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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슬픔의 기로 꽃다발 비밀 담 귀 번지점프 꽃길 꽃길 2 거울 이 거리에서 벚꽃 유혹 칠십 즈음 은행의 노숙 시인의 독백 가래떡 2부 로딩 중 피안 찰나 퍼즐 아름다운 구속 밧줄 건널목 없는 길 누구인가 곤지암 거짓말 이중생활 안경 죽은 시인의 흉상 라일락의 월권 보수와 진보 메아리 3부 둘레길 귀전우 열반 재건축 개망초 너 바램 죄와벌 임의 그루터기 무당거미 사랑이라는 이름 벼랑 끝 삼일간의 전쟁 대구 건달녀 옹이 비린내가 난다 내도 계단 저울 불신 그리고 사랑 4부 칡넝쿨 변명 그리움 3 편지 일백이십일의 설렘 분리수거 샘물 사철나무 붉은 병꽃나무 새벽 미니어처 하우스 보련산 백비 몬스테라 그해 겨울 바람의 명찰 섬에 갇힌 아이 때죽나무 꽃밭에 가면 시집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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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써 세운 자존의 깃발과 존재의 위의
-김정분 시에 대한 소박한 감상문 / 복효근 이 글은 본격적인 해설이라기보다는 노시인의 올곧은 시심과 맑고 견고한 시인의 시에 대한 경하의 마음이 담긴 소박한 감상문이다. 시인의 시가 비교적 어렵지 않은 시어로 표현되어 있으며 시인의 시 세계가 꽁꽁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어서 독자와의 소통 또한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이 밝히고 있듯이 이 시집은 “평생 십팔 세 순이의 마음으로” “여든을 잘 견뎌온” 삶의 기록이다. 이만한 연륜에 이리도 탄탄한 그리고 십팔 세 순이와 같은 순정한 시심으로 시를 쓸 수 있는지 경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백 세 시대에 여든 나이는 그리 많지 않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원숙함이 최고조에 다다른 시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칫 세상 모든 일에 달관하고 초연한 듯 도사연하는 모습이거나 혹은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과 부정적 감정의 토로가 가득한 시간일 수도 있다.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과거의 무용담으로 자신의 삶을 미화하고 합리화한다 해도 크게 흠이 되지 않은 연륜이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보이는 시인의 모습은 앞에 말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시인의 감정과 사유는 “십팔 세 순이”의 그것처럼 싱그럽고 역동적이며 아직도 완성을 위하여 진행형이다. 피안으로 가는 길목 하루를 깨알 세 듯 아끼며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건성건성 다리 꼬고 앉아 책장 넘기듯 알파벳 숫자는 넘어가고 봇물 터지지 않으려 강둑을 쌓고 철벽을 만들어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자존의 깃발 꽂아놓고 이상은 하늘을 덮네 쌩하니 칼바람 소리 같은 비난들이 담벼락에 달라붙어도 낡아 버린 청각은 못 들은 체 허름한 덤불 속 홀로 뿌리 내린 인동초처럼 깊숙이 파고들어 가 목숨처럼 부둥켜안은 백발노인의 깃발 「담」 시인이 서 있는 위치는 “피안으로 가는 길목”이다. 누구나가 차안에서 피안으로 간다. 그 길 위에 있다. 그러나 여기서 쓰인 ‘피안’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삶의 끝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피안이 아니다. 시인은 붓다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구도자의 자세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피안은 이생이 끝나면 다다르게 되는 지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불교적 의미에서 깨달음을 얻고 해탈을 이룬 니르바나의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 지점을 향한 시인의 자세는 단호하다. 