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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디 할머니
애 보기가 쉽다고? 공항에서 만난 사람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재이산(再離散) 해산바가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부처님 근처 도둑맞은 가난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
朴婉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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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생활은 조금씩 속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조금씩 조심스럽게 일정한 생활 밖의 어떤 지점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상하도록 흥분해서 슈퍼마켓 사층을 갈팡질팡하다가 갑자기 몽유병에 깨어난 것처럼 자신이 왜 거기 있는지 몰라 우두망찰을 할 적이 자주 있었다.
---「쥬디 할머니, 21쪽」중에서 행운이 자기 편이란 믿음 때문인지 맹범씨는 자기에게 돌아온 행운을 받아들일 때 과연 받을 만한가 아닌가 망설이거나 개인적인 행운과 그 시대와의 관계에 어렴풋이라도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 시대가 지난 지금도 그 시대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일이 없었다. 타인이 질문을 던지거나 의혹을 갖는 것도 싫었다. 그의 시각으론 마냥 같은 시대가 계속되는 걸로 보였고 따라서 그 시대를 반성하거나 정리해야 할 까닭은 추호도 없었다. 근데 딴 사람도 아닌, 그의 행운의 덕을 가장 많이 누린 식구들이 행운에서도 가장 꽃다운 데에다 그런 방자한 평가를 내리면서 즐거워하다니 울분이 목줄기를 뿌듯하게 했다. 그는 울분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견디기가 힘들었다. ---「애 보기가 쉽다고?, 42쪽」중에서 그녀가 그때 홀로 맹수였다면 우린 얼마든지 간에 붙었다 콩팥에 붙었다 할 수 있는 토끼나 다람쥐 나부랭이였다. ---「공항에서 만난 사람, 93쪽」중에서 굳이 이 두 노파를 한자리에 모시고 싶었음은 내가 발견한 노파들의 어떤 공통점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욕되도록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노파라든가 할머니라든가 하는 중성적인 호칭이 안 어울리는 강렬한 여자다움을 못 버렸었다. 여자라는 것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나는 차마 그들을 노파라고는, 할머니라고는 못하겠다. 여자라고밖에는.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130쪽」중에서 그는 전화 목소리가 그가 찾고 있는 가족이거나, 최소한 가족의 소식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려니 짐작하면서도 예상한 감동이나 기쁨은 일지 않았다. ---「재이산(再離散), 141쪽」중에서 “아들딸 가리지 말고 둘만 낳자가 둘도 많다로 변한 것도 몰라? 꼭 그대로 해야 된다는 법적 제약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요즈음 젊은 부부라면 의당 인구문제를 모른 척할 순 없는 거 아니니? 내버려둬. 그애들 자녀의 수는 그애들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게 내버려둬야지, 우리네 부모가 섣불리 나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해산바가지, 193쪽」중에서 저도 창환이를 잃기 전까지는 저절로 살아졌어요. 세월이 유수 같았죠. 한참 자라는 아이나 달력을 보지 않고서는 세월이 빠르다는 걸 느낄 겨를이나 어디 있었나요. 너무 빨라 거스르고 싶었나봐요. 젊어 보인다는 소리 듣는 게 제일 기분이 좋았으니까요. 지금은 아녜요. 젊어졌다는 소리도, 좋아졌다는 소리도 꼭 욕같이 들려요. 그렇다고 늙어 보인다거나 야위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도 아녜요. 그런 소리 들으면 내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힘들게 보내고 있다는 걸 들킨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아요.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나면 젊어졌다 좋아졌다, 아니면 어디 아팠느냐, 못쓰게 됐다는 식으로 남의 신체를 가지고 들먹이는 인사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252쪽」중에서 나는 어머니의 조용하지만 절실한 몸짓을 통해 이 두 죽음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심하게 우리의 일상을 훼방놓았던가를, 그 훼방으로부터 놓여나려는 간망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를 아프게 느꼈다. 그것은 소리없는 통곡이요, 몸짓 없는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나도 지금 정말은 아무렇지도 않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처님 근처, 284쪽」중에서 내 가난은 그게 어떤 가난이라고. 내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소명(召命)이다. ---「도둑맞은 가난, 327쪽」중에서 비로소 나는 내 아픔을 정직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결코 내 아픔을 정직하게 신음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 335쪽」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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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다시 울타리를 칠 수 있을 거야. 새로운 울타리를.”
