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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을 띠던 먼 숲이 며칠 전부터 파릇파릇 청아하고 밝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점토 골목길 가장자리에 앵초꽃이 오늘 처음으로 꽃잎을 반쯤 연다. 습기 먹은 쾌청한 하늘에는 엷게 깔린 사월의 구름이 꿈을 꾸고 있다. 채 쟁기질이 안 된 넓은 논밭이 갈색으로 반짝이며, 무언가를 갈구하듯 포근한 대기를 향해 가슴을 열어젖히고 있다. 무언가를 잉태하여 싹 틔우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갖가지 초록 싹과 위로 치솟는 풀잎을 통해 자신의 보이지 않는 힘을 시험해 보고, 느껴 보고, 선사해 보고 싶은 모양이다. 온 누리가 기다리고 준비하며 꿈을 꾸고 있다. 온 세계가 무엇이 되기 위한 욕망에 사로잡혀 섬세하고 우아하게 내달리며 싹을 틔운다. 싹은 태양을 향해, 구름은 논밭을 향해, 이제 막 돋아난 풀은 대기를 향해 내닫는다.
--- p.8 그 시절 나무들은 환희에 젖어 의연하게 창공을 향했고, 정원에는 수선화와 히아신스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봉오리를 열었다. 그 시절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사람들조차 부드럽고 친절하게 우리를 대했다. 그들은 우리의 매끈한 이마에 아직 신의 입김이 서려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이 신의 입김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신의 입김은 우리가 성장하는 사이에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느샌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얼마나 거친 개구쟁이였던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속을 얼마나 많이 썩였던가! 어머니는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이 노심초사하고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셨던가! - 하지만 내 이마에는 신의 광채가 서려 있었다. 내 눈에 비친 것은 모두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경건함이 전혀 깃들어 있지 않았는데도, 내 생각과 내 꿈속에는 천사와 기적과 동화가 한데 어우러져 들락거리고 있었다. --- p.16 불이 꺼지고 미풍의 미동도 잠잠해졌다. 방바닥과 옷장 문도 다시 어두워졌다. 이제 눈만 감으면 다시 금빛 테두리를 두른 보랏빛 붉은 동그라미들이 파문처럼 번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이 잠들고 사방이 고요해지는데 갑자기 내 심장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밤을 향해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알아들은 두 분의 대화가 과일이 연못에 떨어지듯 내 심장에 떨어졌다. 이 파문은 삽시간에 커져 고동치는 내 심장을 넘쳐흘러 호기심의 세계로 스며들었다. 온몸에 불안과 전율이 일었다. --- p.32 뛰어오느라고 꽤나 더웠는지 브로지는 상의를 벗더니 조끼마저 벗고 이끼에 털썩 드러누웠다. 한번은 그 아이가 몸을 뒤척이는 통에 목 언저리의 셔츠가 벌어졌다. 그때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아이의 하얀 등 위에 붉은색 상처 자국이 길게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그 상처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내심 진짜 불행한 사건이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가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누가 알겠는가. 갑자기 묻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 본 체했다. 나는 그렇게 큰 상처를 입은 브로지가 무척이나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처를 보면 그 아이는 분명 엄청난 피를 흘렸을 테고, 브로지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브로지에게 예전보다 더 큰 애정을 느꼈는데 겉으로 드러내서 표현하지는 않았다. --- p.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