여기서 ‘담’은 강둑이며 철벽이다. “봇물 터지지 않으려” 쌓은 ‘강둑’은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가지 않고 마음을 붙잡아두겠다는 표현이다. 철벽은 은산철벽을 이른다. 은(銀)으로 만든 산, 쇠(鐵)로 만든 벽에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앞뒤가 다 끊어져 버린 절박한 상황을 비유한다. 너무도 막막해서 아무 사량분별(思量分別)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구도자에게 이 은산철벽은 내 몸과 목숨을 다해서 뚫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는 관문(關門)이다. 그만큼 깨달음을 향해 수도에 목숨을 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 은산철벽에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자존의 깃발을 꽂는다.” 구도의 의지와 하늘을 덮듯 높고 넓은 이상에 결기가 서려 있다. 구도의 의지가 견고할수록 마구니들의 훼방은 악착같을 것이다. “쌩하니 칼바람 소리 같은 비난들이” 담벼락에 달라붙는다. 그러나 시인은 마구니의 훼방 정도는 낡아 버린 청각 탓으로 돌리고 못 들은 체하겠다고 한다. 그러려니 하면서 이겨내겠다는 의지다. 이 백발노인이 꽂은 자존의 깃발은 목숨과 같은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덤불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뿌리를 내리고 아무리 혹한일지라도 견뎌내는 인동초처럼 극복하겠다는 그 결기가 서릿발 같다. 스스로를 백발노인이라 표현했지만 청춘에게도 보기 힘든 구도자의 결기와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위에 인용한 시에서도 보듯이 시인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소로 ‘자존’을 꼽는다. “햇살 흩어지는 날에도/ 비 오는 날은 더욱 싱그러운 관능미를 뽐내는” 장미꽃은 “때로는 속마음의 지조를 지키며/ 따가운 가시를 호신술로 간직하고 사랑 받기를 원하면서도/ 뼛속으로 흐르는 자존을 감추고 있다.” (「유혹」) 장미꽃은 “생글생글 웃으며 울타리에 걸터앉아/ 속도 없는 것처럼” 피어있지만 따가운 가시로 스스로를 지키며 뼛속에는 자존을 감추고 있다. 비록 장미꽃을 비유적으로 노래하고 있지만 인간에게 꼭 필요한 덕목을 말하고 있다. 장마를 장미답게 하는 것은 그 빛깔과 향기와 꽃의 모양에만 있는 게 아니라 핏속에 흐르는 자존에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말과 행동은 천할 게 뻔하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이는 타인도 귀하게 여긴다. 부처의 탄생게를 보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있다. 자신이 가장 귀하다는 말이다. 누구나가 불성이 있다고 보면 그 하나하나 누구나가 다 가장 귀하는 말이 성립된다. 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에 이어지는 구절이 “삼세개고아당안지(三世皆苦我當安之)”다.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가 다 고통 속이니 내가 마땅히 고통받는 이들을 편안하게 하리라.”하는 것이다. 가장 존귀한 존재가 고통받고 있으니 어찌 가만있겠는가? 다가가 불심으로 구제한다. 그것이 자비심이다. 그러니까 ‘자존’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도는 성립되지 않는다. 시인이 붓다에 의지하고 또 시를 쓰는 것도 이 자존을 지키기 위한 구도의 작업인지도 모른다. 강물 위에 앉아본다 허접스런 보따리는 물속에 던져버리고 응어리진 멍 자국 뭉쳐있는 근육 덩어리 장단지에 박혀있는 동그란 살점도 자아 밑자락 이슬처럼 맺혀있는 생각, 생각들 다 꺼내 물속에 던져 버리자 행선하며 주절거리던 대다라니경 머릿속에 지각없이 이리저리 마음대로 굴리고 있는 아상을 다 빠뜨려 버리자 두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양손 놓고 강물 위에 앉아서 가보자 예전에 만들어 놓았던 하얀 종이배 위에 참새처럼 앉아보자 저 언덕 너머 넘어가면 다다른 곳이 무릉도원이라면 나비잠 한숨 자리라 아 함부로 입으로 내뱉어 버려지지도 않고 쌓여있는 업은 어이할거나 무수히 버린 음식 아귀 되면 어찌 할거나 오늘도 강물 위에 앉아 더 버릴 것이 없는가 생각 생각이 물속에 빠져 수없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다 「피안」 시인은 차안과 피안 사이에 가로 놓인 강물 위에 있다. 