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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청조 말기와 민국 시기의 영화(1896-1949)
중국 전통예술과 서구 식민정책 사이의 영화(1896-1949) 국가 자치와 사회정의의 꿈(1921-1931) 투쟁의 호소(1932-1949) 2. II.마오쩌둥 시대의 영화(1942-1978) 지하에서 지상으로(1942-1948) 국가예술로서의 영화(1949-1956) 선전정책에 기여한 영화(1956-1964) 문화혁명(194-1978) 3. III.덩샤오핑 시대의 영화(1978-1996) 재건과 개혁(1978-1984) 예술과 상업(1984-1989) 천안문 사건과 영화의 대응(1989-1996) 4. IV.국제적 인정:1980년대와 1990년대의 아방가르드영화 과거극복과 문화비평:제5세대 도시리얼리즘:제6세대 5. V.타이완과 홍콩의 영화 타이완 영화 홍콩 영화 6. VI.부록 영화모록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인명 대조표 찾아보기 |
국민당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장이머우(張藝謀, 1951∼)는 어려서부터 공산주의 사회에서 차별을 받으며 자랐다. 문화혁명(1966)이 시작되자 그는 고향 시안(西安)에서 산시(陜西) 성의 한 농촌으로 하방되었으며 부모가 반혁명분자로 체포된 뒤에는 두 어린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섬유공장에서 일했다. 공장에 다닐 때 카메라와 가까워진 그는 1978년 베이징 영화학교 촬영과에 들어갔다. 1982년 학교를 마친 뒤 난닝(南寧)의 광시영화촬영소에 취직하고 「하나와 여덟」(一個和八個, 1984, 감독: 장쥔자오) 제작에 참여했다.
그는 인상적인 촬영기술을 선보임으로써 이 실험영화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1년 뒤 「황토지」와 「대열병」에서 천카이거와 공동작업을 하면서 그는 새로운 영화언어에 눈을 떴다. 비록 「대열병」을 끝으로 이후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시안영화촬영소에 배속되었다. 장이머우는 이곳에서 우톈밍 감독의 「오래된 우물」의 주연을 맡아, 1987년 도쿄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p. |
<홍등>을 발표한 지 1년 만에 장이머우 감독은 <귀주이야기>라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과거극복이라는 테마를 다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인위적이며 매우 도식화된 우화로 묘사하던 연출기법에서 탈피했다. 장이머우는 자연주의적 서술기법을 사용함으로써 현재 중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직설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그는 중국 사회의 실생활과 법 사이의 비극적 이율배반을 그리고 있다.
이 테마는 이미 독일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극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정직한 말장사꾼의 이야기'를 토대로 쓴 <미하엘 콜하스>에서 다루었던 테마와 유사하다. 말장사꾼 콜하스는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생각하자 폭력적인 방법으로 권리를 되찾으려 한다. 하지만 결국 평화 교란범이자 살인범이 되어 희생당하고 만다. 미하엘 콜하스의 역할을 - 물론 훨씬 덜 급진적이고 덜 비극적이긴 하지만 - <귀주이야기>에서는 고추를 재배하는 중국 북부의 아낙 추쥐가 떠맡는다. 그녀는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위협적인 전통이나 인습과 과감이 맞서 싸운다. 그녀는 콜하스와 마찬가지로 결국 자신의 권리를 되찾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승리'에 대해 참된 기쁨을 느낄 수 없다. 순박한 시골 아낙의 입장에서 법을 바라보던 추쥐는 법의 실질적 결과 앞에 속수무책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장이머우는 타파해야 할 현실과 법 사이의 이율배반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율배반을 모순된 사회변화의 부산물로 이야기한 것이다. ---pp.253~254 |
<홍등>을 발표한 지 1년 만에 장이머우 감독은 <귀주이야기>라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과거극복이라는 테마를 다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인위적이며 매우 도식화된 우화로 묘사하던 연출기법에서 탈피했다. 장이머우는 자연주의적 서술기법을 사용함으로써 현재 중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직설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그는 중국 사회의 실생활과 법 사이의 비극적 이율배반을 그리고 있다.
