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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판본 머리말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1. 문화와 야만 2. 예술의 기준에서 판단한 과학 3. 과학의 독주: 기술 4. 삶의 병 5. 야만의 이데올로기 6. 야만의 실행 7. 대학의 파괴 언더그라운드 옮긴이의 말 |
Michel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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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야만』이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은 커다란 반향뿐 아니라 신랄한 비판 또한 일으켰다. 그 어조는 단호했으며, 그 주장은 지나치게 단정적인 것 같았다. 그 지복천년설의 제안에 예언적인 무엇이 있었다. 사라져가는 문화에 관한 한탄은 과거의 향수를 잘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것에 자리를 내줘야 했을 생각이나 방식, 표현 방법에 관한 애착을. ---p.13
‘소통’의 회복을 떠맡게 된 건 컴퓨터다. 고전 사유가 “의식의 소통”이라 불렀고, 현대 현상학이 여전히 “상호 주관성”이라는 이름 아래 부르는 것,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동시대인으로 되는 이 감정적 동요는 이제 화면 위 객관적 메시지의 출현으로 귀결한다. 이는 ‘정보의 고속도로’다. 그 위에서 우리는 누구의 얼굴도 구별하지 못한다. 소통, 이곳에서는 아무와도 소통하지 않으며 그 내용은 속도에 따라 빈곤해지기를 멈추지 않는다. 결국 다중적이고 비일관적인 모든 분석과 모든 평가 기준과 모든 비판에서, 그 역사와 발생에서 모든 이해 원칙에서 단절된 아무 의미 없는 정보의 소통이다. 바야흐로 학교에 컴퓨터를 들일 때다. 수업하는 건 컴퓨터의 몫이다. 유전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과 비슷한 정보의 소통이다. 모든 형태에서, 그리고 모든 변장을 통해 인간의 ‘자연화’는 갈릴레이의 ‘아프리오리’가 갖는 마지막 변모다. 인간은 사물과 다르지 않다. ---p.17 이 책에서 우리가 던지는 물음은 지금 얘기한 물음들을 피할 수 없다. 우리 시대 고유한 쇠퇴를 이해하는 일은 어떻게 삶의 쇠퇴 일반이 가능한지를 아는 일을 함축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쇠퇴가 더 뚜렷하다. 우리에게 닥친 야만의 특수한 성격을 명백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야만의 그늘에서 우리는 벌써 눈먼 이처럼 비틀거린다. 현대의 혼란이 과학 지식과 그것이 낳은 기술의 과도한 발전의 결과로 생기며, 또 그와 함께 과학 지식이 삶의 지식을 거부한데서 생긴다는 주장은 너무 일반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결국 자세한 보기를 통해 이를 증명해야 한다. 먼저 예술을 거론하겠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과학의 야만이라고 우리가 잠정적으로 부르게 될 것을 밝혀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p.54 ‘미학’을 통해 우리는 또한 하나의 이론적 학과를 가리킨다. 그 학과는 우리가 이제 막 얘기했던 미적인 실재를 대상으로 한다. 이대상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그 대상은 감성에 속하는 세계와 더불어 감성 일반이다. 칸트는 이처럼 이해한 감성 연구에 ‘초월론적 미학’이라는 이름을 줬다. 다른 한편으로 그 대상은 문화의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 감성적 삶은 그것의 매우 높은 실현의 모습에 이른다. 우리는 보통 예술 창작과 이것이 이른 천재적 작품 전체가 지닌 뛰어난 형상에 관한 연구를 해나가는 이론적 학과를 ‘미학’이라 부른다. ---p.66 근대 기술의 무시무시한 발전 한가운데 원자 융합, 유전자 조작 따위의 새로운 과정의 출현은 과학자의 의식에 물음을 제기한다. 