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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있었던 일
카피라이터, 김 과장 우체국 여자 네 찌찌를 찾고 싶다면 신도림역 4번 출구로 와라 오늘의 해시태그 한낮의 열기 하루 남은 건 명랑한 최선 해설 그 불안이 당신을 구원할 것이다 -진기환 (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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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6차선 한복판에서 그는 두려움에 오도 가도 못했다. 죽으려고 결심했으면서 차에 치여 죽을까 봐 겁났다.
“뭐 해?” 보행 보조기를 밀고 가던 할머니가 보람의 어깨를 툭 쳤다. 할머니는 느긋한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모든 게 멈췄고 할머니만 고요하게 움직였다. 보람은 할머니를 따라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들이 횡단보도를 건넌 후에야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란불일 때 들어서기만 하면 세이프야. 괜찮아. 안 죽어.” 할머니가 말했다. 보람은 파란불, 세이프, 괜찮아, 파란불, 괜찮아, 웅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19~20p,「방금 있었던 일」중에서 “아니, 근데 솔직히 김 과장님 혼자 편지 쓴 건 아니잖습니까. 보니까 AI 도움을 많이 받으셨던데.” “지금쯤이면 깨달았을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구독자들이 말하는 진정성이 제 노동의 흔적이고 가치예요. 저를 채용하실 마음이 없으신 거 같으니 이만 가 볼게요.” ---「72p,「카피라이터, 김 과장」중에서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내게 조금 더 호의적이었다면 어땠을까. 나도 저들처럼 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천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욕망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욕망했을 것이다. 일만 시간의 시간의 법칙을 가볍게 뭉개 버린 것에 대한 욕망. 그것은 사유의 문제가 아니라 태생의 문제였다. 그것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80~81p,「우체국 여자」중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화내지 말라는 시를 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윤은 삶에 화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대학 교양 수업에 한국 문학이 있었다. 한국 문학을 배우는 시간에 왜 푸시킨의 시가 나왔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윤은 시를 낭독하던 강사의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 불던 바람 소리까지 똑똑히 기억했다. 삶은 그를 속였고 속이고 여전히 속일 것이다. 삶에 화를 내 봐야, 맞서 싸워 봤자 변하는 건 없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화내지 마, 노여워하지 마, 이유를 알려고 하지 마. 죽은 시인이 윤에게 속삭였다. ---「136p,「네 찌찌를 찾고 싶다면 신도림역 4번 출구로 와라」중에서 “헐, 뭐야. 4B전도사님 상의 탈의한 거 아니었어요? 왜 안 했어요?” 연희의 팩트 공격에 4B전도사님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찰나의 정적. 진실은 움찔하는 순간에 있다. “비밀! 우리 빨리 노래방 가요. 연희 씨는 어떤 노래 잘해요?” 4B전도사님이 찰나의 정적을 깨며 환하게 웃었다. 연희의 뺨을 가볍게 꼬집으며 웃는 4B전도사님의 얼굴은 여전히 예뻤다.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같이 울어 주고 웃던 그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희재야, 가자. 저 여자 뭐야. 어이없어. 비밀이래. 너 완전 여우한테 당한 거야.” 연희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젠더포비아님, 어디 가요? 취했어요? 속이 안 좋아요?” 속내를 들켰음에도 4B전도사는 천진한 얼굴을 하고 우리 뒤를 따라왔다. 그의 말간 표정이 섬뜩했다. ---「171p,「오늘의 해시태그」중에서 왜 경제적 수준이 맞지 않는 우리와 다닐까? 김미효 성격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팀을 깰 수 있을 텐데.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의문이 들었다. “얼굴이 되게 빨개요. 알러지 있어요?” 김미효가 물었다. 앙상블 팀보다 여기가 더 편해요, 몇 시부터 줄을 섰어요? 열정이 대단하시네, 말하며 환하게 웃던 김미효와 눈이 마주쳤다. 다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7개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밥을 먹었고 차를 마셨다. 