이 테마는 이미 독일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극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정직한 말장사꾼의 이야기'를 토대로 쓴 <미하엘 콜하스>에서 다루었던 테마와 유사하다. 말장사꾼 콜하스는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생각하자 폭력적인 방법으로 권리를 되찾으려 한다. 하지만 결국 평화 교란범이자 살인범이 되어 희생당하고 만다. 미하엘 콜하스의 역할을 - 물론 훨씬 덜 급진적이고 덜 비극적이긴 하지만 - <귀주이야기>에서는 고추를 재배하는 중국 북부의 아낙 추쥐가 떠맡는다. 그녀는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위협적인 전통이나 인습과 과감이 맞서 싸운다. 그녀는 콜하스와 마찬가지로 결국 자신의 권리를 되찾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승리'에 대해 참된 기쁨을 느낄 수 없다. 순박한 시골 아낙의 입장에서 법을 바라보던 추쥐는 법의 실질적 결과 앞에 속수무책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장이머우는 타파해야 할 현실과 법 사이의 이율배반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율배반을 모순된 사회변화의 부산물로 이야기한 것이다. ---pp.253~254 |
정치문화사적 관점에서 조명한 중국영화사
이 책은 청말의 초기 영화에서부터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아방가르드 영화에 이르기까지 중국 영화의 발전과정을 정치사회적 상황과 연관지어 폭넓게 조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과 홍콩의 영화까지 두루 다루고 있는 완전한 ‘중국’영화사이다.
중국 영화 청나라가 쇠망의 길로 접어든 19세기 말, 영화는 제국주의 열강의 문화로서 중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후 중국인이 제작한 최초의 영화는 1905년에 만들어진 「딩쥔산」(定軍山)이다. 이 영화는 그저 경극 「딩쥔산」의 몇 장면을 필름에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 단순한 최초의 시도는 중국인이 영화를 새로운 매체가 아니라 단지 전통 무대극을 그대로 재현하는 도구 정도로 인식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상당 기간 동안 중국의 영화는 전통 무대극이나 연극의 하위 장르로 머물러 있으면서 독립된 새로운 예술 장르로 인식되지 못했다. 중국의 지식인들이 본격적으로 영화의 대중매체로서의 고유한 특징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5·4운동 이후부터이다. 영화는 진보적인 좌익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중국사회의 현실을 다루면서 1930년대에는 상하이 영화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 장제스의 좌익운동 탄압과 일본의 침략으로 상하이 영화계는 완전히 파괴된다. 1937년에서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 중국에서 영화는 일본이 만주나 베이징에서 제작한 선전영화와 좌익 활동가들이 지하에서 은밀히 제작한 극소수의 항일 정치선전영화가 전부였다. 그리고 상하이 영화계의 일군의 영화인들은 공산당 지배지역인 옌안으로 들어가 1942년 마오쩌둥의 ‘옌안 문예강화’를 발표하고 ‘정풍운동’을 일으킨다. 여기에 자극받은 일부 영화인들은 마오쩌둥 노선에 충실한 영화제작을 목적으로 ‘옌안영화단’을 결성한다. 이후 이 교조적인 옌안 영화단의 전통은 5·4운동의 정신을 중시하는 상하이 영화의 전통과 함께 중국영화의 두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지은이는 전자를 ‘옌안 도그마’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1949년 내전에서 승리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중국공산당은 영화의 대중적 선전기능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 영화를 국가의 공식예술로 삼았다. 그러나 많은 영화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인민공하국의 예술정책은 점점 경직되어 갔다. 반우파투쟁, 백화운동, 대약진운동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대중운동의 광풍 속에서 자유롭고 진보적인 상하이 영화의 전통은 사라지고 ‘옌안 도그마’는 더욱 획일화된 공산주의 영웅영화만을 만들어 냈다. ‘옌안도그마’의 목적은 옌안 영화단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샤옌(夏衍)의 “영화는 인민교육의 도구이며, 영화제작자는 특정계급에 봉사하여야 한다.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관계없이”라는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문화혁명(1964∼1978)은 이런 옌안 전통이 극단으로 치달은 시대였다. 당시의 문화정책을 좌우한 마오쩌둥의 처 장칭(江靑)과 사인방은 이른바 ‘혁명모범극’을 본뜬 영화만을 제작하도록 했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1978년 덩샤오핑의 집권으로 중국은 서서히 변화를 맞기 시작한다. 