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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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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물빛이다. 강둑에 앉아서 보니 한 무리 소떼가 눈 아래 풀밭을 뜯는데, 등줄기에 떨어진 햇빛이 탁탁 불티를 튀기며 타고 있다. 몇 마리는 물속에 무릎을 담그고 서서 긴 숨으로 물을 들이켠다. 물가에 머문 것이 며칠째인가. 여러 날째 물빛에 씻긴 몸통 속으로 한 줄기씩 물줄기가 흘러드는 것이 보인다.
어느새 어두워지고, 물소리 적적해지고, 검은 산봉우리들이 한 봉우리씩 소 등에 실려서 산 밑 마을로 돌아가고 있다. ---「탐진강 12」전문 깊어진 것이 무엇인가 헤아려보아야 고작 속내거나 골이거나 주름살이거나 아니면 그리 아픈 그리움일 것인데 장흥읍에 가서 보았다 깊어진 사람이면 똑같이 들여다보며 사는 것 사람들은 하나씩 강을 기르고 있었다 ---「탐진강 13」전문 또 그는 떠나겠다 하고 나는 그의 어깨에 걸었던 팔을 내린다 오직 강이 남는다 누구인지 물 건너에 서 있어서 손 치켜들며 소리쳐 어이, 부르면 손 마주 치켜들며 소리쳐 어이, 대답하는 그 江, ---「탐진강 21」전문 가리킨다, 얼마나 먼 어디를 바라보는 눈길이 거기에 닿아서 음악이 되는가, 하고 먼 거기보다 더 먼 어디에 가닿는 음악이라야 긴 강을 길어 흐르게 하는가, 하고 그 강이 멀고 외진 땅을 흘러가는 때에 음악은 느리게 흐르고 조용히 저무는가, 하고 그중 낮은 땅을 적시며 흐르는 음악이 다 어둔 하늘 아래로 흘러가는 저 강인가, 하고 마지막에 기다리는 사람이 저리 먼 거기에 있어서 비로소 닿은 강에다 두 손 담그고 마침내, 가장 낮은 음악보다 더 오래 우는 속울음을 울고 있는가, 하고……, 가리킨다 ---「탐진강 45」전문 강에 와서 머문다 풀벌레소리와 물소리는 서로 가깝고, 하늘빛과 물빛은 한가지로 푸른, 강이 제일 맑은 나날이 간다 얼마나 오래 걸려서 걸어온 첫날부터 날마다 강에서는 놀이 타는가, 머리 위로 빠르게 날아간 새는 하늘에 박히어서 언제 빛나며 별빛이 되는가, 생각한다 오늘은 서쪽으로 흐른 강이 어느새 지는 놀 아래를 지나갔고 나는 귀 씻고, 눈 감고, 아까부터 어두워지며 반짝이는 물소리를 듣는다 ---「탐진강 49」전문 땅은 오랫동안 깊어져서 샘이 되었겠지, 샘은 깊어져서 물이 고이기까지 얼마나 기다리었는지, 영암땅 한 끝에 엎드려서 찬 샘물 한 모금 들이켜고 장흥땅에도 강진땅에도 찰찰이 차오른 물빛을 디디며 간다. 눈물 한 움큼 움켜쥐고 걸어서 갔던 옛일이 아니다. 돌 한 개 집어서 쥐고 오래 걸어서 발바닥이 닳은 다음에도 해진 발바닥 부딪치며 걸어서 물길을 따라간다. 소식보다 먼저 가서 앞에 간 사람도 있고 소식 없이 뒤따라오는 뒤에 오는 사람도 있어서 저마다 돌 한 개씩은 쥐고 걸어서 가는, 걷는 사람들이 걸어서 가며 앞과 뒤를 잇는, 처음부터 흘러서 길게 흘러간 멀리까지, 물 흘러서 왔고 물 흘러서 가는, 강이 견고하다. ---「탐진강 52」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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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진동을 느끼며 ‘몸살’을 앓는 강
담담한 힘을 지닌 강의 언어로 서정을 말하다 절필 30년의 간극을 잇다 “탐진강, 하고 낮게 불러보면 말 속에서 강이 흐른다.” ― 정상철, 해설 「‘너와 나의 사이’를 들여다보는 강」 중에서 말 속으로 흐르는 강에 대한 기록, 『탐진강』(문예중앙시선30)이 출간됐다. 고요하게 빛나는 언어로 서정시의 진경을 펼쳐온 위선환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시집 『탐진강』은 시인이 1999년 5월부터 2013년 4월까지, 15년간 써 내려온 「탐진강」연작을 엮은 것이다. 시인은 서문에서 “시를 끊고 지낸 30년의 간극”을 잇기 위한 시들이라 밝히고 있다. 위선환 시인은 1960년 용아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단에 나왔다. 그러나 출구 없는 언어의 감옥에 갇혀 괴로워하다가, 어느 날 탐진강으로 갔다. 투신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죽은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언어였다. 그를 대신해 언어가 죽고, 그는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30년간 시를 쓰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시인은 다시 탐진강을 찾았다. 강에서 시인은 늙은 자신의 모습과 더불어 ‘절정이고 아름답던 그때’의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았을 테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강물에 투신했던 언어도 거기에 있었다. 나 말고도 투신한 사람이 있다. 벼랑 밑 깊어진 물속이 퍼렇게 멍들어 있다. ―「탐진강 1」전문 그는 강물에 투신한 언어를 건져 올렸다. 