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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2. 역사에 대하여 3. 계급에 대하여 4. 문학에 대하여 5. 교통에 관하여 6. 장소에 대한 세 개의 장 |
Kojin Karatani,からたに こうじん,柄谷 行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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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서로 다른 물건이 등가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는 '실천적인 욕망을 위한 인위적 조치'에 불과하고, 거기에는 그것에 의해 가늠되어야 할 '공통의 실체'가 없다. 그것에 대해 국민경제학자는 '공통의 실체'를 거기에 포함된 인간노동으로서 찾아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가 살았던 사회가 노예노동에 기초했지 동등한 노동이라는 것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일견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왜 고전경제학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던 것일까? '노동생산물은 그것들이 가치인 한 그 생산에 지출된 인간노동의 단순한 물상적 표현이라는 후대의 과학적 발견은 인류의 발달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지만, 그러나 결코 노동의 사회적 성격의 대상적 가상을 쫓아 버리지는 못했다.' 결국 가치의 동일성을 인간과 인간노동력의 동일성에서 구하는 것은 동어반복이고, 어떤 문제의 해결도 될 수 없다. 도대체 이질적인 것이 동일한 까닭은 무엇인지 묻고 있는데도, 이질적인 것은 동일하다고만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인간의 평등'이라는 사상이 뒤섞여 있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그 사상 자체가 '등가성'에 뿌리 박고 있기 때문에 이질적인 것이 왜 어떻게 등가형태를 취하는가라는 중요한 문제를 간과해 버리고 동어반복을 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 pp.46-47 |
일본의 대형서점에 가면 가라타니 고진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그는 폭넓은 독자를 보유하고 있고 많은 책을 썼다. 그가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대중소설가도 시오노 나나미 같은 역사이야기꾼도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많은 저작 중에서도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이자 초판이 출판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다.
이 책이 그토록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는 일본적 상황이다. 이 책은 1970년대 일본에서 신좌익운동이 극적으로 붕괴하면서 마르크스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려던 시기에, 식상할 대로 식상한 기존의 마르크스 해석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각으로 일본사회에 지적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때의 충격은 1980년대로 이어져 그 당시 일본의 대학생이라면 이 책을 안 읽은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또 하나는 세계사적 상황이다. 지난 1세기 반 동안 사회주의 바람은 나라마다 시기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역사의 진보를 가져온다고 믿어지면서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던 지난 1989년 동구권과 소련이 몰락하자 마르크스는 우상의 대상에서 끌려 내려왔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이 역사의 경험은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 책은 1990년 이후에 또다시 지식인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가라타니 고진은 벌써 이 책에서 마르크스 이해를 좌우하던 기존의 지배적인 중심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중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제서야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까? 그 까닭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과 크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몇 십년 동안의 군사독재체제는 제쳐두더라도 사실 우리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 사회변혁 속에서 엄청난 지적 열병을 앓았다. 그러나 우리가 앓았던 열병의 원인은 엄밀히 말해서 마르크스가 아니라 철저하게 도그마화된 마르크스주의였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마르크스 자체를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 나아가 자본주의가 왜 종말을 고하지 않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단정하는 것에 의해서 회의하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많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모든 고정관념(외형)이나 과거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마르크스의 텍스트(주로 『자본론』) 속에서 마르크스를 읽는다. 그가 기대고 있는 방법은 구조주의적인 언어분석이다. 물론 이런 방법은 가라타니 고진이 창안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 방법을 응용하여 나름대로 치밀한 독해를 통해 『자본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가치형태론에서 '이제까지 사유하지 않은 것'을 읽는다. 어떤 작품이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 책의 저자가 의식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체계 자체에서 뭔가 그가 지배하고 있지 않은 체계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책에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말고도 세 편의 문예비평과 보론 두 편이 실려 있다. 모두 문학비평에 속하는 글로서 직접 마르크스를 다룬 것은 아니다. 하나는 다케다 다이준의 부고를 듣고 쓴 <역사에 대하여>이고, 두 편은 <나쓰메 소세키론 I, II>라는 제목이 붙은 '계급에 대하여' '문학에 대하여'이다. 그러나 이들 비평을 읽다 보면 가라타니 고진의 사유체계가 바로 마르크스 독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 마르크스를 이렇게 읽을 수도 있구나라고. 어쩌면 독자들에게 1부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보다 2부 이하의 글들이 훨씬 재미있게 읽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를 통해 마르크스를 해석하고 그 해석의 바탕 위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이야기하고 사상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마르크스의 잔영조차 다른 글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은 그에게 마르크스는 하나의 담론으로서만 존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