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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나이테 석류 교차 의자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목소리 회오리 한 그루 나무에서 만 그루의 어둠이 이를테면 빗방울 꽃의 눈물 노래하는 블루 모과와 새 산수유 포괄 새에 대한 어둠의 견해 어떤 일부분 홀로 여럿이 2부 유리에 비친 깃털 부류 격자문 워킹 그 남자와 란 살 소나무와 폭설 먼지 무대 예감 귀를 다루는 자화상 햇빛에 녹는 고양이 제19장 흐린 날 달과 시간 듯이 주인공-변주 3부 함부로 사랑의 손수건 크리스 보티의 트럼펫 아프로디테 문지 시집 닮은 촛불 15분 삼면이 앵무 마리안느에게 : 돋아나는 처녀 만삭 달빛 터미널 우주의 저녁 면도 붉은 안개 당신 파묘 4부 관 파문 처음 듣는 새 빌린 장갑 고양이 피는 장미밭 담 렌즈 얼굴보다 나뭇잎 드르니항에서 보낸 무쉬의 날 흔 설원 달의 흡연 새로운 천사 안개라는 소리 꽃차 남겨진 새 해설/ 꽃과 천사 그리고 인간으로서 살아내기 ― 기혁, 시인·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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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빛의 길고 오랜 방랑이 석류를 위해 존재해왔다 태양에 지쳐 모자로 눈을 가리고 언덕에 누운 사이 피로에서 붉음을 빼내 단지 석류에게만 던져 준 것 전생도 후생도 붉음인 석류 앞에 빛깔로 나설 물건이 없다 아,라는 날카로운 칼날에 벌어진 입술이 차가움에 환각된다 숨을 뱉어 단단함을 연다. 숨이 닿는 순간 부스러지고 갈라져 해체되는 붉음. 소멸과 드러냄을 왕복하는 방식으로 문을 열고 닫는다. 밀착되지 않는 구석 자리는 몸에 각을 만들어 밀고 나간다. 더러 튕겨 나가는 밀폐 공간, 폐쇄를 밀어버리는 광부처럼 입으로 입으로 광맥을 파헤치다 끝내 붉은 기억만 영 캐럿 ---「석류」중에서 마침내 나는 사람이 되었다 쓰지 못한 무수한 사람이 되었다 시를 쓰다 창밖의 어둠을 살핀다 한 사람이 유리창을 톡톡 두 번 두드렸다 조금, 조금만 더 기다려줘 굶어도 배고프지 않은 며칠을 보내고 책상에서 늦게 저녁밥을 먹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의자입니다” 늙은 목공이 등받이와 네 다리만 있는 의자를 내놓았다 미완성을 오래 완성하고 있는 의자에게 앉을자리는 그다지 흥미로운 관심사가 아니다 기능을 지우면서 시를 써나가자 내 속에서 다 쓴 무수한 사람이 쏟아져 나왔다 의자가 많이 모자랐지만 그들이 서로 의자가 되어 사람이 모자라고 의자가 남아돌았다 ---「의자」중에서 꽃은 괴롭다 이슬을 터트리고 등 뒤로 어둠을 던져버리는 것이 꽃잎이 고통으로 머리를 털 때 향기는 두렵다 흐르는 물을 따라 멀어지는 어둠의 냄새 수많은 입맞춤으로도 물의 마음을 얻지 못해 뿌리는 떤다 꽃으로 꽃을 감추어 핀다 향기로 위장한 향기를 흩는다 천 가지 빛을 잃고 남은 한 가지 색 위에 눈물이 떨어질 때 벌레가 지나간 구멍으로 들이친 벼락에 꽃의 이전과 이후 뿌리의 이전과 이후가 나타날 때 씨앗에 새겨져 있던 죽은 꽃이 언뜻 피어날 때 향기는 환각이다 뿌리는 땅을 등진다 꽃잎은 빛의 수염이다 씨는 지금의 꽃을 감춘다 하늘은 눈을 감는다 바람은 지나친다 물이 돌아온다 어둠이 풍성해진다 어둠의 핵심에 가시가 돋친다 꽃이 파괴된다 ---「꽃의 눈물」중에서 물거품에서 태어나 발자국 없는 육체의 언저리입니다 비누칠할 살을 주세요 모래를 뿌려주세요 바람과 운무에 뒤섞여 보이지 않는 나를 견디기 힘들어요 색을 주세요, 핑크나 퍼플 정신 빠진, 빠지고 싶어도 빠져나갈 몸이 없어요 유방도 없고 입술도 없이 베누스라니 물거품을 헤집어 아버지를 찾아요 아버지의 근육을 만지며 느끼고 싶어요 살을 새하얀 시트 위의 그림자는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할까 그림자에 감싸인 손과 발 웃음과 눈물 심장과 피 당신 체온 지문 오늘도 차가운 물거품을 뒤져요 잘못된 초상화에 물을 끼얹어요 모천을 파도에 넘기고 뱃사람을 유인해보지만 물거품만 철썩이다 가버리네요 물거품이 많아도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아요 유일한 존재로 숨은 쉬어요 영원히 그러나 아직 단 하루도 살지 않았어요 ---「아프로디테」중에서 내가 나와 가장 멀어질 때 내 속에서 늑대가 뛰어나갔다 그렇다고 인생이 더 순해지는 건 아니다 지평선과 가까워질 뿐 한쪽 벽에 기대앉은 파도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았다 두 번 다시 파도가 될 수 없는 파도는 몹시 사나워지거나 해파리처럼 달라붙는다 육각형의 새를 보았다 먹구름 그림자를 종종 쪼다 날아오르는 새, 팔을 벌리고 다리는 모아 쭉 뻗어 흉내 내본다 그 순간은 육각형이 완전체로 보였다 맨발로 육각형을 지우고 한쪽 무릎을 세움으로써 가장 아름다운 완전체를 실현한 건 