저 너머 차안으로 가기 위해 수행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수행의 맨 처음은 무엇일까? 시인의 시에 의하면 ‘버림’과 ‘비움’이다. 성경에서도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화하는 것과 같다 했다. 허접스러운 쓰레기 보따리, 물질적인 것은 물론 과거의 상처와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 쓸 데 없는 분별심, 정신적인 짐도 다 강물 위에 던져버리고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행선하며 주절거리던 대다라니경/ 머릿속에 지각없이/이리저리 마음대로 굴리고 있는 아상을” 다 버리라고 한다. 참다운 자유, 니르바나에 이르기 위해서 일체의 물질 비물질을 뛰어넘어야 한다. 아상, 인상 수자상이라는 상을 없애야 하니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하는 말도 그런 맥락이다. 얽매이고 집착하게 만든다면 불경마저도 강물에 던져버려야 한다. 불도를 닦는 행선의 과정이다. 그런가 하면 참회가 또한 함께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행위(몸)로 지은 죄만 죄로 여기지 않는다. 생각으로 지은 죄도 같은 무게를 지닌다. 입으로 내뱉는 말도 같은 무게를 지닌다. 그래서 저 피안으로 가는 강물 위에서 행선하는 자는 끊임없이 이 삼업을 씻고자 노력한다. 인용한 작품도 이러한 행선 역시 온전하고 청정한 자아, 즉 자존에 이르기 위한 것임을 노래하고 있다.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른다 그림의 오솔길은 없고 계단뿐이다 한걸음 계속 오르니 무릎이 아프다 내려 갈 일 생각하니 미리 걱정이다 배낭 속을 다 비우자 사랑 미움 아픔 욕망도 희망까지도 「계단」 시인의 삶의 여정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산에 오르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가파른 산일수록 편안한 오솔길이 없다. 오르기 위해 팍팍한 계단이 놓여있다. 오솔길과는 달리 무릎이 아프다. 내려오는 길은 체중이 무릎에 쏠리니 더욱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등에 진 짐의 무게를 줄일 수밖에. 여기서 말하는 짐이란 물질적인 그 어떤 것만이 아니다. 물질을 포함해서 마음의 짐들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도 많은 짐을 마음에 쌓아놓고 살고 있다. 세상의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사랑도 때론 짐이다. 저 피안으로 가는 데 집착이 가장 큰 짐이라고 한다. ‘고 집 멸 도’ 사성체 가운데 집착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 그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칡넝쿨처럼 “사랑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소유를 넘어 장악을 일삼는 너에게 어찌 사랑이라 이름하리” (「칡넝쿨」)에서 보듯이 사랑은 장악하고 소유하려 하는 것이 속성이다. 희망도 마찬가지다.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마음엔 실체가 없는데 우리는 가버린 과거에 집착하고 금방 사라질 현재에 집착하고 있지도 않은 미래에 집착하고 있다. 희망은 미래에 대한 집착일 수 있다. 공(空), 즉 진정한 자유, 피안, 니르바나의 그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는 다 비워야 한다. 작은 시편이라고 하지만 깊은 의미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대를 기다립니다 문 앞에 턱 괴이고 앉아 와도 그만 가도 그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고 막말 쏟아 부은 지난 봄 가시가 박혀 못 오시는 거 아닌가 그렇게 잠시 왔다 빨리 가버리냐고 온갖 투정 눈 흘기며 토라진 게 맘에 걸려 맘 조리며 여름 가을 긴 겨울을 후회의 시간 초췌한 얼굴 앞에 활짝 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찾아온 그대 이제 함부로 그대에게 상처 주는 말 하지 않을게요 어차피 그대는 늘 내 곁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찾아 올 거란 믿음이 생겼어요 그대를 사랑합니다 인고 인내 모두를 품어가는 이제 다시 애틋함을 흩날리며 내 곁을 떠나가도 웃으며 손 흔들래요 「벚꽃」 시인은 벚꽃에게 말하고 있다. 