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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떻게 써내려갈 것인가 - 책을 펴내며
PART 1.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파괴에서 탄생하는 - 음악과 생명의 공통점 PART 2. 록펠러대학교에서: 원환圓環하는 음악, 순환循環하는 생명 Extra Edition 팬데믹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 |
사카모토 류이치,さかもとりゅういち,坂本 龍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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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피아노가 '물체'임을 강하게 인식하면서 음악으로서가 아닌 ‘물체’로서의 울림을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저에게 ‘물체’란 자연물을 의미합니다만, 피아노라는 악기도 원래는 나무나 철 등의 자연물을 인간이 모아 억지로 조형한 것이잖아요. 그런 인공물로서의 피아노도 인간이 손대지 않고 방치하면 몇백 년의 시간을 거치며 분해되어 자연의 ‘물체’로 회귀하겠죠.
예전에는 피아노를 정밀하게 조율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피아노에게 원래의 자연 상태를 돌려주고 싶다, 피아노가 자연의 ‘물체’로서 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조율을 안 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음정이 엇나가긴 하지만, 음정이란 것도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낸 개념일 뿐 자연의 소리로서는 딱히 어긋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 pp.30-33 「‘일회성’의 소중함」 중에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별자리를 살펴본들 우주를 이해할 수는 없고, 애초에 별자리라는 개념 자체도 별을 왜곡해서 보는 것이니까요. 별자리는 하나의 평면에 달라붙어 있는 별들의 점이 아니라 실제로 완전히 거리가 다른 별들을 하나의 도형으로 보는 것이잖아요. 지금 보이는 별자리의 모양이 100만 년 후에는 달리 보일 수도 있고, 별의 빛 자체가 몇만 년 전에 발생한 것이니 어쩌면 이미 사라진 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걸 별자리라는, 일종의 도표이자 질서로 보는 것 자체가 환상이라는 말이죠. 그런 ‘별자리적’ 관점을 잠시 보류해두는 자세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p.55 「별자리를 본다 한들 우주를 알 수는 없다」 중에서 직선적인 시간 속에서 명확한 ‘끝’을 정해놓는 서양음악을 일신교적이라 한다면, 본래의 음악은 보다 다신교적이고 애니미즘적인, ‘끝’이 없어도 상관없는 타임 프레임에서 탄생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존 케이지조차 마지막까지 구조에 집착했고 ‘어떤 시간을 어떻게 구획하는가’라는 구성에 집중했지만, 저는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제가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환경친화적인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요. 기본적으로 그런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답을 찾는 노력은 꾸준히 하고 있는데, 만약 정말로 ‘친환경 음악’이 존재한다면 미셸 푸코의 ‘인간은 죽었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면에선 인간적인 것을 부정하는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다시 말해 일신교적인, 즉 처음이 있고 끝이 있는 것, 혹은 역사에는 목적이 있다는 등의 인간의 발상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고 싶다는 마음이 개인적으로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앨범에 담는 음악은 어느 지점에서 끝나야겠지만, 시작과 끝이 있는 하나의 시간이 아니라 복수의 시간이 동시에 진행되어 영원히 ‘반복’이 일어날 수 없는 음악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고요. --- pp.59-60 「별자리를 본다 한들 우주를 알 수는 없다」 중에서 아마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작곡은 2차원의 좌표에 별처럼 소리를 수놓아 예쁜 별자리를 만드는 일로 여겨졌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나눈 대화는 이런 방식을 다 버리고, 자기 안에 있는 풍성한 음악에 귀를 기울여보자는, 또 하나의 체험에 관한 얘기가 아닐까요? 인공물에 둘러싸여 있을 때도 제가 자연에 속해 있다는 생각을 항상 되새기는 것은 존 케이지의 이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곳이 음악의 원점이자 잘못된 방향으로 발을 내딛는 분기점, 부정형 상태의 바로 그 지점일지도 모르겠네요. --- p.98 「음악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중에서 앞서 사카모토 씨가 명사를 쓰지 않는 실험을 했던 경험을 말씀해주셨는데요. 