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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측 가능한 삶
착장 세이프 타임 기도의 문법 품필생(品必生) 안부의 출처 의자가 한 일 사탕이 녹을 때까지 해설 바라봄의 용기 ─전소영(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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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돌멩이가 떨어진 얼음 호수 표면에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 혜진은 생각했다. 저건, 저건 바로 후회하는 마음의 형태라고.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는 게 힘들지, 돌아보지 않는 게 뭐 힘들어. 이제 혜진은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었을 삶의 여러 지점을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었다. 뭐든 배울 수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쳐 줘야 하는 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마음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혜진은 그것을 스스로 배우기 위해 너무 많은 애를 써야 했다. 세계에 대해 너무 잘 알기만 하도록 가르치면 어떤 아이들은 겁에 질린다.
---「관측 가능한 삶」중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하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인 걸까.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 다른 것과 변별되기 어려운 거였나. 별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생각은 이치와 논리의 벽을 허물어뜨리며 퍼져 나갔다. 카메라가 뭔가를 보는 게 분명하다. 표현이 가능하도록 장치해 놓으면 시스템은 이것도 안 보이냐며 보지 못하는 인간들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여기 사람이 있어, 사람이 있다고. 안 보여? ---「세이프 타임」중에서 “아, 알겠다, 왜 비가 내리는지!” “뭔데?” “빗방울들이 나뭇잎 위에서 미끄럼 타고 싶어서 그런가 봐.” 비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귀여운 것도 잠시, 그 단순한 해답이 세상의 많은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러고 싶은 마음, 그게 세상의 이유인지도 모른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마땅한 답 같은 건 사실 없는 걸 수도 있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들과 은강 자신의 마음까지도, 다만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도의 문법」중에서 “그래서 좋은 거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건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좋은 조건을 갖고 있으면 누구라도 좋아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 남들이 뭐라 해도 좋은 것. 그런 게 있어야 사랑 아니겠어요? 그런 건 없냐고요?” ---「품필생(品必生)」중에서 내 차가 곧 멈추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나의 곤란을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어쩐지 비밀을 품은 듯이 여겨졌다. 어떤 책에서 그랬더라. 비밀이 없다는 것은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고. 나는 내 비밀을 누군가 알아챌까 봐 겁이 났었고 아무도 모르는 게 두려웠었다. ---「안부의 출처」중에서 “왜 무정차 열차를 기다린 거예요?” 그가 물었다. “아무도 못 타는 열차니까요.” 여자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답했다. 그리곤 아쉬움도 잠시뿐 다시 조용히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더 묻고 싶었지만, 여자는 볼일을 모두 마친 것처럼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승강장을 가로질러 계단 위로 향했다. 더는 손목을 흔들지 않는 여자의 뒷모습을 향해 일어서다가 그는 스크린 도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시 마주했다. 아까의 잔상 같았다. 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자신이 영영 멈추어 버릴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멈춤을 멈출 자신의 힘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리곤 물었다. 내가 스스로 멈춘 적은 있던가. ---「사탕이 녹을 때까지」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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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관측 행위가 현실을 결정한다는 말에 매료된 적이 있다. 현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관측에 따라 결정된다니, 보는 사람이 없다면 달도 존재하지 않는 거냐는 의문이 나올 만큼,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그 불가해함 때문에 더 끌렸다. 그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문자도 입자처럼 존재하는 것 같다고. 내게 소설 쓰기가 그랬다. 대체 내가 무슨 소설을 쓰려는 걸까, 그건 정말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쓰기 전에 그건 너무 많은 상태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쓰는 것밖에 없었다. 결정되어 쓰는 게 아니라, 쓰는 행위가 소설을 결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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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지연과 같은 ‘우상향右上向의 작가’를 나는 최근에 본 적이 없다. 높고 험난한 산의 바위나 얼음을 오르는 예술적 행위를 ‘알피니즘alpinism’이라 하는데, 최지연의 글을 읽으면 매우 차갑고 뾰족한 설산 바닥의 첫 돌부터 차근차근 밟아 가는 ‘등로주의 알피니스트’가 연상된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지속적인 속도로 그는 본인의 산정山頂을 향해 오르는 중이다.
무엇보다 최지연이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만한 ‘문제적 인물’을 찾아내는 솜씨는 감탄을 자아낸다. 첫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통의 어려움과 고된 노동, 불면과 불안에 시달리거나 예상치 못한 덫에 걸려들고 환각에 빠져든다. 이들이 일상의 행복과 안온의 외곽에서 허우적대는 근본적인 이유는 관계의 상실과 통증에서 비롯된다. 통증을 앓는 자는 많으나 이를 형상화하는 자는 드물다는 점에서 귀한 시선을 가진 작가이다. 또한 미세하고 연약한 사건에서 시작된 균열은 작품이 끝으로 갈수록 예측하기 어려운 비선형의 곡선을 그리며 파국으로 나아간다. 간혹 소설가들은 임팩트를 주기 위해 상당히 과감한 진행을 감행하기도 하는데 최지연은 ‘무리수’를 두지 않으면서 ‘묘수’에 가까운 플롯 진행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보편성과 고유성 사이의 절묘한 줄타기에 얼마나 다양한 전략을 추구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들 중에는 ‘그렇게 태어난 작가’가 있고 ‘크게 되어 가는 작가’가 있다. 예술과 창작이 단지 번뜩이는 영감의 세계가 아니라 피, 땀, 눈물이 동반된 수련의 영역이라면 결국 후자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세계를 우리 앞으로 꾸준히 당겨 오는 부류가 아닐까 한다. 최지연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바로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건 이와 같은 이유이다. - 해이수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