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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큰애의 꿈속으로 | 운명을 예고하는 시조 | 중학교 입학 | 4에이치 | 23일 만에 돌아오다 | 족보 | 이문구 | 술을 배우다 | 형님들 | 괴력난신 | 빛나는 졸업장 | 노가다 사환 | 청년부 간사 | 청춘 | 재건청년 | 선거 | 진짜 재건운동 | 잡기장에 쓴 글 1 | 서울에서 | 기분이와 작은누나 | 잡기장에 쓴 글 2 | 막장으로 | 혼인 | 방위병 | 새마을운동 | 네 번의 초상 | 오서댁 | 아내의 일기 | 책상 | 반장일지 1 | 책을 사다 | 반장일지 2 | 생일 밥상 | 노력이라면 남한테 뒤지지 않건만 | 장모님·작은누나 떠나다 | 빨간 책 | 돈 버는 아내 | 데모를 했었나? | 부끄러운 눈물 | 석탄 합리화 | 아버지 전 상서 | 우루과이 라운드 | 아내의 취직 | 대학생 둔 어버이 | 토박이 조카들 | 농민대회 | 군대에서 걸려 온 전화 | 노래방 기계 | 연세대 사태와 무장공비 | 혼자만의 소풍 | 큰애의 낙향 | 없는 삶과 있는 삶 | 아내의 퇴직 | 큰애의 결혼 | 소설을 쓰다 | 풍악 소리 | 두충나무 | 작은애 공무원이 되다 | 노인회장 | 딸의 결혼 | 딸애가 쓴 글 | 독수공방 | 아내의 수다 | 아내에게 바치는 감사의 글 | 해외여행 | 세금 | 손자 자랑 | 동네 한 바퀴 | 넷째 형수 떠나다 | 소들아, 잘 가라 | 정리 | 떠나던 날 | 먼저 간 당신 해설 아버지의 입, 아버지의 욕망 임지훈(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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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아버지 탓이에요. 제 소설의 절반이 아버지, 어머니 얘기 쓴 거잖아요. 제가 아버지 삶에 주눅이 들어서, 아버지 얘기만 쓰면 제 주특기가 발휘 안 되었다고요. 제 주특기가 해학인데 아버지 얘기만 쓰면 해학이 안 되고 막 이상하게 진지해졌어요. 강희맹의 『훈자오설』 비슷하게 됐다고요. 아버지를 무슨 성인처럼, 참된 농사꾼처럼 그리다 보니, 독자가 원하는 흥미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아요.
누가 내 얘기를 써 달라고 했냐? 언제 나를 미화해 달라고 했냐? 솔직히 내 얘기 쓰는 거 싫었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아는 척 함부로 썼어. 어이가 없었지만 아들놈이 먹고살아 보겠다고 아비를 팔아먹는 걸 어쩌겠느냐. 꾹 참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그래, 내가 흥미 없는 인간이었지. 내가 대체 흥미 있을 수 있는 인생이었냐? 나도 너처럼 부모 잘 만났으면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풍류 즐기며 살았겠지. 아버지 죄송해요. 그놈의 죄송하다는 소리 작작 해라. 원고 줘 봐라. 내가 읽어 봐야겠다. 흥미 없을 텐데요. 흥미 있게 바꾸면 되지. 아버지가 인공 지능이다, 간주해. 내가 읽으면서 흥미 있게 고쳐 주마. 정말요, 아버지? 그래, 살아서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었는데, 하물며 죽어서야 못 할 게 뭐냐. --- pp.11-12 말 잘했다. 그러니까 너는 농사를 책으로 배운 거다. 몸으로 배운 게 아니라. 내로남불 아니냐? 너는 신문과 책으로 세상을 공부한 자들이 실제 삶을 모른다고 무시하고 비난해 왔다. 넌 뭐가 특별나서 신문, 책 조금 봤다고 농사를 알고 농민을 안다고 자신하는 게냐? 조금 본 게 아니라니까요! 됐고, 정직해 봐라. 네가 진정 농사를 알아? 농촌을 알아? 사랑하는 것과 아는 건 다르다. 넌 농촌을 사랑하는지는 몰라도 알지는 못해. --- pp.36-37 “제가 어제 하루 일한 거 매형이 받아서 조카들 과자나 사 주슈. 지는 고향으로 돌아갈래유.” 큰매형이 혀를 찼다. “뭐여, 달랑 하루 일하고? 며칠만 더 일해 봐. 공장 일이 농사일 광산 일보다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될 겨. 내가 시골서 농사지을 때는 길이 안 보였다. 뭘 해도 도시는 길이 보여.” “길이 보이고 안 보이고 간에, 답답해서 못 있겄슈. 저는유, 들판이 안 보이면 못 살어유. 저는 시골 천성인가 봐유.” “대책 없는 놈 보소. 스물다섯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었냐? 남들은 다 도시로 기어 올라오는 판에 뭔 시골 타령여.” 무엇이 문제일까? 왜 남들 다 좋다는 서울에 정이 안 가는 것일까. 고향 땅에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치만 형제가 있다. 형이 넷이나 있고 작은누나도 가까이 있다. 아버지 같은 도십장이 있고, 친구들이 있다. 기분이도 있다. 기분이? 걔는 왜 그리운 거지? 그때가 서울에서 살아 볼 것을 건성으로나마 갈팡질팡해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로 창은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 볼 탐심을 품어 본 적조차 없었다. --- pp.123-124 허무한 인생 살아 45년 세월은 흘렀건만 남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늙어 가는 마누라쟁이, 철부지 어린 삼남매. 이것이 나의 긴긴 세월 동안 발자취란 말인가. 유복한 가정들은 무슨 복이 많아서인지 노력 탓인지. 노력이라면 나도 남한테 뒤지지 않건만. 이것도 하늘의 장난인가. 기구한 운명의 장난인가. 큰 고생을 하고 자라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복스럽게도 살지 못한 이 인생. 남처럼 휴식 한 번 갖지 못하고 남처럼 호강 한번 못 시키는 이 인생아. 