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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벽 앞에서 / 여섯 개의 벽 1 / 제7의 벽 / 투명한 벽 2 / 그 전능의 화가 / 하늘 길 / 존재 / 나 까딱없어 / 가을의 기도 / 무엇인가 있다 / 바닷물 소리 / 창가에서 / 슬픔의 꽃 2부 아기의 첫 울음 같은 / 너와 나 / 우연에 대한 생각 / 잃어버린 발자국 / 강나루(此岸)의 대화 / 너를 떠나라 / 새소리 9 / 나무여, 바위여, 낙엽이여! / 놓친다는 것 / 망명자 / 종점 / 고내오름 오르는 길은 / 끝없는 연주 3부 내가 사랑한 여자 / 아내의 창 / 어디나 가득하다 / 효자손 / 혼자 밥 먹기 / 샤워를 하면서 / 나의 첫 페이지 / 무거운 밤 / 양말 / 오막살이 4부 ?, 통일 / 어떤 정의(正義) / 법 / 이상한 늪 / 무성한 입 / 돌멩이 2 / 돈아 / 열려라 참깨 / 나무들은 / 거미줄 / 공짜에 대하여 5부 코스모스 / 가다가 문득 / 나무의 사랑 / 질경이 / 행복 2 / 허공 4 / 나무에 기대어서 / 나무들은 다만 / 너의 모습은 / 이별에 대하여 / 사랑 2 6부 춘정 / 파란 꽃 / 달맞이꽃 / 내도 바닷가에서 / 즐거운 허밍 / 가을엔 2 / 창에 드리운 햇살은 환하고 / 수줍은 봄 / 복사꽃 / 섬 / 산길을 가다가 / 수석(水石) 1 작품해설:외로움의 시학 _ 박덕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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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중천에 누렇게 뜨고
아지랑이 불타는 들녘, 문득 사위는 멈추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성영화 속을 걸어가는 실루엣 어린 적 볕이 과랑과랑한 들녘에서 탈을 따먹으며 길을 잃었을 때, 겁이 와락 났을 때, 꿈결인 듯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 내 안에 누구실까 멈칫 멈추면 멈추고, 다시 걸으면 뒤를 당기는 목소리 슬며시 돌아보니, 저 어린것이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너 거기서 왜 울고 있니? -발자국을 잃어버려서요. 그깟 발자국은 어따 쓰려고? -집으로 돌아가려고요 “번쩍!” 번개가 스치자 아이는 간 곳 없고, 나는 왜 여기 서 있는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잃어버린 발자국」 중에서 강나루에 무연히 섰노라니 하루를 무겁게 굴려온 해 불타는 강물로 잦아들 때 줄곧 따라온 바람일까, 툭 친다. 당신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강을 건너려고 도강선을 기다리고 있지요. 나룻배는 언제 도착합니까? -그야 강주인의 마음이겠지요. 당신이 줄곧 걸어온 길은 무엇입니까? -후회와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리움입니다. 그때마다 사정없이 엉덩이를 들이받는 성질 고약한 염소 한 마리 몰고 왔지요. 당신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행복은 무엇입니까? -아, 그 또한 후회와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리움입니다. 왜 그런가요? -행복은 그 모든 것의 화학 작용일 테지요. ‘바다의 눈물’ 진주를 보세요, 그 은은한 무지갯빛이 아픈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당신은 사랑의 실체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회초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용서의 눈물이지요. 아버지는 먼저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십니다. 십자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면 어머니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탄의 질투도 뚫지 못하는 암탉의 날개지요. ‘엄마’, 이는 너무 슬픈 이름이지요. 그러면 이성의 사랑은 무엇인가요? -바라볼 때 황홀한 별, 닿는 순간 스러지고 마는 별, 언제나 가슴에서 반짝이지요. 그러면 완전한 사랑은 없습니까? -그것은 그리움 너머에서 피는 꽃, 나를 다 소진하고 나서 비로소 피는 꽃. 왜 세상에는 완전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까? -탐욕 때문이지요. 탐욕으로는 거울의 뒷면을 볼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사람은 왜 죄를 짓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가요? -아닙니다. 내가 존재하니까요. 허공은 텅 비어서 어디나 가득하지요. 그러면 사탄의 존재는 무엇입니까? -그는 어둠의 제왕, 죽음은 그의 권력, 쾌락과 욕망은 그의 전가의 보검이지요. 사탄의 유혹은 무엇입니까? -그의 혀 밑에서 내뿜는 모호한 안개지요. 개념이 삭제된 환상 속에 몸을 숨기지요. 당신의 약점을 살짝 말해주시겠습니까? -음…… 핑계입니다. 본의 아니었다는, 너무 취해서 필름이 끊겼다는…… 당신은 무엇을 위해 시를 씁니까?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사는 겁니다. 길을 가는 자의 노래이지요. 당신의 인생에서 어떤 삶을 원하시나요? -저 타이타닉호의 악사들의 연주입니다. 