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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화엄 성지, 화엄사
그윽한 노송 숲에 둘러싸여 독특하고도 경건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천년 고찰, 화엄사는 신라 불교의 중심 사상인 화엄의 근본 도량이다. 또한 건물 전체가 국보로 지정될 만큼 우아하고 당당한 바는 어떤 사찰도 따르지 못한다. 예부터 신선들이 모여 사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던 지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사찰은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불교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이후부터이다.
80권의 『화엄경』을 사경(寫經)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던 연기조사와 그를 기리기 위해 자장율사가 세운 4사자3층석탑 그리고 의상대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3층의 장륙전을 건립하고 사방 벽면에 둘렀다고 하는 화엄석경 등 일련의 불사로 인해 화엄사는 대도량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9세기에는 다양한 조각과 전통적인 형태의 서로 대비되는 동서 5층석탑을 세웠고, 의상의 화엄을 주축으로 하면서도 기신론과의 조화를 꾀하는 등 포용적인 관점을 지향하며 독창적인 면모를 이루어 왔다. 이렇듯 가람의 규모를 다지면서 화엄사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는데, 신라에서 고려에 걸쳐 이름을 드날린 이로는 도선국사, 낭원(朗圓), 선각(先覺), 통진(洞眞)대사 등이 있다. 화엄사의 이름난 사상과 조형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계속되었는데, 이곳 화엄사에서 출가하여 당대 불교계를 지도하던 대각국사 의천은 이곳을 순례하면서 연기조사를 기리는 시를 읊기도 하였으며, 전적(典籍)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화엄사는 조선 초 전국의 사원을 선교 양종 36사로 정리할 때에도 전라도 선종을 대표하는 두 사원 가운데 하나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화엄사의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의승군에 참여하여 나라를 지켜냈으며, 벽암(碧巖)대사는 대웅전을 비롯한 화엄사의 중창에 힘썼다. 그뒤 계파선사가 장륙전(각황전)을 건립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가람 배치가 형성되었다. 이렇듯 화엄사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큰 스님들이 머무르면서 화엄종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아 왔으며, 화엄사상 구현에 힘써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