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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8
머리말 9 서문 11 1. 마르코 폴로의 세계 23 2. 가톨릭의 세기 43 3. 현실주의자들의 항해 67 4. 의도적인 허구 91 5. 계몽운동의 문제들 115 6. 여성 관찰자들 137 7. 미국 속의 중국 163 8. 프랑스의 이국 정서 189 9. 미국의 이국 정서? 213 10. 급진적인 환상들 241 11. 권력의 신비 263 12.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천재들 287 지은이 주 309 출전 331 옮긴이의 덧붙임 335 찾아보기 339 |
Jonathan D. Sp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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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혜숙 ruru100@yes24.com
각주만 해도 몇 십 페이지를 훌쩍 뛰어넘는 이 책은 생경한 이름자에 낯선 작품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어 일반 독자가 부담 없이 읽기에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다. 그러나 꼼꼼히, 천천히 읽어 나간다면 중국에 대한 다양한 논문과 해석을 통해 꽤 많은 지식을 배울 수 있는 독특한 책이기도 하다.
『칸의 제국』은 미국의 중국사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이며 예일대 역사학과의 석좌교수이기도 한 스펜서가 스승인 윌리엄 K.드베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개설한 강좌의 수업노트를 바탕으로 엮어졌다. 따라서 꾸준히 책을 읽어 나가노라면 마치 새로운 시각의 중국학을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물론 중국이라는 소재를 빌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서양인의 마음속에 비친 중국'이란 부제에서 보여지듯 이 책은 지난 700여 년 간 중국을 접했던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그들이 바라본 중국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 나간다. 서양인들에게 신비와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중국. 저자는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전부터 20세기의 대표적 작가 카프카, 보르헤스, 칼비노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50여 명의 인물이 바라본 중국일람들을 살피며 그것들이 중국의 실체에 대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글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속에 담긴 중국에 대한 이미지라고 밝힌다. 그들은 중국 풍물에 대해 처음부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호기심을 만족시킬 만한 증거들을 찾았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비롯한 다양한 중국일람들은 그러한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그들만의 중국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스펜서는 동양에 대한 최초의 서양탐방기로 알려진 『동방견문록』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 담겨있는 중국에 대한 설명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마르코 폴로의 책은 중국 생활을 여실히 묘사하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그가 태어난 도시에 대해 비평할 목적으로 저술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유언장에도 명시되어 있듯 마르코 폴로는 세 딸의 아버지였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딸들을 최대한 잘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딸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바람직한 도덕적 기풍을 지닌 중국을 묘사하려는 동기를 더욱 부추긴 것은 아닐까? 1315년에 쓴 필사본에 따르면 마르코 폴로는 중국 여성들이 전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으면서도 중국 여성들의 성격과 품행에 대해 장황하게 묘사했다. "여러분은 카타이 지방 처녀들이 누구보다 순수하며 정숙한 몸가짐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뛰어다니거나 춤추지도 않으며 까불어 대거나 성을 내지도 않는다. ...뜬소문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축제나 잔치에 자주 가지도 않는다. ....집에 있을 때는 언제나 자기 방에 들어앉아서 제 일을 열심히 하고, 아버지나 오라비나 집안의 손윗사람 앞에 모습을 보이는 일도 드물다. 구혼자들이 찾아와도 그들에게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이게 정말 중국일까? 이것은 여행자 마르코 폴로가 아니라 십대의 세 딸을 둔 늙은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처럼 스펜서는 사료의 원작자가 처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중국이 서양인의 눈에 어떻게 굴절되었는가를 찬찬히 설명해 나간다. 스펜서는 서구인들의 중국탐험 방식을 'SIGHTING'이라고 말하는데, 이 단어는 항해와 탐험의 용어로 '관측', 사격의 '조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그들이 바라보는 중국에 대해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포착하여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칸' 역시 13세기 중국의 통치자를 일컫는 말로써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서양인들의 호기심을 빗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중국의 역사와 문명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인간심리가 낳은 오해와 편견에 대한 역사서인지도 모른다. 결국 이 책을 풀어나가는 열쇠이자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한 저자의 탐색과정은 칼비노의 소설에 등장하는 마르코 폴로의 목소리를 통해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아무리 말해도 듣는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밖에는 머리에 담아 두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자비롭게 경청해 주신 세상 이야기, 제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 우리 집 바깥 거리에서 부두 노동자와 곤돌라 사공들 사이에 퍼질 이야기, 그리고 제가 말년에 제노바 해적의 포로가 되어 어느 모험소설 작가와 같은 감방에 갇히게 되면 구술할지도 모르는 이야기, 이 세 가지는 모두 별개입니다.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귀랍니다." |