사실 저도 10년쯤 전에 생물학을 좀 더 통합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명사를 쓰지 않고 명사와 명사 사이의 작용을 기술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강물의 흐름과 구름의 움직임을 강과 구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흐름과 움직임만을 설명하려는 시도였는데, 그때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세포를 찢고 뭉개고 쥐를 해부하는 일은 이제 젊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저는, 다소 멋진 척하는 표현을 쓰자면 ‘사상가thinker’로서 깊이 사유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강이나 구름 같은 요소에 이름 붙일 것이 아니라, 생명현상이 지닌 흐름 그 자체를 요소와 요소의 작용으로서 설명하는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동적평형’ 개념을 떠올렸고, 이를 조금 더 정밀화하여 일종의 수학적 모델로 만들 수 없을까 계속 고민해왔습니다. --- pp.116-117 「로고스로 동적평형을 설명하다」 중에서 에도 시대(1603-1868년-옮긴이)에 미우라 바이엔이라는 사상가가 있었는데, ‘고목에 꽃이 피는 것보다 살아 있는 나무에 꽃이 핀다는 사실에 놀랄지어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나무에 꽃이 피는 자연의 섭리야말로 진정 경이로운 것이란 뜻인데, 바꿔 말하면 ‘당연해 보이는 일들이 얼마나 기적적인가’라는 얘기죠. 후쿠오카 씨가 실험을 통해 느낀 바와 완벽히 일치하는 것 같아요. 이런 인식은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라는 바울로의 말과도 연결됩니다. 바울로의 논리는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로 귀결되지만, 결국 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할 정도의 기적이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 p.139 「되살아나는 파브르의 말」 중에서 이르든 늦든, 모든 생명체에게는 수명이 다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엔트로피 증가 법칙에 맞서 끊임없이 저항하던 동적평형이 끝내 엔트로피 증가 법칙에 뒤처지고 마는 순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탈락이 아닌 일종의 증여입니다. 그때까지 자신의 생명체가 점유해온 공간, 시간, 자원 등의 생태적 지위를 다른 젊은 생물에게 넘겨주는 거예요. 그 결과 거기에서 또 새로운 생명의 동적평형이 성립됩니다. 자신의 개체를 구성하던 분자와 원자도 환경으로 돌아가죠. 생명의 시간은 이런 식으로 38억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연속적으로 계승되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체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이타적인 행위라 할 수 있어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견디기 힘들 정도의 괴로움을 동반하지만 이런 관점으로 보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맞이한 죽음은 슬퍼하기보다는 축하할(일본어로 ‘축하하다’는 ‘고토부쿠?く’라고 하는데, ‘수명?命’에 쓰인 것과 같은 한자를 사용한다-옮긴이) 일이며, 일본어 단어 수명?命과도 궤를 같이합니다. --- pp.167-168 「죽음을 받아들이다」 중에서 |
“별자리를 본다 한들 우주를 알 순 없습니다”
음악은 악보가 아니고, 생명은 DNA가 아니다 두 사람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을 ‘별’과 ‘별자리’에 비유한다. 밤하늘의 별은 서로 몇백, 몇천 광년씩 떨어져 있지만, 인간은 별이 밤하늘이라는 평면에 흩뿌려진 것처럼 별들을 연결해 ‘별자리’를 그린다. 자연에 존재하는 무수한 ‘노이즈’(별) 중 인간에게 유의미한 ‘시그널’(별자리)을 추출하여 자연을 이해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철과 나무를 피아노로 조형해 자연에 흘러넘치는 소리를 12음계로 단순화하는 것도, 세포와 유전자를 ‘부품’처럼 분해해 그 ‘기능’을 발견하려는 것도 노이즈투성이의 자연을 인간을 위한 시그널로 바꾸는 행위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이러한 음악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기가 내는 정교한 소리 대신, 빗소리, 북극 빙하 속 물이 흐르는 소리, 나뭇잎이 바스라지는 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여 앨범 [async]를 만든다. 12음계와 악보의 완벽한 동기화(synchronization)를 추구한 것이 기존의 음악이라면, 사카모토 류이치의 [aysnc]는 엄밀하게 선택된 ‘시그널’에 포함되지 않은 생생한 ‘노이즈’를 들려주는 비동기(asynchronization)의 음악이다. “지구라는 행성에는 공기의 진동, 다시 말해 소리라는 현상이 늘 일어나고 있는데 저는 누군가가 귀 기울여 그 진동을 공유하는 시공간이 있는 상태를 음악이라 부른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강물의 여울은 인간이 있든 없든 항상 흐르고 있는데 누군가가 연주하지 않더라도 거기에서 일어나는 공기의 진동을 들으면, 그건 음악인 거예요. (…) 그렇다는 건 어떤 의미로, 일부러 새로운 진동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해요. 