그리고 30년 전 시를 끊었던 바로 그 강에서 그는 다시 시를 시작한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강을 기른다 「탐진강」연작은 시를 끊었던 30년, 그 뼈아픈 공백기를 강물로 잇고자 하는 의지의 소산으로 읽힌다. 강의 기억은 오래 흐른다. 강은 길게, 오래 흐르므로 사람들은 어느 때나 거기로 가서 강을 만날 수 있다. 강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강이 오래 운다. 잊었겠는가. 풀밭에 한 사람이 눕던 것을, 언제나 아프던 것을, (…) 어두워지기 전에 미리 가서 기다린다. 어제 던진 조약돌들이 저무는 물바닥 위를 잔달음질로 건너가고 있다. 기억은 수도 없이 동그랗게 물무늬를 그리고. 강은 목메고, 운다. 등을 굽히고 일어서면 강이 업히는 것을, 등이 흠뻑 젖어서 무너지는 것을. ―「탐진강 2」부분 강은 오래 기억한다. 강을 바라보면 강만 보이는 게 아니다. 너와 나의 사이, 강을 통해 흐르는 모든 생명들이 보인다. 시집에 흐르는 탐진강 속엔 버들가지, 피라미, 자갈, 패랭이꽃, 산국, 풀벌레소리, 귀뚜라미, 조약돌, 검은 산봉우리, 새, 소떼… 등등 수많은 생명들이 흘러간다. 강 속에 흐르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탐진강에는 사람도 있고, ‘그’도 있다. 그들도 만나고 흘러간다. 또 그는 떠나겠다 하고 나는 그의 어깨에 걸었던 팔을 내린다 오직 강이 남는다 누구인지 물 건너에 서 있어서 손 치켜들며 소리쳐 어이, 부르면 손 마주 치켜들며 소리쳐 어이, 대답하는 그 江, ―「탐진강 21」 전문 시인은 “탐진강은 사람과 강이 하나로 바라보이는 공간과 사람과 강을 하나로 바라보는 시간의 사이를 흐르는 한 흐름”이라고 썼다. 강을 통해 사람들은(또한 생명들은) 만나고 어울리고 하나가 되어 실물줄기로 흘러간다. 탐진강은 강에 모이는 생명들의 “앞과 뒤를 잇는” 연대의 장이 된다. 시인의 말대로 ‘견고한 강’이다. 강이 흐를수록 깊어지듯, 사람들도 늙어가며 깊어진다. 깊어지는 것은 속내, 주름살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아픈 그리움이다. 깊어진 것이 무엇인가 헤아려보아야 고작 속내거나 골이거나 주름살이거나 아니면 그리 아픈 그리움일 것인데 장흥읍에 가서 보았다 깊어진 사람이면 똑같이 들여다보며 사는 것 사람들은 하나씩 강을 기르고 있었다 ―「탐진강 13」 전문 강이 사람을 기르지만, 사람 또한 강을 기른다. “그 강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기르는 모든 사람의 강이다.” 강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삶의 “가파르고 비좁고 이리저리 굽은 골목길을 걸어 내려”가면 길의 끝이다. “길의 끝에는 강이다.” 모나고 거친 삶의 길을 지나 강에 도착한 사람들이 강에서 만난다. 그 강에서 사람들은 아픈 속내를 털어놓는다. 사람도 울고, ‘강도 목메어 운다.’ 이를 두고 정상철은 해설에서 “강물과 함께 흐르는 온갖 것들이 만나 관계를 맺으며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다가 몸살을 앓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며 “그 강과 관계 맺은 모든 생명들은 유순해진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기르는 것은 몸살을 앓는 강이며, 한 생을 앓는 ‘너’와 ‘나’가 그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난다. 「탐진강」 연작은 시인 대신 투신했던 언어에게 바치는 애도이며, ‘언제나 아프던’ 사람(시인인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치유로 작용하는 강의 노래이다. 그곳에서 아팠던 한 사람은 자신의 언어를 버리고 벙어리가 되어 떠났지만, 다시 돌아와 시에게 용서를 구했다. 용서의 말을 듣는 강은 벙어리라 말이 없다. 다만 모든 것을 포용하며, 기억하고, 함께 운다. 그것이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 사라지는 것들이 빛났다 떠나가며 손바닥을 치켜들었으므로 마주 손바닥을 치켜들었고 손금은 손바닥에다 골을 팠으므로 골물들이 모이고 고여서 손바닥이 잠기었다 잠긴 손바닥이 가라앉으며 물은 깊어지며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물 흐르는 소리 아래로는 물소리보다 깊이 흐르는 물줄기가 흘러가며, 맑아지며, 환한, 흘러가는 강이 빛났다 ―「탐진강 35」 부분 수직으로 깊어지는 강은 더욱 깊고 맑아지는 언어의 담금질과 같으며, 수평으로 흐르는 강은 연대한 모든 생명들이 만드는 역사와도 같다. 이를 두고 정상철은 말한다. “위선환에게 탐진강은 아픈 희망이다. 무너진 뒤에야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기는 것이고, 강을 등에 업었으니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시심(詩心)으로서의 탐진강을 길어다 쓰는 것이다.” “(그) 江이야말로 (시의) 江이다.” ― 뒤표지 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