제인 에드킨스는 중국 체류에 대한 도덕적 회의감을 대부분의 남성 관찰자들보다 솔직하게 표현했다. 그녀는 우연히 들은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미국 선교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국의 노예제도에 호의적이다. 게다가 내가 알고 있는 한 부인도 노예 소유주다. 참으로 서글픈 노릇이다. 무서운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끝없는 기도와 설교를 듣는 동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종교란 꼭 입술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내 생각은 과연 옳은 것일까?" 그녀는 중국어 공부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쏟기 시작했다. 중국어는 어려웠지만, 그녀는 "중국어에 대한 사랑인 나날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주변을 온통 휩쓴 태평천국의 난에 대해서는 이렇게 언급했다. "지금처럼 세상이 어지럽지 않다면, 그리고 내가 고독을 좀더 잘 견딜 수 있다면, 내륙지방으로 들어가 중국인과 철저히 어울리고 싶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중국어를 제대로 익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그녀와 남편은 반군이 난징에 세운 '천경'에서 도망쳐 나온 난민들에게 설교하고, 서양 상인들한테 난민 구호금을 모금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p. 149 |
서양인의 마음속에 비친 중국
남편과 함께 1859년 상하이(上海)에 도착한 20세의 스코틀랜드 여성 제인 에드킨스는 그해 9월 들뜬 마음으로 고향의 어머니한테 우쑹(吳淞) 강을 유람한 감상을 적어 보냈다. 양쪽에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휜 가지를 맑은 물 속에 드리우고 있었다. 황금빛 옥수수가 물결치는 수많은 밭이 강에서 멀리까지 뻗어 있고,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산뜻한 농가들이 엿보였다. 우리는 꽃이 만발한 덩굴식물로 초록빛을 띤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로 다가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초록빛 언덕마루에 오래된 탑이 하나 서 있었다. 모서리와 돌출부가 수없이 많고 가장자리에 청동과 놋쇠를 두른 그 탑은 아침 햇살을 받아 맑은 날씨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자신이 본 그대로를 묘사했다. 그러나 그녀가 묘사한 장면은 18세기 이후 유럽에서 널리 퍼진 벽지와 도자기와 정교한 무늬를 새긴 상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안과 거의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장면은 오늘날 서양의 실내장식물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조너선 스펜스의 『칸의 제국: 서양인의 마음속에 비친 중국』은 이런 ‘일람’(sightings)의 역사이다.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출판된 이후 서양인들은 끊임없이 중국에 매료당했고 때로는 이상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기도 했는데, 이 책은 지난 700년 동안 중국을 접한 무수히 많은 서양인들―선교사, 군인 무역상, 학자, 철학자, 소설가, 언어학자, 시인, 극작가, 외교관, 정치가, 몽상가, 의사 등―을 등장시키고, 그들이 남긴 기록들을 꼼꼼히 검토하여 서양인의 마음속에 비친 중국을 펼쳐 보인다. 서양의 중국 일람을 이해하는 열쇠 이처럼 이 책은 중국에 관한 책인 동시에 문화적 자극과 반응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양인의 중국 일람은 조잡한가 하면 섬세하고, 호의적인가 하면 악의적이고, 지적인가 하면 감성적이고, 환상적인가 하면 현실적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실체에 접근하는 듯하면서도 늘 경이와 신비감에 경도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것은 앞에서 인용한 제인 에드킨스의 편지에서도 드러났듯이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중국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그것을 간파하고 있다. 그는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칸의 대화를 통해 이것을 문제삼는다. “네가 한사코 말하지 않는 도시가 하나 있다.” 마르코 폴로는 고개를 숙였다. “베네치아.” 칸이 말했다. 마르코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지금까지 폐하께 말씀드린 게 베네치아말고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러자 폴로가 말했다. “저는 다른 도시를 설명할 때마다 항상 베네치아에 대해 무언가를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서양은 7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중국을 환상 속에서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를 낳았을까? 지은이의 대답은 이렇다. 비밀은 귀에 있다. 듣고 싶은 말, 기대하는 말만 듣는 귀에 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나한테 수수께기로 남아 있다. 그 누구보다도 중국 문화에 매료되어 지난 40년간 중국사를 연구했고 당대 최고의 중국사 학자로 꼽히는 지은이의 이 자기성찰적 고백은 너무나 진솔해서 하나의 역설로 다가온다. 서양과는 비할 바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중국과 문화적 접촉을 해 온 우리의 마음속에는 과연 어떤 중국이 자리하고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