벚꽃에게 지은 구업(口業)과 벚꽃에게 가졌던 집착을 참회하고 있다. 지난봄 시인은 벚나무에게 “와도 그만 가도 그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고 막말 쏟아 부”었다. 집착에서 비롯된 구업이다. “그렇게 잠시 왔다 빨리 가버리냐고/ 온갖 투정 눈 흘기며 토라”졌다. 시인은 벚꽃을 사랑해서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벚꽃은 다시 “초췌한 얼굴 앞에 활짝 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찾아왔다.” 자연의 순환 질서를 따라 벚꽃은 왔다 가는 것일 뿐인데 시인은 분별심과 아만심으로 미워하고 또 토라지고 실망하기도 한다. 여기서 ‘벚꽃’은 사랑하는 대상 그 모든 것을 은유하는 말이다. 벚꽃뿐이랴, 사람도 식물도 동물도 세상 만물은 그저 있을 뿐, 왔다 가는 것일 뿐이다.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나 스스로의 무명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이란 집착을 떠나 있다. 자유와 다르지 않으며 공(空)과 다르지 않다. 거기에 이르면 “내 곁은 떠나가도//웃으며 손 흔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인고’, ‘인내’의 자세가 필요하다. 욕됨을 인내하는 지혜가 인욕바라밀이다. 때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꼭꼭 찌르다가 캑캑거리다가/ 쓸개즙 마신 것처럼/ 입안에 멈춰진 이름 모를 포진 같은 것/ 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는 것들이 있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일이 “그냥 숨 참는” 것이다. 인욕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리라. “머금고 있는 번민/ 숙성시켜 웃음으로 곰삭아/ 거름이라도 되어라”에서 보듯이 시인은 이러한 인내 즉, 인욕바라밀을 번민을 해소하고 ‘웃음’ 즉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거름’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겪는 아픔(그늘)도, “휘청거리는 슬픔”도 감내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슬픔의 기로」) 지금까지는 주로 자존의 깃발 세우고 지키기 위한 즉, 절대자유의 피안에 이르기 위한 시인의 행선에 초점을 맞추고 시인의 시가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견고하고 단호한 불심만이 시인의 시를 이루고 있지는 않다. 무엇보다 시인이 강조한 대로 ‘십팔 세 순이의 순정’을 우리는 시에서 만난다. 다정다감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시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사립문 말고 쪽문으로 들어오세요 아무 때나 그대여 눈으로 밀지 말고 마음으로 밀고 들어오세요 사립문 밖에서 보면 허술하고 낡은 싸리로 엮었지만, 안에는 십팔 세 소녀가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대여 눈도 맞추지 말고 입술도 보지 말아요 고개 숙인 목 주위도 보지 마세요 아카시아 잎을 튕기며 네잎클로버를 찾아다니는 그림이 안에 있어요 순정 만화 같은 동영상도 있답니다 그대여 쪽문으로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들어오세요 고란 수 몇 바가지 마시고 삼년고개를 두세 번 굴러 보송보송 복숭아같이 붉은 얼굴이 첫날밤 새색시처럼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대여 십팔 세 순이 올림 「편지」 그 소녀 십팔 세 순이, 팔십의 시인의 마음에, 시에 다가오기 위해서는 편견이나 선입견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쪽문으로 들어오듯이 아무 때나 조용히 다가오라 이른다. “사립문 밖에서 보면 허술하고 낡은 싸리로 엮었지만” 그 안에는 순정한 십팔 세 소녀가 산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관성을 가진 사람이면 들어올 수 없다. 