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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바나나의 웃음
경제적인 일
기분으로 된 세계
좋은말
비누
저 곳 참치
열두시에 다가오는 것
당신들의 취향
내 입속은
사라지는 오렌지
정전
음부꽃
코발트블루
다낭, 단양 연가
이상한 그늘
장지동 버스 종점

2부
아는 여자
하얀 손이 놓고 간 것
민달팽이
태어나는 벽
필라멘트
로봇들의 약속
새가 되는 법
엑스트라
연기자들
행인
벌레 먹은 시
위험하다
보라색 시
노란 모자를 조문하는 법

안쪽

3부
웃음의 포즈
두 개의 수요일
흩어진 말
당신의 시계
가면놀이
너무 많은 이해
머리카락이 자라는 시간
고통의 메뉴
슬픔의 유래
김장을 안하는 명백한 이유
감은 눈
자판기
피자
두시 바람
허공
손에 관하여
7월 여자

4부
스위치
동쪽으로 세 발짝
춤추는 신데렐라
오늘 그림자
아파트
비빔밥과 분리수거에 관한 질문
물방울에 대한 기억
일 분 동안 우산
아주 오래된 약속
조용한 손
이모

의자 이야기
수수와 꽃과 다리
열한시 반
마야

해설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68쪽 | 250g | 125*204*20mm
ISBN13
9788927805304

책 속으로

바나나를 오전과 오후로 나눈다

바나나를 밤과 낮으로 나눈다

바나나를 동쪽과 서쪽으로, 만남과 사소한 이별로, 여자의 저녁과 남자로

나눈다

바나나로 세계를 나눈다

불안해지는 바나나

드디어 생선이 되는 바나나

왼쪽 바나나가 사라지고

바나나의 미래가 사라졌다

아 바나나 하고 웃는 바나나

바나나

네가 있는 곳을 알려줘

―「바나나의 웃음」전문
콜라를 사러 간다
콜라를 사기 위해 먼 아프리카로 간다
당신과 이 거리와 잠시 헤어지기 위해 그곳에 간다
손잡이가 없는 컵에 콜라 한 잔을 따라 마시고
컵이 없으면 그냥
다시 돌아오기 위해
시간이 잠시 남아 있으면 남아 있던 콜라를 다 마시고
비행기를 타고 안전벨트를 매고
구름 속에 묻힌 채 잠을 자자

여기가 어디지
밤에는 왼손을 벌레에 물려 말라리아에 걸리고
간판이 떨어진 병원에 들러
앓다가 돌아오자
병원 벽에는 알 수 없는 아이들의 낙서
내리는 빗방울

친구들은 웃고 또 웃겠지
콜라를 사기 위해 아프리카에 가다니
비행기를 타고 가다 졸다니
나는 조금 웃는다
그곳에서 콜라를 마시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 산다고
아프리카는 그러기 위한 장소

콜라를 그리워하며
콜라를 사러 아프리카로 가자

―「경제적인 일」전문
오렌지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사람
사람의 투명한 옷을 입고 의심하고 이해한다 오렌지가 되려면 오렌지의 크기와 색깔과 색다른 구두가 필요하고
열 개의 손가락이 당장 필요하다
만일 당신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면
그건 오렌지의 감정

문을 열고 들어가 비와 사람의 단추를 누르면 주렁주렁 열리는 팔과 다리들 오렌지는 사람들을 박스에 넣어 선물한다
당신과 나 사이를 주고받는 어느 선물

상자 속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빠져나온 옆구리처럼 걸어 다닌다
뒤돌아보았을 때
일정한 높이와 냄새와 수만 개의 눈을 가지고

오늘 계단은 몇 개의 기분일까
백만 년 전 우리는 허리를 숙이다가 누군가의 호주머니에서
굴러떨어진 노을이었지 그걸 주우려다 또 떨어뜨린 노을빛

저녁은 가장 오래된 물질
죽은 척하고 놓여 있는 이 오렌지는 지워진 안개와 강물이 다 사라지는 오후와 다른 사람이 사는 마을을 거쳐 여기 희미하게 굴러 온 것

가보지 않은 여행지를 천천히 다녀온 사람들로
아는 얼굴로

―「사라지는 오렌지」전문

---본문

출판사 리뷰

웃음은 둥글고, 둥근 건 이상해

당신 앞으로 택배 상자 하나가 도착한다. 상자를 열어 보니 바나나가 있다. 그런데, 바나나가 웃고 있다. 둥그스름하게 휘어진 바나나가 둥그스름한 웃음을 지으며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당신은 그 웃음을 보고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힐 것이다. 당신은 처음 느껴본 그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다. 당신은 비로소 그 새로운 감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나나를 먹기 위해 웃고 있는 바나나를

나눈다

바나나로 세계를 나눈다

불안해지는 바나나
―「바나나의 웃음」 부분

당신이 바나나를 나누는 일이 세계를 나누는 일과 이어진다. 바나나가 세계이기 때문이다. 바나나는 둥글고 둥근 것은 세계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세상의 모든 감정들이 물질화하는 것 같다. 그러자 당신은 세상이 달리 보이게 된다. 무엇을 봐도 낯선 기분이 들고, 무엇으로도 기분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다섯 장의 종이를 오려 기분을 만들었다
다섯 장의 종이가 되기 위해
팔과 다리가 모호해진다
아홉시가 되려다가 아홉시 이후가 되는 시곗바늘들 모든 밤이 저녁을 이해하고 아홉시를 용서했다
―「기분으로 된 세계」 부분

사물이 기분이 되고, 기분은 사물이 된다. 세계의 모든 것들이 시시각각 변화한다. “오렌지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사람”이 되고, 여자는 “죽어서 사탕이” 되고, “나는 이미 사라진 풀벌레 소리”가 된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들이 그렇게 되는 순환을 통해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이 이상한 현상을 이재복 평론가는 ‘그늘의 중력’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며 “불연기연의 원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에고가 자유의 견고한 바탕 위에서 성립될 때 세계에 대한 탐색의 정도도 그만큼 깊어질 수 있으며 그것의 완성은 ‘둥ㅤㄱㅡㄻ’으로 드러난다. 세계의 둥ㅤㄱㅡㄻ 혹은 둥근 세계는 소외의 변증법이 아닌 아우름의 원리가 만들어낸다.”라고 이 모호하고 둥근 세계를 이해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詩)의 가능성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시에서 가능해지는 순간이 있다. 예컨대 ‘바나나가 생선이 되는 일’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시에서는 가능하다. ‘내가 당신이 되는 일’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사랑에서는 가능하듯이. 그래서 시는 아우름이며, 사랑이다. 그렇기에 최호일 시인은 비록 지금 그것들이 혼란스러워 보인다고 할지라도 여러 사물과 감정을 한자리에 두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여러 종류의 꽃이 어우러져 하나의 꽃으로 보일” 순간을 고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단히 아름다운 꽃일 것이다. 그 꽃을 찾아서 최호일은 무모하게 간다. 그의 첫 시집으로 그의 엉뚱한 발걸음을 따라가 보는 건 어떨까.

떨어질까 두려워 나는 나로부터 가장 먼 어제야

그럼 우리 어제보다 더 먼 숲으로 가자
―「태어나는 벽」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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