생생히 살아 숨쉬는 독보적인 캐릭터의 향연 소설집의 시작을 여는 「쥬디 할머니」는 장성한 오 남매를 두고 혼자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쥬디 할머니의 안온하고도 평화로워 보이는 삶을 펼치다가 뜻밖의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독자를 데려가는 소설이다. 허를 찌르는 반전의 묘미로 이야기 그 자체의 재미를 선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허영적 욕망은 부정당해야 할 것이라기보다는 늘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하는 독특하고도 색다른 작품이다. 박완서의 단편소설 중 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새로이 읽히고 해석될 여지가 큰 수작으로 힘있게 권할 만하기에 이번 책의 표제작으로 삼았다. 이어 수록된 「애 보기가 쉽다고?」와 「공항에서 만난 사람」 역시 「쥬디 할머니」의 주인공 쥬디 할머니처럼 강렬한 캐릭터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애 보기가 쉽다고?」는 전직 국회의원으로 기품 있게 나이든 노인 맹범씨가 어느 날 손자를 돌보며 좌충우돌하게 되는 한 편의 블랙 코미디로, 우스꽝스러운 촌극 속에 당대 재개발 지역 빈민의 생활상을 얼핏 서늘하게 드러내며 박완서 특유의 날카로운 세태소설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공항에서 만난 사람」은 육이오전쟁중 미군 부대의 PX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욕쟁이 아주머니 무대소를 통해 전시하에 타국의 군인에게 핍박받았던 소시민의 울분 어린 삶을 특유의 생생한 활기로 전하는 작품이다. 무대소 아줌마가 미군에게 늘 도둑 취급당해온 일꾼들을 대신해 어떤 행동을 취하는 절정부의 한 장면은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이 소설 속 최고의 백미다. 「공항에서 만난 사람」과 같이 전시 상황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분위기는 사뭇 다른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은 한 지방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무명의 여성들, 그중에서도 노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남자 식구들이 전쟁에 나가 모두 사라진 세계에서 젊은 여성들을 대신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려는 노파, 그리고 홀몸이 된 상황에서 수치나 모멸 없이 젊은 군인에게 욕망을 드러내는 또다른 노파의 모습을 데칼코마니처럼 쌍으로 병치시키는 형식으로 충격을 안기는 도발적인 이야기로, 여성주의 문학으로도 일컬어지는 박완서 소설의 선구적인 면모를 확인하게 한다. 이 두 노파를 한자리에 모시고 싶었음은 내가 발견한 노파들의 어떤 공통점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욕되도록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노파라든가 할머니라든가 하는 중성적인 호칭이 안 어울리는 강렬한 여자다움을 못 버렸었다. 여자라는 것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나는 차마 그들을 노파라고는, 할머니라고는 못하겠다. 여자라고밖에는. _「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130쪽 “이제부터 울고 싶을 때 울면서 살 거예요.” 시대의 억압을 넘어 개인의 실존을 드높인 기념비적인 문제작들 앞선 박완서의 단편들이 한 번 읽으면 잊을 수 없는 개성 강한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라면, 당대 사회문제를 과감히 다루며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인물의 울분과 아픔을 표현해낸 것 또한 박완서 단편소설의 뛰어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남북 분단 이후 이어져온 이산가족 상봉을 소재로 하는 「재이산(再離散)」은 보통의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가족 상봉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남처럼 떨어져 산 혈연가족 간의 계급 차와 그로 인한 차가운 몰이해를 신랄하게 그려내, 사회문제인 동시에 가족문제인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소재를 인간의 수치심과 자존감, 그리고 분노와 같은 실존적 차원의 문제로 끌어올린 문제작이다. 