하지만 그 물음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일소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에 있는 유일한 실재성 속에는 물음도 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연히 한 과학자가 양심의 가책으로 멈추게 된다면, 과학자는 과학에 봉사하기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백 명의 다른 이가 바통을 이어받으려 일어날 것이며 이미 일어났다. 왜냐하면 과학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없기에, 그리고 과학이 아는 실재성, 말하자면 객관적인 실재성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없기에, 기술은 이 객관적인 실재성의 자기 실현인데 과학이 할 수 있는 모든걸 과학은 과학을 위해 해야 하므로. ---pp.115-116 하지만 과학은 삶의 실천적 부정만이 아니다. 그 파토스적 의미에서 과학자를 통한 과학자 자신의 삶, 그 배제로서 과학은 근대 ‘문화’ 전체를 야만에 빠트린 어떤 태도의 원형을 제공한다. 그 태도는 그처럼 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 구실을 한다. 우리가 과학을 우리 연구에 채택한 것은 바로 이런 자격에서다. 우리 연구는 결국 이제부터 첫째, 야만의 이데올로기를 해명하는 일과 둘째, 그 실제를 해명하는 일을 목표로 하는 이중 주제에 따라서 그 방향이 정해진다. ---p.148 갈릴레이적 시도와 그 시도가 분산되는 여러 과학을 통한 삶의 제거보다 이 제거의 결과가 삶의 차원에서 그리고 삶에겐 더 심각해 보인다. 객관주의적 지식의 주제와 그 지식이 낳은 기술적 절차와 태도 전체에서 될 수 있는 한 멀어진 삶은 그런데도 그것이 있고 자신을 성취하길 멈추지 않는 그곳에 살아남는다. 다만 이 성취 방식은 이것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는 문화의 일반적 계획에 더는 통합되지 못한 채 그 자체에 내맡겨지고, 모든 자극과 모든 습득을 잃은 채 더는 그것이 따를 만한 그 어떤 큰 본보기도, 이 본보기와 똑같은 것, 살아있고 확대된 그것이고자 그것이 따를 만한 그 어떤 큰 본보기도 지니지 못하게 된다. 삶의 그런 실현 방식은 자기 부정과 자기 파괴에 관한 흉악한 의지로 전도되지 않을 때 기초적이고 거친 모습으로, 늘 더 빈곤하고 상투적이고 통속적인 모습으로 퇴행한다. 침묵으로 지나칠 수 없는 건 이제 야만의 실행이다. ---p.183 매체 존재 속에 접어든 인류는 하강하는 나선을 관통한다. 그것을 따라 삶의 힘은 문화의 희생적 역사 속에서 발견되고 보존된, 느끼고 이해하고 삶을 사랑하는 여러 실천을 차례로 저버렸다. 그 역사 속에서 획득된 모든 것은 포기라는, 힘의 증가라는 대가를 치렀다. 이 조건에서 한 독특한 사건이 비극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 우리가 아직 충분히 눈여겨보지 않았으며 문화를 전달하고 발전할 책임이 있었던 기구를 앗아간 사건이 있다. 바로 대학의 파괴가 그것이다. ---p.221 그렇다면 문화는 어찌되는가? 그것과 함께 인간의 인간다움은? ---p.260 이 상태에서 문화는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삶이 자기 안에 지칠 줄 모르고 오는 것과 같은 자격으로, 결코 아주 침묵하지 않는 삶의 언어와 같은 자격으로 살아남는다. 하지만 문화는 일종의 익명 속에 머무른다. 문화가 열망하는 교환은 더는 도시의 빛 속에서 그 기념물, 그림, 음악, 교육을 통해, 그 매체를 통해 일어나지 않는다. 교환 또한 은밀함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고독한 개인들이 우연한 만남에서 서로 같은 표시로 새겨져 있는 걸 확인했을 때 그들이 서로 소통하는 간결한 말, 성급한 지시, 몇몇 참조다. 문화를 전달하는 일, 모든 이를 그인 것으로 되게 해주는 일, 매체기술 세계의 견딜 수 없는 지루함과 그 마약과 그 흉물스러운 과대 성장과 그 익명적 초월성에서 벗어나는 일, 그들은 이를 매우 바랄 것이다. 하지만 매체기술 세계는 결정적으로 그들을 침묵으로 돌렸다. 몇몇 사람이 아직 세계를 구할 수 있을까? ---p.2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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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의 거장, 미셸 앙리가 말하는 야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야만의 시대이며, 야만은 삶의 무지이자 배제이자 제거다. 