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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유 I
미나세 린 I 히구치 유 II 미나세 린 II 히구치 유 III □□□□□의 여자친구에 관해서 히구치 유 IV 네가 없는 세계 작가의 말 |
一條 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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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간절히 원한다. 내 마음대로 되는 세상이었으면, 하고. 모든 걸 갈망하는 건 아니다. 그 세계에서 난 아무것도 잃지 않고, 아무도 마음 상하지 않으며, 누군가와 누군가의 사이가 틀어지는 일이 없을뿐더러 소중한 사람을 잊는 일도 없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세상이다. 누구나 소중한 걸 잃고 싶어 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과거로 떠나보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 p.11 이제 다시 돌아볼 일은 거의 없지만 아주 오래전 내게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생 때였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외톨이가 되었을 때 그 아이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 지금처럼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않고 지내던 나에게 다가와 말벗이 되어주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아이는 약간 그때의 그 ‘특이한 친구’와 비슷하다. “너는…….” --- p.16 “그러면 안 돼. 나도 멋진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지. 연애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잖아?” “아니, 그건……. 하지만 믿으라니.” 씁쓸하게 웃는데 “믿는 건 의외로 중요하거든”이라며 아리마가 계속 말을 이었다. “행동하지 않으면 인생은 바뀌지 않아. 그 첫걸음을 믿는 데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그 믿음이 현실을 바꾸고 가능성을 넓혀서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니까. 난 그렇게 믿어. 그러니까…….” 나는 길게 열변을 토하는 아리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년이여, 큰 뜻은 품지 않아도 좋으니, 믿으라.” --- p.44 “아리마, 넌 말이야. 훌쩍 나타났듯이 훌쩍 사라지지 마.” 아리마는 분명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치거나 딴청을 피울 거라고 생각했다. “사라지지 않아.” 하지만 내 생각과 달랐다. “네가 나한테 이제 얼굴도 보기 싫다고 사라져달라고 하기 전에는.” 아리마는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심각한 표정이었다. “너무 진지했나? 신기루도 아닌데 설마 쉽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겠어?” 아리마는 밝게 웃었지만 내가 원한다면 정말로 사라지고 말 것만 같았다. --- pp.66~67 이매지너리 프렌드imaginary friend라는 말이 있다. 본인에게만 보이는 특수한 ‘상상 속의 친구’를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다. 나와 친해지기 전에 말 상대가 없었던 히구치에게는 그런 친구가 보였다고 한다. 실제로 나는 히구치가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히구치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그 일이 계기였다. 다른 애들과 달리 재밌고 특이한 애구나 싶었다. --- pp.80~81 너무 평화로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햇살은 낮잠 자기 딱 좋을 만큼 따사로웠다. 때때로 멀리서 함성이 들려왔지만 귀가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고요하다. 옆에는 너무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마주 웃으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앞으로도 히구치와의 사이에 이런 시간이 흐르면 좋겠다. 변함없이, 영원히……. --- p.147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히구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확실히 말하자면 오히려 평범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는 특별한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뛰어난 것을 보고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건 단지 표식이나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 p.154 그 분노가 어느 순간……, 누군가 피부를 핥은 것처럼 오싹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아니 그보다 애당초 이 애는 대체 누구지? 아리마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내 앞에 나타난 여학생. 연신 웃는 얼굴로 친구가 되자고 하더니, 상냥한 데다 내가 모르는 일까지 알고 있다. 어째서 이 애를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 p.202 히구치는 말이지,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 누구나 그래. 나의 아버지도 그랬어. 사람들은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인생일지라도, 필사적으로 살아내고 있는 거라고. 그런데 어떻게 죽을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비웃을 수가 있지? 비웃지 말라고. 내가 보기엔 말이지……. “아니. 나나 너희들이 훨씬 더 소름 끼쳐.” --- pp.251~252 “나는……. 나는 너랑 살아가고 싶었어. 소소한 일들을 더 많이 함께하고 싶었어. 즐거운 일, 별것 아닌 일로 웃으면서 둘이 여러 장소에 가고 싶었어. 그리고……. 네가 어릴 때 손에 넣지 못한 것들을 둘이서 되찾고 싶었어. 너에게 전부 해주고 싶었어. 네게 모든 걸……, 되찾아주고 싶었어.” --- p.272 예전에 어떤 시에서 살아가는 건 상처받는 일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살아 있는 한 상처받지 않을 수는 없다. 사람은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나는 아마도 상처받는 데 저항하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구나 상처받고 싶지 않을뿐더러 고통에서는 눈을 돌리고 싶다. 그건 어쩌면 진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히 상처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 나는 거기서 도망쳤다. 살아간다는 건 슬픈 일이다. 상처와 상실을 피할 수 없으니까. --- p.287 그녀와 나는 함께 있어선 안 된다. 헤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 결심이 서질 않았다. 괴롭고 슬퍼도 함께 있는 게 좋았으니까. 나는 그녀와 마주하면서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잊히는 것이 있다. 그래도 잊어선 안 되는 것이 있다. 잊으면 안 되는 일이 수없이 많다. 이른 건지 늦은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야 겨우 결심이 섰다. “안녕. 너를 만나서 행복했어.” --- p.310 |
“너와 헤어지지 않는 이별은 없는 걸까?”