나는 한 번도 김미효가 편한 적이 없었다. ---「206p,「한낮의 열기」중에서 나도 재호처럼 딱 열흘만 병원에서 앓다가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열흘이면 가족들을 다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게다가 열흘 병원비는 남은 가족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남은 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적당하게 애통해하는 시간을 주고 죽는 것. 모든 늙은이의 소망일 것이다. 재호의 죽음이 부러웠는데 갑자기 부아가 났다. 가슴에서 열이 치솟아서 밖으로 나갔다. 호상인데, 깔끔한 죽음인데 눈물이 쏟아졌다. 재호가 너무 보고 싶었다. ---「230p,「하루」중에서 “처음엔 정신병이 생겼나 싶었는데 엄마가 너무 순수하고 적극적으로 사니까 나도 조금은 믿고 싶어지더라. 종말이 오기 전까지 우리 못 해 본 것들 다 해 보자. 아빠는 그때가 되게 좋았어. 종말론이 아니라 우울증에 걸렸다면 절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거야. 우울증보단 종말론이 낫지.” 아빠가 환하게 웃었다. 형이 다른 코딩 언어를 연산하기 위해 작은따옴표를 붙이듯 종말론을 믿는 척하는 아빠를 상상해 보았다. 진실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271p,「남은 건 명랑한 최선」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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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남은 건 명랑한 최선」의 화자 ‘나’는 대학생으로, 휴학 후 코딩에 전념하는 중이다. 대학 졸업 후 취업 전선에 내던져져 백수로 남을까 봐 두려워하며 닥치는 대로 자격증을 따고 있다. 취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만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동시에 끝없는 불안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무언가를 막연히 기대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컴퓨터 학원의 홍보 영상을 운명처럼 마주하고 홀린 듯이 수강 등록을 하게 된 그는, 불행이 일찌감치 대비해 놓은 새로운 사건에 간파당해 “간단히 리셋”(「남은 건 명랑한 최선」)되고 만다. 그러나 원점으로 회귀하는 상황이 역설적으로 지금까지의 실패를 딛고 앞으로 더욱 씩씩하게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기발하면서도 기이한 술책이 되어준다.
책의 첫 문을 여는 「방금 있었던 일」 속 ‘보람’은 아스퍼거 증후군일지도 모르는 자신의 병리적 증상을 한사코 거부하지만, 정규직 전환을 위해 결국 현실과 타협하며 끝끝내 고수하던 정체성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세계를 단단히 구축하는 이야기를 생생히 그려낸다. 「카피라이터, 김 과장」 속 ‘나’는 출근하는 직원들의 표정이 죽상일수록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곤 입꼬리를 슬쩍 올리는 더할 수 없이 세속에 물든 자본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정작 본인 스스로는 자신의 과욕적 기질과 면모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김 과장이 말했던 ‘진정성’의 의미를 곱씹으며, 그 역시 시스템을 깊이 체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우체국 여자」는 등단 작가이자 우체국 직원인 ‘나’는 문예 창작 교실에 다니는 학생들이 투고하는 원고를 남몰래 빼돌려 심상한 표정으로 읽고는 상습적으로 판단하는 일을 일삼는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마지막 장을 찢은 원고를 우편 봉투에 넣어 매번 다른 신문사에 응모하며 그들의 운을 시험하는 기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네 찌찌를 찾고 싶다면 신도림역 4번 출구로 와라」에 등장하는 ‘윤’은 게임 회사에 근무하는 안정된 삶의 한가운데서 갑작스레 젖꼭지가 사라지는 일을 겪는다. ‘윤’에게 젖꼭지는 사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남들 다 있는 젖꼭지가 없다는 건 너무하다고 느끼는 모순된 감정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결국 ‘윤’은 자신의 젖꼭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의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나기 위해 신도림역에 간다. 「오늘의 해시태그」의 ‘희재’는 사회적 가치를 수호하는 행위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하며,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위한 학생회 참여부터 여성 인권 운동의 일환으로 삭발까지 감행하는 것으로 대단히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를 사상적으로 감화시킨 사람들의 삶을 분석하고 해부한 끝에 그들의 위선과 허위를 기어코 들춰낸다. 