덩샤오핑은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3중전회에서 탈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계급투쟁 노선을 실용적 현대화 정책으로 바꿀 것임을 밝혔다. 이와 함께 중국의 영화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같은 해 문화혁명 동안 폐쇄되었던 중국 유일의 영화 전문인력 양성기관인 베이징영화학교가 4년제 대학(과거에는 2년제였다)으로 승격되어 다시 문을 열었다. 다시 문을 연 베이징영화학교의 첫번째 입학생들이 뒷날 중국영화의 제5세대를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개혁에 불과했다. 1989년 6월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천안문 광장의 시위를 중국정부가 유혈 진압하면서 덩샤오핑의 한계를 드러냈던 것이다. 그와 함께 당국은 영화에 대한 검열과 영화인에 대한 제재를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타이완 영화 중국 본토의 영화가 서구와 미국의 주도로 들어온 반면 타이완 영화는 철저하게 일본의 식민지 영화로 시작되었다. 1923년에 타이완인이 만든 최초의 영화 「무정한 하늘」이 완성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스태프는 일본인이었고 그 내용도 일본의 식민통치를 선전하는 것이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타이완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이 상황은 1949년 본토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으로 건너온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국민당 정부는 중국공산당 못지않게 엄격한 검열을 실시했다. 영화를 마오쩌둥에 대항하는선전도구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는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거나 국민들의 정치의식을 잠재울 수 있는 수준 이하의 애정영화나 무협영화, 또는 반공 전쟁영화가 전부였다. 1960년대 들어 점차 경제 여건이 호전되면서 영화미학적으로 가치 있는 몇몇 작품, 예컨대 리한샹(李翰祥)의 「량산보와 주잉타이」(1963)나 후진취안(胡金銓/King Hu)의 「용문의 결투」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자유로운 창작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결국 한때 동남아시아 영화시장을 주름잡던 타이완 영화산업은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퇴보를 거듭하고 할리우드 영화가 타이완 영화시장을 장악하게 되었다. 홍콩 영화 홍콩의 영화 역사는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시작되었다. 1896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촬영팀이 홍콩에서 처음 영화를 상영했다고 하며 1920년대 초에는 홍콩 최초의 극장이 문을 열었다. 홍콩에서 제작된 최초의 영화는 1909년 미국인 벤저민 브로드스키가 설립한 아시아 영화사에서 제작한 두 편의 단편영화이며, 홍콩이 중국 영화의 중심지 상하이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영화시장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21년부터이다. 비록 1940년대 후반까지 상하이 영화와 광저우 영화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긴 했지만 1930년대 이후 본토의 정치변화가 극심해지면서 홍콩은 수많은 영화인들의 피난처가 되면서 홍콩 영화는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1931년 유성영화가 소개되자 전통주의 성향이 강한 광둥 성 출신 영화인들은 광둥어 영화를 하나의 장르로 확립했는데, 장제스가 광저우에서도 베이징 표준어로 된 작품만 상영을 허가하자 많은 광저우 영화인들은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940년대 말에는 더 많은 광저우 영화인들이 이윤을 쫓아 자본주의 홍콩을 선택했다. 이들이 만든 광둥어 영화들은 오늘날의 홍콩영화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오늘날에도 많은 홍콩 배우들은 베이징 표준어를 할 줄 모른다. 「비정성시」의 남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홍콩 배우 량자오웨이[梁朝偉/Tony Liang]가 베이징 표준어를 할 줄 몰라 허우샤오셴 감독이 주인공을 벙어리로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더구나 해외의 화교들 중에는 광둥어를 쓰는 광둥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광둥어 영화는 중국 영화나 타이완 영화보다 먼저 국제적인 감각을 갖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