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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주의자 고희망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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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서체만 아니었어도 내가 말 안 하겠는데, 텀블러 하나 사 줘?”
“쓰는 데 전혀 문제 없거든?”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목적이 애초에 쓰레기를 줄이는 건데, 텀블러를 종류별로 모으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바닥에 깔린 타피오카 펄을 먹으려고 애쓰는 나를 보며 지수가 말을 이었다. “종말을 바라는 애치고는 참 환경에 관심이 많단 말이야.” “넌 나한테 참 관심이 많단 말이야.” --- p.23 “그냥 알았어. 일종의 혀 말기 같은 거야.” “혀 말기?” “학교에서 혀 말기에 대해 배운 적 있어?” “책에서 본 적 있어. 유전적인 거라고.” “누구한테는 당연하게 말리는 게 누구한테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잖아. 나한테는 그랬어. 명확했어.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지.” 혀를 말아 보았다. 자연스럽게 말렸다. 말리지 않는 걸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쉬웠다. --- p.45 나는 소망이의 마지막 순간을 몇백 번, 몇천 번이나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본 건 소망이의 뒷모습뿐이었기에, 그 애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상상 속에서 소망이는 서럽게 울고 있거나, 솟아난 용기로 한껏 상기되어 있다. 소망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왜 마녀의 숲에 가려고 했어? 나 때문에 그랬어? 하지만 대답은 영원히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게 다 나 때문이다. --- p.69쪽 “고요한 희망.” 오므라이스를 다 비울 때 즈음 떠오른 문구를 내뱉자 도하가 오, 하며 박수를 쳤다. “좋다! 고요한 희망.” 요란하지는 않지만,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막강함이 느껴졌다. 삼촌과 내가 늘상 주고받던 농담도 떠올랐다. 내가 ‘삼촌 오늘 고요하네’ 하면 삼촌이 ‘넌 오늘도 희망차고!’라고 맞받아쳐 주던 대화가. 삼촌이 페스티벌에 가지 않더라도, 이 문구는 꼭 보여주고 싶었다. --- p.147 “D, 넌 왜 종말에 대해서 알고 싶어? 어차피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없는데.” D는 조심스럽게 방울토마토 줄기에 매달린 잎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우리가 겪은 게 종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난 종말이라는 말이 싫어. 이게 진짜 종말이라면, 우리가 남았을 리가 없잖아.” “언젠가는 사라질 거잖아.” “하지만 아직 살아 있잖아. 이유가 있을 거야.” 낙관적인 D의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우리가 살아남은 거 말이야. 불쌍해서일지도 몰라. 우리는 울고 있는 아이들이었잖아.” “기쁠 때도 눈물이 나오는데.” “신이 보기에는 그저 우리가 불쌍한 애들이었던 거야.” --- p.196 죽는 건 슬프지만 딱 하나 기대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세상으로 가면 소망이를 만날 수 있을 테니 무섭지만은 않아요. 사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 거잖아요. 종말이라는 건 누구나 피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종말이 올 때가지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요. 그때까지 우리는 살아 있는 거니까요. --- p.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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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줄곧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먼 미래의 종말을 상상하며 펼치는 현재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 『종말주의자 고희망』은 세상이 언젠가는 종말 할 것이라고 믿는 중학생 희망이 ‘지금, 우리’를 오롯이 바라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어차피 언젠가 종말 할 세상이라는 이유로 오늘과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희망은 인류가 종말 하는 소설을 쓴다. 희망은 세상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기대 역시도 모조리 지워 버린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소설이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종말에 사로잡혀 있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게 되고, 오늘도 무사히 살아냈음을 깨닫게 된다. 줄곧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희망의 곁에는 사랑하는 삼촌 요한과 친구 지수와 도하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희망의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희망의 서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가 함께 어우러져 다채롭게 펼쳐진다. 마치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에 펼쳐진 무지개처럼 희망차고 아름답다. 비가 그치면 새하얀 줄로만 알았던 빛이 사실은 무지갯빛이라는 것을 알게 되듯, 소설 속 인물들의 삶도 닥쳐온 시련이 전부가 아니라 그 너머에 다채롭게 펼쳐진 빛나는 오늘이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까지 일깨워준다. 십 대 청소년은 미래를 위해 가장 눈부신 시절의 ‘오늘’을 놓칠 때가 많다. 희망이 과거 동생의 죽음과 그로부터 비롯된 부모님과의 갈등, 어차피 종말 할 미래를 생각하느라 반짝반짝 빛나는 자신의 ‘오늘’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처럼, 삼촌 요한이 스스로를 모자이크 안에 가두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내가 어딘가에 고여 있다고 생각하거나, 이미 지난 일이나 앞으로의 미래를 걱정하느라 하루를 다 써 버린 십 대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건네는 문장들을 담고 있다. 어쩌면 종말은 곧 다가올 미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밝게 웃고 있다면, 환하게 빛나고 있다면, 우리는 그걸로도 충분히 반짝이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게 아닐까. 이 소설을 읽는 모두의 ‘오늘’이 생생하고 환하게 빛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