늙어 가는 아내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슨 말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 허무한 인생이 마음까지 좀먹어 가는 것일까. 아니면 세월 탓일까. 괴로운 심정 씹다 보면 병이 되니 가슴만 답답하구나. --- p.211 큰애의 두 손을 꽉 움켜잡았다. 고개를 숙이고 뇌었다. “고맙다, 고맙다, 참말로 고마워.” 창은 자기 입에서 그런 말이 나갈 줄은 몰랐다. 녀석도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지 멍청한 얼굴이었다. 참말로 고마웠다. 큰애가 대학에 붙고 말고가 자기 운명을 결정짓는 일처럼 사료되었다. 그때까지 살아 온 이유가 오로지 큰애의 대학교 합격이었던 것처럼, 백치가 돼 버렸다. 아무리 되새겨도 되게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어떻게 자식 놈 앞에서 눈물을 흘려. 고맙긴 뭐가 고마워. 아비한테 그 정도는 해 줘야 자식이지. --- p.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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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이 소설은 우여곡절을 거듭했다. 2019년 여름부터 쓰기 시작했고, 오랜 세월 다듬었다. 제목도 자주 바꿨다. 첫 번째 제목은 ‘농광축이 김동창 뎐’이었다. ‘농광축이’는 ‘농’사도 짓고 ‘광’부도 하고 ‘축’산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꾸준히 지지하고 응원해 준 분들이 계셨다. 그분들이 맛보았던 긍정적 흥미를, 미지의 독자님들께서도 맛볼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2026년 4월 김종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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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편소설은 한국 문학에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한국 농촌 현대사를 익살과 품위의 매혹적인 언어로 기록하고 있다. 애써 남겨 두지 않으면 안 될 민중의 삶을 이렇듯 예사롭지 않은 감각과 강한 생명력으로 풀어내다니. 각별한 아버지가 등장하는 명작 소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농촌 소설, 혹은 변방의 이야기를 최후까지 쓰겠다고 선언했던 소판돈(김종광 소설가의 자작 별호)이 또 한 아버지를 기록했다.
한데 이 아버지는 너무 희한하다. 우리 한국 문학사에 이토록 평범한 아버지가 있었던가. 이 주인공은 80년을 한 시골 마을 역경리에서 살았다. 매일같이 농사를 지었고, 석탄을 25년 캤고, 한우를 40년 키웠다. 내세울 얘깃거리가 없을 듯하기도 한 삶이었다. 그 별 볼 일 없을지도 모를 생애를, 아버지가 소 판 돈으로 공부하고 작가가 된 소판돈은, 그의 모든 역량을 다 짜내서, 별 볼 일 있던 생애라고 우긴다. 토박이 농민 중에서도 새마을스러웠던 아버지의 생애를 중심으로, 한국 농촌 현대사를 이야기로 풀어내겠다는 야심이 역력하다. 어쨌거나 영웅화랄지 미화와는 동떨어지게 그려진 아버지다 보니, 허허실실 웃음판이다. 아버지의 넋과 자학이 주특기인 작가의 부조리 희곡 같은 대화는 능청스럽고 짠하다. 무덤에 계신 소판돈의 아버지가 좋아할는지 심히 걱정될 정도로 재미있다. 피식피식 웃다 보면 어느새 예리한 그 무언가에 찔린 듯 마음 한쪽이 아려 오기도 한데 알 수 없는 힘이 나기도 한다. 흥미롭고 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 박성우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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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습니다.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랜만에 만난 농촌 소설입니다. 감칠맛 나는 충청도 사투리와 순우리말이 어우러지는 대사 그리고 능청스러운 해학이 이문구 선생의 소설을 보는 듯합니다. 근래 모녀 서사가 압도적인 한국 문학의 대세 속에서 모처럼 부자 서사를 읽는 색다른 재미도 있습니다.
한 마을에서 80년을 살면서 4H운동, 재건운동, 새마을운동, 농민운동을 거쳐온 토박이 농민 아버지의 생애는 그대로 한국 농촌 현대사입니다. 힘들었던 시대 고생스럽고 눈물겨운 삶을 이야기하면서도 웃으며 읽을 만큼 밝고 익살스럽게 펼쳐 나간 작가의 역량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 재미와 웃음에 가려진 아픔과 눈물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아버지가 자식 셋을 모두 대학에 보낸 것처럼 우리는 그 세대에 큰 빚이 있습니다. 이문구 선생 이야기가 소설 속에 몇 차례 나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아버지가 이문구 선생과 같은 고향, 같은 중학교 동기 동창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토박이 농민으로 팔십 평생을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 낸 아버지에 대한 헌사이면서, 이문구 선생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합니다. 요즘의 소설들과는 결이 다른 흥미롭고 귀한 소설입니다. - 문재인 (19대 대한민국 대통령, 평산책방 책방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