한편,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생기는 유구한 고부 갈등 문제를 다룬 「해산바가지」는 시어머니인 친구와 아들을 낳지 못한 친구의 며느리 간 긴장된 상황을 지켜보던 ‘나’가 한세월을 함께하고 돌아가신 자신의 시어머니를 떠올리는 이야기로, 가족문제를 넘어 한 인간이라는 존재를 깊은 그리움과 애끓는 연민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운동권 열사로 활동한 아들의 죽음이 “시대의 횃불”(246쪽)로 불림으로써 정작 어느 곳에도 참척의 고통을 제대로 표하지 못한 어머니의 통곡 어린 슬픔을 ‘전화통화’라는 내밀한 형식으로 들려주는 소설이다. 자식의 죽음이라는 형용키 어려운 비참한 마음의 심연을 박완서 고유의 절절한 입말로 살려내, 지금도 널리 읽히며 회자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형님, 우리가 참 모진 세상도 살아냈다 싶어요. 어찌 그리 모진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형님, 그나저나 그 모진 세상을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_「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225쪽 반세기를 넘어 거듭해 읽히는 불후의 명작을 만나다 책의 말미에 놓인 「부처님 근처」 「도둑맞은 가난」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세 편은 박완서의 초기작들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50여 년 전인 1970년대 초에 발표된 소설이다. 데뷔한 지 삼 년여밖에 안 된, 당시로서는 신인의 위치였던 작가의 초기작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 활발히 활동중인 한국 대표 소설가들에게 최고의 소설로 뽑혔다는 건 지금 읽어도 이 작품들이 유의미하다는 증거 그 자체이리라. 「부처님 근처」는 오래전 전쟁통에 사망한 아버지와 오빠의 기일을 앞두고 재수불공을 드리러 절을 찾은 ‘나’와 어머니 두 사람의 이야기로, 전쟁의 이데올로기 아래 스러진 가족의 죽음으로 일상이 파괴된 후에도 “앙큼하고 태연하게”(286쪽)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모녀의 처절한 사연을 치열하고도 솔직하게 써나감으로써 문학의 언어로 할 수 있는 죽음의 애도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도둑맞은 가난」은 ‘박완서’라는 이름 옆에 늘 함께 따라오는, 제목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 된 작품이다. 한국 대표 소설가들에게 가장 많은 추천을 받으며 다시 한번 그 저력을 입증해 보이기도 했다. 가족의 죽음으로 혼자 남은 젊은 여성 ‘나’가 도금 공장을 다니는 또래 남성 상훈과 동거생활을 하는 모습이 언뜻 가난한 젊은 커플의 청춘소설처럼 전개되던 이야기 끝에 서슬 퍼런 반전을 도사린 이 소설은 부자와 빈자 간 건널 수 없는 몰이해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자가 가난조차 앗아가 취한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상황을 묘파해낸다. 일찍이 가난이란 “냄새”(308쪽)임을 간파한 작가의 예리한 시선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선으로 나뉜 계층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을 여실히 펼치며 앞으로도 오래도록 회자될 불후의 명작임을 증명한다. 마지막 작품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는 이번 수록작들 중에서 가장 초기인 1972년에 발표된 단편으로, 장애가 있는 중학생 딸 설희를 키우는 이웃집 여성 설희 엄마, 그녀와 동년배인 ‘나’ 사이에서 싹튼 우정을 그린다. 조금의 동정과 연민도 필요로 하지 않는 설희 엄마를 통해 실은 ‘나’에게도 남에겐 말 못할 불행의 아픔이 있었음이 밝혀지는 후반부의 이야기는 ‘무거운 틀니’로 상징되는 세상살이의 고통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울타리”(30쪽)를 칠 거라고 말하는 ‘쥬디 할머니’가 등장하는 첫 작품 「쥬디 할머니」와 수미상관으로 읽었을 때 그 의미가 더욱 의미심장해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처럼 『쥬디 할머니』는 새 마음으로 맞이하는 새해, 과거를 디딤돌 삼아 환한 미래로 나아가게 할 소중한 이정표가 되어주는 책이다. 비로소 나는 내 아픔을 정직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결코 내 아픔을 정직하게 신음하지는 않을 것이다. _「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35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