공기의 진동을 듣는 음악의 실상에 있어서는 악보 없이도 음악은 성립한다는 겁니다.” _사카모토 류이치 소리를 가둔 ‘별자리’가 ‘악보’라면, 생물(生物)을 사물(死物)로 만든 것은 ‘유전자’다.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보고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만들어진 이래로, 생물학에서는 생물의 구성 요소를 분해하고 그 기능을 연구하여 인과관계로 묶어내는 것으로 생명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는 기계론적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그 기계론적 생물학의 신봉자로서 세계 최초로 GP2 유전자를 발견하는 업적을 이룬 후쿠오카 신이치는 오랜 실험을 통해 GP2 유전자가 없는 실험쥐를 탄생시키지만, 해당 유전자가 없어도 생물에게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쓰디쓴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좌절도 잠시, 바로 그 점이 생명을 생명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명은 기계와 달리 ‘부품’이 빠져도 일사분란하게 변화해 균형을 찾아내며, 그것이야말로 인과관계에 매몰된 인간의 논리로는 닿을 수 없는 생명의 ‘신비’인 것이다. 그는 인과관계와 기계론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생명이 전체로서 균형을 유지하는 방식을 ‘동적평형’이라 명명하고, 각각의 생명을 넘어 자연의 세계가 어떻게 신비로운 균형을 유지하는지 설명한다. 이르든 늦든, 모든 생명체에게는 수명이 다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엔트로피 증가 법칙에 맞서 끊임없이 저항하던 동적평형이 끝내 엔트로피 증가 법칙에 뒤처지고 마는 순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탈락이 아닌 일종의 증여입니다. 그때까지 자신의 생명체가 점유해온 공간, 시간, 자원 등의 생태적 지위를 다른 젊은 생물에게 넘겨주는 거예요. 그 결과 거기에서 또 새로운 생명의 동적평형이 성립됩니다. 자신의 개체를 구성하던 분자와 원자도 환경으로 돌아가죠. 생명의 시간은 이런 식으로 38억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연속적으로 계승되어온 것입니다. _후쿠오카 신이치 “생명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된다” 사라지지 않는 일회성의 아우라와 유한한 생명 음악은 악보에 갇히지 않고 생명은 유전자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음악과 생명은 ‘단 한 번뿐’인 고유한 무엇이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그 ‘일회성’이야말로 음악이 갖는 ‘아우라’이며, 인간이 만든 훌륭한 예술이 자연의 조형과 복잡함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그는 피아노의 현을 금속 물질 등으로 문지르는 ‘내부주법’이나 전압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아날로그 신시사이저 등으로 ‘일회성의 아우라’를 자아내고, 그것을 퍼포먼스와 앨범으로 남긴다. 한편 후쿠오카 신이치는 생명의 일회성, 유한성이야말로 생명이 빛나는 이유라고 역설한다. 개체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모든 문화적·예술적·학술적 활동에 동기부여가 되기도 해요. 누구나 어떻게든 자신이 살아온 증표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유한하기 때문에 비로소 생명은 빛납니다. 그리고 그 유한의 생명이 사그라들 때, 다시 다른 생명으로 동적평형이 초기화되어 계승되죠. 생명계 전체는 이런 방식으로 맥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이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_후쿠오카 신이치 두 사람은 자신들의 동적평형, 삶의 시행착오가 다음 생명들에게 계승될 것을 믿고 단 한 번뿐인 생명으로서 삶의 증표를 남기기 위해 노력한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비선형적이며 시간 축이 없는’, 결코 ‘반복’이 일어날 수 없는 일회성의 음악을 고민하며, 직접 도자기를 빚어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를 자신의 음악으로 삼는 엉뚱한 상상까지 한다. 후쿠오카 신이치는 자신의 철학이자 생명관인 동적평형을 정교한 수학적·과학적 모델로 만드는 데 매진하며, 자연에 대한 ‘해상도 높은 표현’의 추구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남기는 삶의 증표들은 우리가 기억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로 계승된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말한다. 인공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게 된 사람들은 자신이 인공물에서 태어나 자연을 ‘관찰’하는 존재라고 착각한다고. 그러나 나와 제일 밀접한 자연은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나 자신의 신체”다. 두 사람의 대담은 ‘나’라는 자연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바라보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