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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하 시집 너를 알기엔 여름이 너무 짧다
시인의 말 목차 1부 - 시간의 옆모습 보리처럼 살아내기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 뒤엉킨 마음 혹독한 여름 국보급인데 아무도 몰라요 비멍 기억은 달린다 올랑가 모르것다 웃음이 눈처럼 내려오면 사랑은 아랫목에 산다 구름 공장 감꽃 진다고 슬퍼할까 시간 속으로 2부 - 사람은 사람 안에 머문다 은행나무 씨의 편지 너란 꽃 당신도 바람이 되어 단디로 무장한 오늘 봄의 음표 당신이라는 신기루를 오래 품었다 뒤늦은 고백 치통처럼 오래 가는 감정 불편한 하루 정리법 인연꽃 바람이 말을 거는 섬 빙삭이 웃으멍 옵서게 잘 도착하셨지요 수애기 출몰지역 모슬포항 오월의 향기 -103호 님에게 하나 되는 두 사람 금귤 기다림의 무게 그림이 된 풍경 3부 - 내가 닿은 계절 앉은 불꽃 나를 향해 놓은 다리 차꽃 피는 늦가을 삶이 여물어 가다 결국 꽃길에서 만난다 겨울, 허물 벗다 너를 알기엔 여름이 짧다 버리고도 남은 마음 구름고개 꽃 마중 검은 줄 민달팽이 감정의 유통기한 내게 쓴 편지 그대 이름 숨 고르기 수양버들처럼 마음에 난 낯선 길 바다가 내게 벚꽃 아래서 4부 - 시간의 空에 서다 남해 적소에서 긴 꿈을 깨다 -노도를 다녀와서 그 석각엔 아직도 흐른다 흔들려도 건너는 중입니다 -통도사 극락전에서 죽비 소리 술대를 잡다 푸른 목소리 상림, 기억의 숲 그날 밤 함성 사라진 새해 하늘도 감춘 깊이 무언의 응답 불안은 나를 안고 잠든다 거듭나기 함벽루, 시가 앉은 곳 너도 빛나는 별 마음에 만든 동화의 숲 싱크홀을 품은 일상 노전암 오르는 길 해설/‘단디’ 살아가기의 문학적 형상화-정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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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 그치면
눈바람 견딘 보리밭이 고양이처럼 쭈욱 기지개 켜겠다 추위를 외투처럼 걸치고 한 줄로 늘어서 힘주어 밟으면 단단한 뿌리 내리는 보리싹의 숨가쁜 소리 들린다 밟히면 죽는 줄 알았던 서릿발에 들뜬 보리 뿌리 밟을수록 더 단단해지는 들판의 푸른 꿈 겨울을 견딘 보리싹처럼 오늘을 밟고 내일을 키우는 꿈 그 꿈도 밟을수록 단단해지는 시간의 그림자 위에 돋아난 보리밟기 --- 「보리처럼 살아내기」 중에서 빗소리에 귀 맡겨보면소란한 마음 저절로 숙여져 두 손이 모아지는 시간 풀잎에 앉은 비의 눈망울로 수정 염주 만들어 너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 작은 우주 속에 갇혀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처럼 오롯이 네게만 집중하는 시간 너는 말이 없고 나는 말이 많아 서로 외면하던 눈빛 서로의 등에 얹힌 무게로 걸어야 하는 지금 다시 시작하는 그것이 삶이다 --- 「비멍」 중에서 싸한 아침 공기 새파란 하늘에 온몸으로 펄럭이던 만국기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이 쉬도록 질러대던 국민학교 운동회날 응원군은 하늘거리며 핀 코스모스 이날은 외가와 친가 오랜만에 둘러앉은 점심시간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다 운동회의 꽃이라는 계주 온몸에 함성을 받으며 달리는 외사촌의 다리에 수백 개의 눈동자가 별처럼 박히는데 운동회가 끝나면 공책 몇 권 수줍게 내밀던 손 기쁨과 슬픔이 널뛰기를 했다 그녀는 지금 내 곁에 없지만 --- 「기억은 달린다」 중에서 겨울 들머리 낡은 장판 걷어내고 새 장판 위에 콩기름을 결리게*하면 반질반질해지던 장판 바람은 창호지 문을 사정없이 흔들어도 불꽃 없이도 쩔쩔 끓어오르던 아랫목 지아비를 기다리던 따뜻한 사랑 담요 아래 놋그릇에 담긴 밥그릇 오매불망 주인만을 기다렸다 언 손 쑤욱 이불 속에 넣다가 봉분 같은 밥그릇 툭 무너지면 주르륵 눈물을 쏟았다 말씀 대신 헛기침으로 문 당기시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담요 아래서 기다리던 지어미의 정성 *기름 따위를 흠씬 배게 하다. --- 「사랑은 아랫목에 산다」 중에서 집안일 시킬 때마다 어린 내게 어머니가 하신 당부 말씀 단디 해라이 찬바람이 쌩쌩 휘파람 불 때도 옷 단디 입어라 등굣길 사립문 나설 때마다 내게 하신 말씀 단디 해라이 졸업 후 먼 길 나설 때 등 뒤에서 아버지가 하신 말씀 소문은 발이 없어도 천 리를 간다 매사에 단디 해라 아직도 내 속에 살아 숨 쉬는 부모님 목소리 단디 해라 단디 --- 「단디로 무장한 오늘」 중에서 앞뜰 흙덩이가 소란스럽다 침묵의 한겨울을 참았던 봄 한 줌 햇살이 등을 두드리자 힘껏 기지개를 켠다 빛과 어둠 사이를 배밀이 하던 흥겨운 봄빛 산자락을 타고 올라와 한 뼘씩 연둣빛 자리를 넓혀간다 그 빛에 빼앗긴 하루가 슬몃슬몃 고개 들며 가지 끝마다 울음보 하나씩 매달아 두었을 때 그 울음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땅속 오랜 기다림에서 이 숲 저 숲 옮겨 다니며 여름을 뜨겁게 노래하다 수의 한 벌 남기고 간 너 --- 「너를 알기엔 여름이 짧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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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아침 햇살 같은 저녁 노을빛 같은 문장을 온몸으로 모시고 싶었다. 그러나 그 길은 아직 멀다. 익지 않은 풋감을 짓이겨 감물을 들이거나 장아찌를 담거나 식초를 담거나 울켜서 드시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2025년 여름 정은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