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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05
제1부 뭉클한 서정 12 꽃 기린 13 결론을 답습하다 14 꽃잎 화석 15 헤르페스 16 찔레 17 봄의 리듬 18 나비의 꿈 19 능소화 종소리 20 토란 21 주검의 묘약 22 천 개의 문 23 비문 24 흙냄새로 돌아가는 25 쌍둥이 밤 26 적의敵意 27 나무 나이테 28 화두 30 15분 31 그쪽으로 휜다 32 그대 안의 벼랑 33 붉은 울음 34 꽃의 시간 35 제2부 길, 읽다 38 마수걸이 39 날개는 경연이다 40 가상 시뮬레이션 41 가까워서 먼 42 두부에서 그를 만나다 43 고고학 연구소 44 인연, 지우다 45 바람의 윤회 46 보길도에서 묻다 47 목숨을 배팅하다 48 시나이산 49 호랑가시숲 50 물같이 말하기 51 늪을 키우다 52 청춘의 강 53 구름 유리창 54 천불사 석등 55 곰소항 풍경처럼 56 시간의 문 57 제3부 설익다 60 달콤한 부패 61 귀속의 귀 62 보석 63 모질다는 것 64 소통 65 귀신고래 66 말의 의자 68 바다의 눈 69 베어낼수록 어두워지다 70 귀명창 71 혹 72 꽃자리 부처자리 73 길의 행적 74 노숙하다는 말 75 제비집 기지국 76 뱀을 밟다 78 어목혼주魚目混珠* 79 마음의 집 80 주소의 이력 81 제4부 햄릿 증후군 84 어둠을 날아다니는 날개 85 돈데이 86 침묵이 고수다 88 악어 집게 89 옆 90 늑간 신경통 91 오로烏鷺 92 반구대 암각화 93 섬을 주제로 한 4개의 변주 94 뿌리를 배꼽에 둔 강물 96 부음의 배경 97 화해 98 붉은 흰빛 99 육지 고래 100 소금꽃 101 채석강에서 102 시간을 듣는 귀 103 느린 그린키위 104 개기월식 105 해설_경건함과 지극함의 시/ 이지엽 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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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아오른 모양이 기린을 닮아 꽃 기린
저 너머의 나라를 그리워하는지 삼백예순날 가시로 몸을 감싸고 하루도 잊지 않고 꽃을 피운다 사랑과 열정 이별과 아픔 사이 유혹은 항상 꽃처럼 시든다지만 온전한 생태적 결핍인가 살아서 이루지 못한 사랑이 心을 돋우고 꽃으로 걸어 들어간 것일까 묘한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시작과 경계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거기 평온한 일상을 가꾸는 나는 까닭 없이 미안해질 때가 있다 빈 의자에 앉아 종일 밖을 본다 시간 앞에 모든 것은 낡고 지치지만 단단한 가시 위에 얹힌 생의 끊임없는 발화 저 꽃을 보면 삶의 역설 같은 그 어느 편에서 바라보게 된다 --- 「꽃 기린」 중에서 수억 년 피워 올리지 못한 어둠 봉인되었다 퇴적의 시간만큼 단단해진 뼈 한 층 한 층 우주의 심장을 쪼아야 만날 수 있다 1억 4천 5백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목록에 나열된 이름들이 바위 속으로 걸어 들어가 긴 기다림의 시간을 껴안고 잠들었다 태양의 중심을 돌아 제 몸에 이름표 새긴 청송군 진보면 석수장이 손끝에서 구과상유문암 황해바라기로 태어난다 빛을 뿜어 올리는 매끄러운 광채 누군가의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한 뜨거움 억겁의 시간에도 그 모습 시들지 않는 주홍빛 찬란한 해로 뜬다 --- 「꽃잎 화석」 중에서 가로수길 걷다 단풍잎 주워본다 어느 것 하나 성한 게 없다 길이란 완벽한 평지는 없다 세상은 모두 길이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도 길이고 가로막힌 길도 길이다 길은 끝나지 않는다 잘못 든 길 되돌아가야 했던 길 협곡 비탈길 이미 지워져 버린 길 수천 갈래의 막막한 길들이 내가 본 세상의 길이다 문득 길이 사라질 때 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눈앞이 캄캄해질 때 있다 그럴 때마다 길은 내게 일러 주었다 두 발로 걷는 길이 삶이라고 우리가 건너온 모든 길들은 아흔아홉 구비 몸으로 걸어온 등뼈 굽은 길이다 --- 「길, 읽다」 중에서 연근을 삶는다 땅속 깊이 박혀 흙을 읽고 있었을 뿌리 뜨거운 솥바닥 장작불로 달궈도 얼음을 베어 물듯 서걱거린다 지금 내 詩는 맛을 찾아가는 중이다 물 붓고 한참 더 불 지핀다 도대체 익을 생각이 없다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게 잘 익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맛이란 익어 완성에 다가갈 그때 생긴다 행간마다 구멍 숭숭 뚫린 바람길 오래 삶아도 익지 않는 내 안의 말이 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과일의 향기처럼 잘 익은 詩 하나 건질 수 있을까 닫힌 눈으로만 하늘을 보았기에 뜨거운 불로도 익히지 못하는 내 수천 평 연밭의 뿌리처럼 설겅거린다 --- 「설익다」 중에서 펼쳐놓은 시집 위로 개미 한 마리 기어오른다 이놈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손바닥에 올려놓고 저울질한다 아직 세상 험한 줄 모르는 개미 죽음을 감히 상상하지 못한 채 손가락 사이로 잽싸게 빠져나와 열린 창문 쪽으로 달아난다 이길 저길 부단히 걸었을 길이지만 산만큼 높은 11층 아파트 벽을 가볍게 타고 넘어 제 갈 길 가겠다고 열심히 여린 발을 놀린다 죽일까 살려줄까 운명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동안 생각을 바꾼다, 살기 위해 어떤 맹세도 해 본 적 없는 것들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펼쳐진 세상 밖으로 개미 풀어 놓는다 --- 「햄릿 증후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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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남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풍경은 전혀 낯설지 않다. 오히려 익숙하게 오래된 풍경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풍경이 구석구석 정갈하여 낡아 보이지 않는다. 고즈넉하고 친숙하여 마음을 편하게 한다. 어느덧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경건해진다. 경건해진다는 것은 새로움 이상의 무엇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정경남 시인의 시가 갖고 있는 경견함과 지극함은 한국 서정시가 마지막까지 추구해야 할 좌표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시에 시를 읽으면서 무한한 감동을 얻고 새로움을 가지는 것이 큰 소득이었다. 무한한 감동은 진술의 새로움에서 연유된 것이고 새로움은 확장은유의 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감동이 있고 새로움이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랴. 정경남의 시는 이러한 요소를 잘 갖추고 있는 한국 서정시의 모델이라 할 만하다. - 이지엽 (시인, 경기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