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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있는 날
첨단 칸타타 빌라 최고봉은 말했다 고장 난 문짝 경호 오빠가 왔다 디케의 눈물 곁에 가만히 있어도 위로가 되는 해설 기꺼이 흔들리는 세계에 대하여 ―황녹록(문학평론가) 추천사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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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방세 안 낸 거 알고 있어요.
경우 씨 아들이 오십만 원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받았다. 기다려 주시면 제가 꼭 갚을게요. 그는 정중히 경례하고 책을 가지고 갔다. 나는 순간, 이건 아니지 싶었다. 이건 돈이 아니라 유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우 있는 날」중에서 그와 달리 나는 번민으로 힘들었던 이십 대가, 억만금을 줘도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가족에 대한 반항과 방황으로 우울증에 시달렸고, 죽을 용기는 없으면서 죽고 싶었고, 빨리 늙고 싶었다. 늙으면 기억도 흐릿해질지 모르니까. 마음이 힘들었던 그 시절보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지금이 훨씬 나았다. ---「첨단 칸타타 빌라」중에서 우울감에 빠져 있는데 덕만이 보여 줄 영화가 있다고 나와 보라고 했다.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지, 구시렁거리며 나는 마지못해 거실 소파에 앉았다. (…) 영화의 영향 때문인지 다른 방에서 자던 우리는 모처럼 함께 방에 누웠다. 지난날들?연애할 때의 설렘, 시집왔을 때의 낯섦, 자식들이 처음 입학했을 때의 기쁨,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상실감, 덕만이 퇴직했을 때의 막막함?등을 밤이 깊도록 이야기했다. 연민이 일었다. 나는 덕만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주름 사이사이마다 함께한 우리의 세월이 들어 있었다. 덕만의 주름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덕만도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당신, 사느라 고생했네. ---「최고봉은 말했다」중에서 사장님, 보증금 백만 원은 다음 달에 내면 안 될까요? 큐 부동산 실장이 말했다. 한겨울에 아들을 포대기에 업고 기저귀 가방을 메고 달동네에 셋방 얻으러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깐깐하긴 하지만, 많은 집 중에서 그래도 내 집에 살려고 온 사람이라 고맙기도 했다. 그렇게 하세요. 추우니까 도시가스에 전화해 가스부터 열어 달라고 하세요. ---「고장 난 문짝」중에서 경찰이 최루탄을 쏘았다. 최루탄에 눈물 콧물 재채기가 쏟아졌다.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 끝에서 다시 큰길로 나오자 시위대가 보였다. 교련복을 입은 학생이 한쪽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손가락에 묻은 피가 가을 햇볕에 더욱 붉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가 잡고 있던 내 손을 슬그머니 놓았을까. 내가 그의 손을 놓쳤을까. (…) 그길로 연락이 끊겼고,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내 손안에 있던 소중한 것이 빠져나간 허전함에 며칠 동안 빈 손바닥을 쳐다보며 앓았다. 그 후로 나는 여간해서 누구와도 손을 잡지 않는다. ---「경호 오빠가 왔다」중에서 고엽제 후유증으로 약을 달고 사는 외삼촌이 근처 보훈 병원에 왔다 가는 모양이었다. 내가 어릴 적, 외삼촌은 월남전에서 베트콩을 수두룩하게 수확했다고 자랑했다. (…) 전쟁에서 사람을 죽여 훈장을 받은 외삼촌은 자신이 전쟁 영웅이라고 내게 주입시키려 했다. 나는 외삼촌이 사람을 죽인 인간 백정이라고, 평생 속죄하고 살아야 한다고 경멸했다. 외삼촌은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전쟁통에서 배운 건 커피라고 했다. 외삼촌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퉁을 받아들였다. ---「디케의 눈물」중에서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덕만은 매일 형의 무덤을 찾았다. 무덤가에 앉아 멀리 펼쳐진 논밭을 바라보거나 하늘을 쳐다보며 그냥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산벚꽃 꽃잎이 바람에 날아와 황토 무덤 위로 난분분 떨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앉아 있으면 상기가 언제 왔는지 곁에 앉아 있곤 했다. 가끔은 새 문제집을 들고 왔다. 이거 어려워서 못 풀겠더라, 형이 좀 풀어라, 덕만의 책가방에 넣곤 했다. 덕만이 문제집을 사 볼 형편이 안 되는 줄 알고 그랬을 것이다. 그때 모두 날 외면하는데 상기가 곁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더라고. ---「곁에 가만히 있어도 위로가 되는」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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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사람이 사는 집 같은,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 살아가는 자리가 소설이 되었다. 자식을 여럿 낳다 보면 잘난 자식도 있고 못난 자식도 있기 마련이다. 부모는 그중 못난 자식에게 손이 더 간다. 내 부족한 글도 손이 닳도록 쓰다 보면 더 좋은 자식으로 거듭날 것을 믿는다. 우보천리(牛步千里)라는 말이 있다. 조급할 것도 천천히 걷는다고 탓할 것도 없다. 묵묵히 내 보폭으로 걸을 뿐이다. 세 번째 책을 출간했다. 문순태 선생님, 채희윤 선생님, 정지아 선생님 그리고 광주대학교 이기호 교수님께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가는 길을 지켜봐 주신 분들이다. 책을 만들어 준 걷는사람 출판사에도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가족이 있기에 나는 행복하다. 2025년 겨울 첨단에서 성보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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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은 첨단 칸타타 빌라에 입주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다. 원룸 주인이며 화자인 나는 이 세입자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크고 작은 갈등 관계 속에서도 이해와 화해로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안아 준다. 가난하고 외로운 삶 속에서도 끈끈한 인간애를 보여 주는 것이다. - 문순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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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칸타타 빌라』는 건물주가 바라본 세입자들, 그러니까 소외된 계층의 이야기다. 죄의식 없이 공공 기관에서 심어 놓은 화초를 뽑아다 빌라 주변을 아름답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지 없는지 아리송한 경우 씨도, 야무지게 건물주 내외를 이용하지만 결국 약혼자에게 이용당하는, 약삭빠른지 어수룩한지 아리송한 강솔도 빌라의 세입자다. 아리송하기로 따지자면 세입자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지만 월세 받아 대출 이자 갚기도 빠듯한 건물주 순영이 최고봉이다. 아득바득 살아가는 똑순이인데 정작 야물지는 못해 돈도 마음도 결국 손해 보는 건 자신이니까. 사람 냄새가 그립다면 『첨단 칸타타 빌라』를 읽으시라. 거기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 살고 있을 테니. -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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