사립문 안쪽엔 “아카시아 잎을 튕기며 네잎클로버를 찾아다니는” 그런 소녀의 모습이 살고 있다. “순정 만화 같은” 삶을 꾸려가고 있는 소녀다. 또한 십팔 세 순이는 “고란 수 몇 바가지 마시고 삼년고개를 두세 번 굴러 보송보송 복숭아같이 붉은 얼굴이 첫날밤 새색시처럼” 순결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다. 맑고 투명한 시심으로 삶을 가꾸고 있는 시인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리라. 예비 며느리가 예비 시어머니를 방문했을 때 “무논에 물꼬 트인 듯/ 체증은 사라지고 가슴까지 설레었지/ 어여쁘고 어여쁜/ 다시 한번 더 예쁜 짓/ 사랑받기 충분한 꽃다발”로 안는다. “은은한 향기/ 방 안 가득/ 햇살 가득/ 웃음 가득하”게 해준 예비 며느리를 맞이하는 그 마음이 한없이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러면서 예비 시어머니는 혹 비바람이 불어와도” “어미는 바람막이 되어”줄 것을 약속하며”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이렇듯 자애로운 마음은 가족이 될 한 개인에 대한 애정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천 개의 손을 펴고 향기를 흩날리고 자동차들의 흐름을 지켜보며 정보를 읽는다 한참 늙어버린 라일락은 아래를 보느라 허리를 기울여 넘어질 듯 공원에서 군중심리를 읽어보는 보랏빛 자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우아함에 품위를 지키며 서 있다 공원을 걷는 사람들 뒷전에 두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안전이 염려스러워 담장 밖으로 나온 절반의 몸이 균형을 잃은 듯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몸뚱이는 못살게 휘갈기는 바람의 횡포에도 끄떡없다 귀 막고 눈 감고 입 다물고 싶은 싸움판 난장 하늘이 땅이 현기증을 일으킨다 코끝에 향기를 붙여 주고 싶다 그늘이 되어 주고 싶다 잠시 쉬어가게 해주고 싶다 천 개의 팔이 아니라도 좋다 팔 크게 벌리고 끌어안아 주고 싶다 높은 곳 말고 발아래 그 누구라도 「라일락의 월권」 “자동차의 흐름을 지켜보며”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안전을 염려”하고, 군중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라일락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우아함에 품위를 지키며 서 있다.” 또한, “담장 밖으로 나온 절반의 몸이 균형을 잃은 듯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몸뚱이는 못살게 휘갈기는 바람의 횡포에도 끄떡없다” 여기서 ‘늙어버린 라일락’은 시인 자신을 은유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귀 막고 눈 감고 입 다물고 싶은 싸움판 난장 하늘이 땅이 현기증을 일으킨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예비 시어머니의 마음으로, 보살행을 행하는 불자의 마음으로 시인은 이 추악한 세상을 따스하게 향기롭게 품는다. “코끝에 향기를 붙여 주고” “그늘이 되어 주고”, “잠시 쉬어가게 해주고 싶다.” 늙은 라일락의 마음이다. 보살의 마음이다. 어머니의 마음이다. 시인은 말한다. “천 개의 팔이 아니라도 좋다/ 팔 크게 벌리고/ 끌어안아 주고 싶다/ 높은 곳 말고 발아래/ 그 누구라도.” 시인은 자신이 천수관음은 아닐지라도 하화중생하는 보살의 마음으로 낮은 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중생을 품어주는 한 그루 꽃 핀 늙은 라일락이 되고 싶은 것이다. 앞에서 시인의 시를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살펴보았다. 하나는 자존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 그리고 십팔 세 소녀와 같이 순정하고 따뜻한 시심이 그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팔십 노시인과 십팔 세 소녀는 그렇게 한 몸에 있다. 그렇게 하나 되어 시 작품에 스며 있다. 그 견고한 자존의 숭고함과 그 맑고 순수한 순정이 하나의 양면을 이루고 있음을 보았다. 시인의 시심은 여전히 역동적이며 진행형이어서 필자의 필력으로는 이 두 가지 범주에 포섭되지 못한 다양한 목소리를 다 헤아리지 못했다. 앞으로도 더 푸르고 웅숭깊은 시편들이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