예수 물의 비중은 1 새의 비중은 0.1 나의 비중은 열 방향의 바람 모래톱에 썰린 바다와 하늘이 낳은 따개비, 제 조상을 닮지 않은 시간의 모습, 내일을 미끼로 사람을 낚고 있다 에스프레소 인간머신 노을 펼쳐진 하늘로 사람들이 빨려 올라간다 하늘은 짧은 인사말로 캄캄해진다 이별은 늘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 위의 독서 나를 떠나기 좋은 무쉬의 포구 바다는 달을 더 크게 키우고 난 몸속의 것들 다 쏟아버린다 ---「드르니항에서 보낸 무쉬의 날」중에서 내 몸에서 썩은 내가 나 살아 있는 꽃은 안 썩어, 언니 바람으로 누가 찻물을 끓이나 봐 바람이 활활 끓어 생강나무꽃 노란 향을 젓다 손가락을 데었어 꾸지뽕은 비탈에 좋고 찔레꽃은 삐끗에 좋대 새로 피어난 언니는 어디에 좋아? 무덤이 우러난 샘물이 맛이 깊다 하지 해골 물 마시고 부처 된 고승도 있고 어떤 이는 파묘에서 주운 사과를 먹고 막힌 침샘이 터졌다지 새를 날려 마시며 하늘을 흔들어 마시며 구름을 비벼 마시며 거센 바람이 몰려오네 저녁 해가 하얀 거위산 다 우려먹기 전에 능선 하나 더 타야 해 내가 지나간 후 누군가 잘 우러난 발자국 마시면서 후루룩 후-후 내뱉는 꽃 이름을 알려줘 어서 그냥 네 갈 길 가 독초 약초 다 잊고 명치의 통증을 동서남북 삼아 ---「꽃차」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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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게 자연을 비껴 나가는 세계
1999년 [심상]을 통해 등단한 이정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이를테면 빗방울』이 문예중앙에서 발간됐다. “리얼리즘적 문법과 자연적 서정의 세례 속에서 오랫동안 타자/세계와의 시적 교감을 모색해왔다”는 평을 받은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시를 ‘쓰는 자로서의 나’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욱 확장시킨다. 시인에게 자연은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할 만큼 절대적인 대상이다. 시를 쓰는 시인에게 있어 절대적 자연이란 언제나 마주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최고의 시란 시인이 쓴 시가 아닌 그저 ‘(자연을) 받아 적어 내려간’ 시일 테지만, 그러한 절대적인 시를 가정하기 위해서는 시인 자신의 쓰기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자연 앞에서 시인은 ‘쓰는 자’이면서도 ‘받아 적는 자’인 모순적인 존재에 머무르며, 도정 자체가 모순인 시 쓰기는 언제나 요원하다. 시인은 “입으로 입으로 광맥을 파헤치는” 광부 같은 태도를 가져보기도 하지만 갱도에서 얻는 건 “끝내 붉은 기억만/영 캐럿”(「석류」)뿐이다. 의자에 앉아 시를 쓸 때 시인은 “마침내 사람이 사람이 되”지만 또한 “쓰지 못한 무수한 사람”(「의자」)이 겨우 될 따름이다. 누구는 과육을 먹고 누구는 향기를 마시고 삼키는 열매도 있고 터뜨려 먹는 열매도 있다 바다 단전에 찰싹 붙어 어둠을 빨아먹는 밤배는 물의 열매 보름달로 익어 심해를 밝힌다 달에서 빼낸 씨를 가루 내 처음 우린 물에선 유황 내가 나고 그다음 우려낸 물에서는 갯내가 난다 향은 열매를 통과해 영근 물의 리본 지층의 광맥을 지나 대지의 심장에 가는 촉수를 대고 몸을 떨었던 공기의 낱장을 너무 빨리 넘기지 마라 장미는 향을 얻기 위해 거듭 깨어나 수십 장의 살을 바르고 코끝에 가시를 세운다 발밑에 버린 새빨간 면도날에서 그 향을 맡는 자 이를테면 빗방울 ―「이를테면 빗방울」 전문 그간 자연을 다룬 많은 시인들이 일상의 자연물이나 사물들을 유기체로 다룬 것에 비해 이정란 시인은 비약과 단절로 이루어진 시적 상황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로 인해 장미가 향을 얻기 위한 과정은 몸부림에 가깝게 느껴지며, 또한 여기에서 모든 자연을 인간화된 시선으로 통합해 보는 일을 경계하는 시인의 시선 또한 느껴진다. 말하자면 그런 태도는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아직 누구도 보지 못한 흙과 얼음의 무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며, 그 지난함이야말로 해설을 쓴 기혁 시인의 말대로 “시를 썼다는 흔적과 시인 자신을 지워내야만 하는 이율배반의 여정”일 것이다. 이정란 시인은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탄생한 시는 시인의 말마따나 “배고픈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음식물의 떨림” 같을 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