삶이 배제된 세계는 황량하고 처참하다. 그것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의 풍경이 아니다. 삶이 더는 가능하지 않은, 따라서 문화가 더는 가능하지 않은, 문화가 사라진, 말하자면 사이비 ‘과학적 문화’가 활개 치는 빈곤과 좌절의 풍경이다. 삶과 문화의 본질적 관계를 이해하면 야만을 규정할 수 있다. 미셸 앙리에게 문화는 ‘삶의 자기 변화’이자 ‘자기 성취’다. 그리고 미셸 앙리는 우리 시대를 야만의 시대로 규정한다. 야만의 시대, 곧 우리 시대에 가능한 문화란 없다. 야만은 문화가 싹트기 전이 아닌 문화가 죽기 시작하는 바로 거기에 그 얼굴을 내민다. “야만은 시작이 아니라 폐허다. 야만은 삶의 무지이자 배제이자 제거다.” 이런 의미로 보면, 갈릴레이에서 시작된 근대 과학은 한편으로 지식의 엄청난 축적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지만 이 지식이 문화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지식과 문화의 분열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다. 과학은 본디 문화의 한 형태이며, 본질적으로 삶에 그 뿌리를 둔다. 근대 과학이 이처럼 야만의 얼굴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갈릴레이의 환원과 갈릴레이 이후 근대 과학을 사로잡은 객관주의, 과학주의 이데올로기에 그 책임이 있다. 야만에 관한 미셸 앙리의 진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문화의 ‘폐허’로서 야만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이미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 성형과 자살은 야만이 낳은 많은 폭력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으며, 자본과 기술 이데올로기에 잠식당한 ‘대학의 파괴’를 예로 들 수 있다. 미셸 앙리에 따르면 모든 폭력의 기원에는 문화의 원천이자 야만의 원천으로서 삶의 본래적 에너지가 있다. 야만은 그 에너지의 제거가 아니다. 에너지의 억압이고 억압된 에너지의 방출로 이해된다. 미셸 앙리의 분석과 진단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근대 과학을 통한 삶의 배제가 종국에는 삶의 자기 부정이란 점이다. 결국 환경 파괴, 인간성의 타락, 개인주의, 범죄, 공동체의 몰락, 노동의 소외 등 모든 재앙의 근원에는 다른 무엇도 아닌 삶의 자기 부정, 삶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있다. 미셸 앙리는 이를 새로운 형태의 ‘니힐리즘’이자 ‘삶의 병’이라고 부른다. 미셸 앙리의 『야만』, 한마디로 ‘삶을 위한 선언’이다. 『야만』은 사람과 문화의 관계, 과학, 기술 나아가 공동체, 사회, 노동의 본성에 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제시한다. 1장 「문화와 야만」에서는 삶의 지식과 과학의 지식이 대립을 넘어 객관성과 보편성을 표방한 과학의 지식이 사실은 은밀하게 삶의 본래적, 주관적 지식에 기반을 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과학의 본성, 그 내적인 조건을 밝힌다. 자신의 내적인 조건에 무지한 과학은 그때부터 야만의 얼굴을 띠게 된다. 2장 「예술의 기준에서 판단한 과학」에서는 과학적 지식이 아닌 과학적 지식을 유일한 지식으로 여기는 이데올로기가 문제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이를 삶의, 살아있는 개인의 표현인 예술을 사례로 삼아 뚜렷하게 보여준다. 3장 「과학의 독주: 기술」에서는 자신에 내맡겨진 이론적 지식의 자기 발전으로 이해된 기술이 문제가 된다. 기술의 본래적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과학의 본성에 이어 기술의 본성을 밝힌다. 4장 「삶의 병」에서는 과학을 통한 삶의 배제가 결국 삶의 자기 부정이며, 이는 근대 문화를 과학적 문화로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임을 밝힌다. 