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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05
제1부 화장化粧 개봉선 13 고수高手와 고수固守 15 냉천지구 담쟁이 17 가족사진 19 서리태 21 크레바스 23 물소중이 24 세일즈 26 청첩장 28 달빛 소묘 29 화장化粧 30 미역 32 상록수역을 지나며 34 헌신 세 켤레 36 방짜 대야 38 혼서지婚書紙 40 제2부 꿈 호텔 차밭 43 남사 예담촌 느티나무 44 기침 나무 46 스피노자 48 맹아묘萌芽苗를 수령하다 50 꿈 호텔 52 목련木蓮 54 지지대遲遲臺고개 야광 구름다리 56 선유도 공원 58 등기로 받은 봄 60 해운대 61 부레 62 투명 물고기처럼 64 앨버트로스albatross 66 수작手作 68 설계 70 제3부 사소한 자리 휴일休日 혹은 후일 75 봉산동 410번지 76 이모지emoji 78 첫사랑 80 서신書信 81 은박지 82 비엔나 83 옛날 국수 가게 85 사소한 자리 87 사고事故 89 재활용인 91 동굴 93 백장미, 숙이 95 4차 월 96 기표記標 98 프롭prop과 춤을 100 제4부 푯말signpost 특수 분장 105 전염 106 장전裝塡 108 사월의 약속 109 돋아났습니다 문moon 110 교정敎政 111 거미 113 눈물의 용도 115 토모테라피 117 동주를 보고 119 작별 121 말단 기호품 122 수중의 꿈 123 잠 요양원 501호 124 푯말signpost 125 유언幽言 127 해설_ 맑고 정갈한 세계, 혹은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찾아서/황치복 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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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高手가 된 사람이 있다 하자
온 생을 바쳐서 마음에 몸까지 수련했겠다 걱정이나 갈등은 안 그런 척 덮고 지치고 캄캄할 때도 그 일념뿐이었겠다 날 낳아 준 부모처럼 희생했겠다 그렇게 자신을 고수固守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하물며 이름 모를 들꽃 하나가 말없이 온통 햇볕을 받으며 제 자리를 고수固守하고 있다 맨몸으로 다섯 발가락을 땅에 묻고 돌 틈에 종아리를 잡힌 채 기나긴 장마에도 아무나 경지에 오를 수 없는 발레리나처럼 사뿐히 서 있다 어머니는 호미질의 고수高手였다 한여름 햇볕 아래 고랑을 쌓고 돌을 고르며 채소들을 키우셨다 무청이 솜털을 세우고 몸을 꼬며 부끄럼을 탔다 평생 바깥일을 고수固守하신 어머니 개울물에 날 선 호미를 씻으며 밭 매지 마라! 땡볕 아래 절대 앉지 마라! 돈 주고 사다 먹어라! 스테인 냄비에 고수 나물 향긋한 냄새 제사상 위에 먼저 올라가 앉는다 어머니, 슬쩍 내려오세요 이젠 제가 요리의 고수高手입니다 ---「고수高手와 고수固守」중에서 사늘한 윗목에 까만 콩 여섯 자루 삼우 지낸 딸들이 하나씩 가져와 저녁 밥상에 쪼글쪼글한 콩자반 땀에 전 엄마 젖을 빨아먹는다 콩밭 머리에서 차례대로 젖 먹이고 막둥이 나에게 먹일 게 없으면 콩 삶은 검푸른 물을 먹이시고 당신은 찬밥에 콩잎 쌈으로 긴 해를 버티셨다 사람은 겉보다 속이 맑아야제 땡볕에도 꽃이 피어 고된 줄 모르고, 고것들 꼬투리가 다투어 달리니 딸년들 속 여물 때 같았제 밭고랑 끝에 키 큰 옥수수가 다 안다 자식들 줘봐야 좋은 소리 못 듣는데 뭘 그리 애쓰세요 읍내 병원에서 허리도 못 펴는 당신께 한 말 이제 어쩌지요 첫 서리 지나 약봉지처럼 구겨진 채 해 짧은 타작마당에 서리태 같이 추수된 어머니 밭머리에 하얀 꽃무덤 빈 젖을 내게 물리신다 ---「서리태」중에서 댓돌 위에 아궁이처럼 입을 벌린 운동화, 절기대로 살아가는 농부화, 마을 사정에 밝은 흰 고무신, 한가로운 장마철 신발 세 켤레 입담이 한창이다 먼저 고무신이, 낼 모래 봉산댁 큰딸이 저 건넛마을 용개댁 둘째 아들과 혼인한데요 글쎄, 새색시 치장을 나보고 해 달래요 명주실로 솜털 뽑아서 뽀얗게 단장해줄 거예요 농부 화가 헛기침을 한다 원래 살결이 하얀 집사람하고 사는 나는 복이 많지 육성회비 없어 제대로 육성 받지 못한 나한테 시집왔으니 말이지 청색 운동화가 끈을 풀며 입을 연다 엿장수가 성제네 집에서 리어카에 고물을 싣는데 개가 물어뜯어서 한 짝 뿐인 내 신 엿이나 바꾸려고 갔어요 그런데, 고물 더미에 버리기 아까운 신이 있는 거예요 몰래 집어 신고 도망왔지요 담담하게 풀어놓는 모노드라마 배우 김00은 어린 날 시골집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배우는 굵은 목소리로, 그게 기특해서 새 콤비 사준다 또 몸을 돌려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잃어버릴라 방에 들여놔라 처마 밑에 신발 두 켤레 꾸벅꾸벅 졸고 있다 한밤중 TV 앞에서 발을 가만히 만져본다 발바닥에 티눈이 깊이 자랐다 오늘 밤 건넛마을까지 깨끔발로 다녀와서인가 ---「헌신 세 켤레」중에서 나는 수직이 태생이고 근엄이 본성이다 내 몸 곳곳에 들어와 사는 남색 거위벌레들의 더듬이와 곤충들의 꼬물거림, 채록하고 싶은 파랑새의 울음소리와 질서 정연한 것들의 소소한 날갯짓과 잔 발바닥의 살가운 떨림에 밤이나 낮이나 문을 활짝 열어 둔다 정오의 햇살이 정수리에 내려쬘 땐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실컷 떨어뜨리는 수다를 빨아들인다 내 실루엣이 터줏대감 박노인 기와집과 닮았단다 지루하지 않은 곡선이 친근하단다 이들의 기대만큼 사방으로 다리와 팔을 쭉 뻗어 오백 년 깊이가 빨아올린 사계절을 마을 쪽으로 날려 보낸다 백 평 정자나무라 해도 근엄은 가장 쓸모없어지는 것이다 하늘의 슬하 느티의 연대 수백 평 그늘 그늘의 직속 읍내 가는 버스 운행 횟수가 줄어들고 찾는 이가 뜸해도 매년 싱싱하고 짙푸러 아직은 괜찮다 이것은 지루한 반복이거나 습관적인 본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나무 안에 싸리비 무늬 같이 촘촘하게 푸른 네트워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남사 예담촌 느티나무」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