도 당연히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다. ‘윤조’는 내가 쓴 소설 속 인물이며, 「프롤로그」의 마지막에서 ‘나’는 어떤 결말도 짓지 않은 소설 속에 ‘윤조’를 남겨둔 채 도망친다. 그 후로 ‘나’는 「설탕으로 만든 사람」에서 “한 편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마음 자체를 잃어”(41쪽)버린 상태가 되어 삭막한 도시에서의 삶을 살아간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직접 설탕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빚는 공주가 나오는 그림책처럼 오로지 ‘나’는 소설 속 ‘윤조’를 통해서만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조’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심한 갈증을 느낀다. 「빈뇨 감각」에서 ‘나’는 목마름을 느끼고 실제로 물을 마시지만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물을 많이 마셔 요의를 느끼지만, 문제는 요의를 해결한 뒤에도 끝나지 않는 잔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소변을 참는 동안에도 나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밀려드는 파도처럼 문장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것까지만 맞아야지. 이것까지만. 하지만 파도는 한 개, 두 개 나누어져 있다고 볼 수 없고 내가 그 끝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빈뇨 감각」, 98~99쪽) ‘나’의 요의는 밀려드는 파도처럼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문장으로 자연스럽게 치환되며 ‘윤조’와의 재회를 예고한다. 「뒷장으로부터」에서 ‘윤조’는 보석함을 스스로 열고 나와 엄마의 살가운 딸과 언니의 다정한 동생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 윤조를 보며 ‘나’는 “보석함에서 기어 나온 게 윤조가 아니라 나인 것만 같”(116쪽)은 기분에 휩싸이며, 윤조가 내가 쓴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윤조가 쓴 소설에 자신이 등장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이건 기억해야 할 거야. 너도 그 이야기 속에 있다는 거”(「설탕으로 만든 사람」, 73쪽)라는 ‘나’의 헤어진 애인 ‘명’의 말처럼, 비로소 ‘나’는 ‘윤조’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최미래 작품에서 시차 없이 당도하는 불안에 대비하는 방식은 오로지 ‘상상(글쓰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윤조가 나오는 나의 소설은 분명히 끝을 맺었지만 윤조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독하게 살아남아서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을 향한 바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녹색 갈증’은 실존하는 어떤 존재를 향한 것이 아닌, “글쓰기를 통해 강력한 생명력을 부여받은 하나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것은 “오직 ‘나’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세계”이며, 그러나 “닿을 수 없는 그 세계에 대한 열망이 지금 ‘나’에게는 가장 선명한 갈증”(해설, 소유정 문학평론가)인 것이다. 작가의 말 불안을 대비하는 상상. 그건 대부분 정도를 지나치지만 정도가 지나친 일들은 실제로도 종종 일어나기 때문에 몇 번은 유용하게 대비할 수 있었다. 몇 번의 대비를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상상은 부정적일수록 일리 있게 느껴져 나를 손쉽게 사로잡았다. 최장영실은 한숨을 쉬고 하품을 하고 콧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상상 속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 있다는 걸 알린다. 그러면 나는 가만히 현실로 돌아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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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조와 함께 있을 때에만 ‘살아 있음’을 느꼈다는 ‘나’의 고백은 오직 글쓰기를 통해서만 실존을 감각했다는 말이기도 하므로. 요컨대 ‘나’에게 작동하는 녹색 갈증은 실존하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쓰는 이에 의해 강력한 생명력을 부여받은 하나의 세계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 오직 ‘나’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세계, 그러나 닿을 수 없는 세계를 향한 열망이 지금 ‘나’에게는 가장 선명한 갈증일 테다. - 소유정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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