삶을 그 자체에 이어주던 것의 단절은 재앙과 개인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5장 「야만의 이데올로기」에서는 초월론적 개인, 개인의 주관성, 개인의 실재적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인간 과학이 주요하게 문제가 된다. 하지만 삶은 자기 부정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남는다. 6장 「야만의 실행」에서는 문화의 원천에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만의 원천에 삶의 본래적 에너지가 있음을 밝힌다. 7장 「대학의 파괴」에서는 문화 전달의 목적을 부여 받은 대학이 자본과 기술의 이데올로기에 잠식되어가는 모습을 밝힌다. 마지막으로 「언더그라운드」에서는 대학과 사회에서 거부당한 문화가 언더그라운드로 들어가 그곳에서 본성과 사명이 바꾸게 되는 것을 밝힌다. 현대 프랑스 철학자, 미셸 앙리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후설의 현상학보다 더 근본적인 현상학이 삶의 현상학이며, 현상학은 현상의 ‘어떻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미셸 앙리는 저서를 통해 일관된 주장을 펼친다. 바로 ‘현상학적 이원론’에 관한 요구다. 현상학적 이원론은 두 개의 현상성에 관한 인정이다. 전통적 현상학 그리고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지금에 이르는 주류의 철학은 ‘현상학적 일원론’에 해당한다. 고전 철학은 현상, 즉 ‘나타나기’를 설명하는 보편적 방식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다른 방식의 존재를 철저히 배제한다. 물론 이런 배제는 체계적으로 진행이 되었기보다는 결과적으로, 어떤 의미에선 무의식적으로 이뤄졌다. 미셀 앙리는 ‘두 개의 나타나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삶의 나타나기’며 그 본질은 지향성이 아닌, 지향성의 ‘탈자태’가 아닌, ‘자기 촉발’이다. 자기 촉발을 본질로 하는 삶은 근본에서 주관적 삶이며, 내 삶이며, 나 자신이다. 그곳에서 중요한 건 고통과 쾌락, 불안과 욕망, 사랑과 절망, 슬픔 같은 것이다. 고통은 언제나 내 고통이며, 쾌락은 언제나 내 쾌락이다. 나아가 나 자신은 내 안의 고통과, 내 안의 쾌락과 일치한다. 내 안의 고통과 쾌락은 내 삶이며, 나 자신이다. 그런 것과 내 삶은 분리할 수 없으며 그럴 때 가능한 삶이란 있지 않다. 삶은 어떤 방식에서도 결코 익명의 삶이 아닌 주관적 삶, 내 삶이다. 모든 삶에서 삶은 한 개인의 삶, 그 개인의 주관적 삶이다. 익명으로서 가능한 삶은 없다. 자기 촉발, 주관성에 이어 삶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본질적 특성은 내재성이다. 자기 자신을 일으키는 속에서 삶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을 주며,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깨닫는다. 삶의 내재성은 자기 자신에서 분리되는 걸 금지한다. 삶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은 자기에서부터 자기에게 주어지고 채워진다. 바깥, 타자, 간극 같은 것이 끼어들 틈이 조금도 없다. 삶의 내재성은 그 모든 지향성을, 외재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절대적 내재성이다. 절대적 내재성은 삶의 주관성을, 우리 자신의 주관성을 마찬가지로 절대적 주관성으로 만든다. 주관성은 살아있는 주관성이며, 내재적이고 절대적인 주관성이다. 미셸 앙리는 주관성을 자기 자신을 깨닫는 데 그 바탕을 두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 바탕, 현상학적 바탕 없이는 어떤 주관성도, 어떤 주체도, 어떤 자아도 가능하지 않다. 책상이 책상인 것은 곧 그것이 살아있지도, 느끼지도, 따라서 주관도 자아도 아닌 것은 그것이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느끼고 깨닫는 행위를 수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