「하루」는 오전엔 병원에서, 오후엔 은행에서 하릴없이 떠돌며 해가 지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한 노인의 심경 변화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기나긴 하루가 거듭되어 완성되는 찰나같이 짧은 세월을 회고함으로써, 그가 그저 살아내기만 했던 삶도 기꺼이 인정받고 존중받을 필요가 있는 인생이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주인공인 ‘보람’이 정규직 전환을 위해 스스로를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병리화하며, 자신이 고수하던 정체성을 내려놓고 결국 밥벌이를 위한 선택으로 마음을 굳히는 이야기 「방금 있었던 일」부터,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이 늙고 쇠약한 노인이 된 ‘나’가 기나긴 하루 끝에 자신의 죽음 이후를 맡겨야 하는 아들 내외에게 결국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로 결심하는 마음의 경과를 다루는 「하루」에 이르기까지. 강나윤의 인물들은 인생이 두서없고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마다, 그 속에서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는 정체성과 밥벌이라는 영원한 딜레마에 끊임없이 봉착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는 정체성이라는 개념조차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저 허상으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른다는 삶의 무서운 실체를 마주하며, 그것이 동반하는 깊은 불안감과 두려움을 더욱 끌어안는 방식으로 명랑하게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환기한다. 『남은 건 명랑한 최선』은 삶을 견고하게 지지하고 지탱하고 있다고 믿었던 토대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현실을 조명하는 동시에, 앞으로 그것을 딛고 마주할 불안 너머의 아득한 세계를 환한 불빛으로 비춰줄 것이다. 작가의 말 작가의 말을 동생 집에서 쓰고 있다. 며칠 머물게 됐는데 공교롭게도 작가의 말을 써야 하는 시기와 맞물렸다. 소설 쓰는 것보다 힘든 게 작가의 말 쓰는 거라더니, 정말이었다. 사흘 내내 썼다, 지웠다, 괴로워하다가 산책하고, 신나게 썼다가 지우고 좌절하고 있는데 동생이 말했다. “밥 먹자.” 우린 곧장 남대문 시장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먹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의기투합한다. 갈치조림을 먹고 씨앗 호떡을 하나씩 입에 물었다. 서울역에 있는 동생 집까지 걸었다. 날씨는 적당히 쌀쌀했고 미세먼지도 괜찮음이었다. “언니, 우리 좀 신기하다. 어릴 때 우리 모지리였는데. 둘 다 꿈을 이뤘어.” 어릴 적 우리는 이불 속에서 머리를 맞대고 막내를 어떻게 따돌리고 놀러 갈 것인지 모의했고, 서로의 옷 취향을 비웃다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은밀한 꿈을 공유했다. 20년 넘게 한방에서 살을 맞대고 살아서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거기엔 과거와 현재는 물론이거니와 미래도 있었다. 어른의 미래는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우리의 미래도 그럴 거라 여겼다. 꿈은 현실에 발을 디디지 못한 채 아득히 멀어졌다. 더는 내게 꿈을 묻는 사람이 없었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건 허망이고, 삶을 살아내는 게 현실이다, 그렇게 살아갔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수록 불안했다. 통장 잔고와 경력이 쌓이는데도 나는 뭔지 모를 불안감에 시달렸다. 평온한 일상이 버겁고, 더는 현실에 발을 디디고 싶지 않은 순간에 아득한 그곳에 버려두었던 이야기들이 내게 다가왔다. 나의 소설들은 평온한 삶 속에서 느꼈던 불안이다. 왜 불안한지 모른 채 그저 막막했던 마음이 문장이 되었다. 내 안에 가득한 불안한 마음을 마음껏 꺼내놓았다.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을 마주 보고 보듬어주고 싶었는데 꺼내놓기만 하고 동생의 말처럼 내가 머저리라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거 같아서 미안하다. 불안한 사람이 있다면 당신만 불안한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경기문화재단에 감사드립니다. 책이 나오기까지 애써 주신 최지애 작가, 김성규 시인, 해설을 써주신 진기환 작가, 추천사를 써주신 우다영 작가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드립니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보냅니다. 내 꿈을 지지하고 응원해 준 친구들, 미애 언니, 혜정 언니 고맙고 사랑합니다. 소설 말고 드라마를 쓰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 학창 시절 문학소녀였다는 우리 엄마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엄마, 저는 소설이 좋아요. 2025년 강나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