물속에 잠기는 순간까지 연주하는 것이지요. 아, 배가 도착했군요. 잘 가세요. -잘 있어요. 세상에 미련도 없다 했는데 왜 눈물이 나죠? --- 「강나루(此岸)의 대화」 중에서 밤 아홉 시면 어김없이 서울 작은놈이 알람을 울린다 혼자 사는 늙은 애비, 냄새 날까 봐, 고독사로 매스컴을 탈까 봐 걱정인 게다 “야, 이놈아! 죽을 때 되면 어련히 전화할까, 전화비 오른다.” 어스레 떨면서도 그게 고맙다 코로나 숨을 쉬면서 사람이 그립다 등이 가려울 때 아내에게 등을 돌려대면 족집게처럼 가려운 데를 긁어준다 등이 가렵지 않은데도 무장 들이댄다 내 흉계를 빤히 보면서도 “목욕 자주 헙서.” 괜한 핀잔을 얹어 구석구석 부드럽게 쓸어준다 등을 통째로 맡기고 느긋이 행복하였다 이제는 효자손이 아내를 대신한다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벅벅 긁어대면서 눈물이 난다. --- 「효자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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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의 시는 외로움에서 비롯되고 외로움 속에서 절망하며 외로움 속에서 깊어진다. 그것은 무엇보다 김종호가 살아온 자연환경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김종호는 제주 애월에서 살고 있다. 특정 시기 제주를 떠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제주에서 자라고 산 세월이 대부분이다. 아시다시피 제주는 바다로 에워싸인 섬이다. 바다는 해안에서 수평선에 이르기까지 대개 일망무제(一望無際)다. 제주에 산다는 것은 일망무제한 바다와 더불어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종호의 시에 바다가 그득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중략) 김종호의 시는 외로움 속에서 그 외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과 내적인 대화를 통해 깊어진 시다. 그 과정은 기독교인으로서 절대자 앞에서 괴로워하면서도 그 괴로움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절대자 앞에 나아간 것과 같다. 그는 시는 왜 쓰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 대답은 이러했다.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사는 것’이라고. 그렇다, 시는 시인이 쓰는 행위이지만 그것은 곧 자신이 살아내는 행위다. 왜? 살기 위해서. 그러나 여기에 김종호는 보다 더 뜻깊은 대화의 결과를 덧붙임으로써 자기 시 쓰기의 깊이를 보여준다. ‘나는 시를 쓴다, 침몰하는 배의 사람들, 그 사람들과 끝까지 관계 맺음을 하기 위해서!’ 김종호의 시는 이렇듯 외로움과 함께하고 그것을 견뎌냈다. - 박덕규(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 해설 중에서 시인의 말 까마득한 길이 어제처럼만 같다. 걸음걸음 인도하신 이 마지막 한걸음도 헤이실 것을 믿는다. 노을 빚기 노을이 저리 곱다 하오시니 내 노을 한 채 빚으렵니다. 쌓아도, 쌓아도 닿지 않는 하늘 고이고, 받치고 한 땀 한 땀 다듬어서 채색 옷도 곱게 내 노을 한 채 빚어드리리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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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선이 부딪히는 곳은 무수히 많이 있지만, 둘을 꼽는다면 그것은 시인의 내면과 자연이 될 듯하다. 이 시집에서 ‘벽’은 시인이 겪는 절망의 근원으로, ‘나무’는 자연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각각 자리 잡는다. 스스로를 ‘망명자’ 또는 ‘표류하는 배’로 인식하는 시인은 허물 수 없는 ‘벽’에서 벗어나려 무진 애를 쓰고, ‘나무’로부터는 삶의 자세를 배우고 싶어 한다. 그 외에, 시인은 사회적 문제와 개인의 행복·사랑 등에 대해서도 진술하고 있는데, 독자는 이 모두를 통해 시인의 형형한 시선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김병택 (제주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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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시지만 나는 김종호 선생님 자체를 더 좋아한다. 이분은 뭐랄까 범속하지 않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깊고 온유한 눈빛과 음성은 마치 예전 선지자를 떠올리게 한다. 제주의 애월에서 태어나 평생 거기서 미술 교사를 하며 그림과 시와 함께 매일 거기 고내봉을 오르신다. 몇 년 전 상배를 하신 후의 상념이 이 시집에 많이 묻어 있다. 고내봉을 오르며 다가오는 신에 대한 경외와 삶의 각성이 주위 풀, 나무, 멀리 제주 바다 어우러져 가슴을 울린다. 노경에 불러들이는 소녀의 심상은 또 어떤가. 이렇게 시인은 더 늙지 않고 오래오래 거기 계실 것이다. - 나기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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