상처받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서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 어중간한 시기에 전학 온 그림같이 아름다운 소녀 아리마. 히구치는 자신에게만 말을 걸고 인사하는 그 애를 처음엔 경계한다. 하지만 아리마의 책상 위에 싸구려 조화 꽃병을 가져다 놓은 반 아이들의 못된 장난을 히구치가 저지하면서 둘은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고,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기분 나쁜 애’라는 반 아이들의 조롱에 충격받은 히구치가 아리마와 함께 학교를 땡땡이치면서 급격히 가까워진다. 이제는 아리마와 만날 생각에 학교에 가는 것이 즐거워진 히구치. 구기 대회가 끝난 어느 날 아리마가 ‘미나세 린이라는 아이와 사귀었냐’고 묻자 히구치는 ‘질긴 악연 같은 사이’라고 답하는데…. 언제부터였을까. 어릴 적 친구이기만 했던 히구치를 신경 쓰게 된 것은. 머릿속이 온통 그 애의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은. 하지만 히구치는 내 고백을 거절했다. ‘히구치가 내 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그런 사고방식은 이상하다’며 떠나버렸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마음이 사라지는 날이 올까. 구기 대회가 끝난 어느 날 체육관 밖에서 마주친 히구치에게 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직도 상상 친구가 보이냐’고. 슬픈 얼굴로 가버린 히구치를 뒤따라 달려갔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니라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히구치가 있는 옥상 문을 열려던 순간 내가 좋아하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나세랑은 질긴 악연 같은 사이’라는 목소리가…. 사랑스럽고 풋풋한 청춘의 로맨스에 예상치 못한 반전을 결합해 독자의 마음에 충격을 배가시키는 저자의 솜씨는 신간 《이별하는 방법을 가르쳐줘》에서도 여지없이 등장한다. ‘상상 친구’라는 소재를 적절히 활용해 현실로도, 상상으로도 읽을 수 있는 장면들을 곳곳에 배치했음은 물론 이번 작품에서는 서술 트릭까지 더해져 책장을 덮은 독자들이 ‘이것이야말로 소설을 읽는 재미’라고 느낄 만한 구성을 완성했다. 또한 ‘이별하는 방법을 가르쳐줘’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진정한 이별에 관해, 인생에서 처음 겪어본, 단단히 발 딛고 선 일상이 무너져버린 듯한 상실과 그것을 제대로 애도하고 극복하는 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견딜 수 없는 상처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한 히구치는 현실을 외면하고 상상의 세계로 도망친다. 아픔뿐인 현실이 거짓이고, 고통도 슬픔도 없는 상상의 세상이 진짜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옆에서 묵묵히, 다정하게 곁을 지켜주며 히구치가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도록 이끌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히구치는 한 발 한 발 나아가 진실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결국 “안녕. 너를 만나서 행복했어”라고 진정한 이별의 말을 건넬 수 있게 된다. 살아간다는 건 슬픈 일이다. 살아 있는 한 누구든 상처를 피할 수 없다. 《이별하는 방법을 가르쳐줘》는 아파서 무너지고 눈물 흘리는 날이 오겠지만 그 순간을 외면하지 않고 내 안에 간직한 채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세상에서 가장 애틋하고 따뜻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