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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문화의 도래
시대상황을 생각한다 일본의 행운 양이론의 극적인 전환 근대적 군대와 기술관료의 출현 막번제 국가와 영토의식 에도 시대의 번역론 중국어를 외국어로 의식하다 비교의 관저 소라이에서 노리나가로 왜 번역주의를 택했나 번역과 급진주의 『역서독법』에 대하여 2. 무엇을 어떻게 번역했나 왜 역사책이 많이 번역되었을까? 역사를 중시한 것은 일본 유교의 특성일까? 널리 애독된 역사책 유학이 도덕의 체계가 된 과정 '인'에서 '인ㆍ의ㆍ예ㆍ지ㆍ신'으로 논리 용어와 그 어법 '개인'과 '인민' '만약'과 인과론 '논리'를 파고드는 자세 조어를 둘러싸고 번역어의 문제점 라틴어ㆍ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있었을까? 3. 만국공법의 이모저모 막부 말기의 슈퍼 베스트셀러 영어ㆍ중국어ㆍ일본어를 대조하다 전통적인 용어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법의식의 문제 '국체'라는 말 번역하지 않은 것 4. 사회ㆍ문화에 끼친 영향 무엇을 번역했을까 왜 화학에 관심을 가졌을까? 후쿠자와 유키치에 과학관 지식인에게 영향을 끼친 번역서 원서의 질 문제 후진국의 조숙성 번역에 적극 참여한 메이지 정부 문명 개화 : 민심과 정부 |
Masao Maruyama,まるやま まさお,丸山 眞男
Kato Masao,かとう まさお,加藤 正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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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와 단수의 구별이 없다는 점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말은 民權입니다. '자유민권운동'은 일본에서는 보통 쓰이는 말이지만 서양인은 번역하는 데 애를 먹습니다. 지금은 freedom and people's rights movement 라는 번역어가 정착되어 버렸지만, 처음엔 아주 희한하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곧 people's right라는 건 없다는 거지요. right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권리여서, 민권이라는 의미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죠. 민권이라고들 하는데 인권과 참정권을 혼동하고 있다고 후쿠자와는 말합니다.
인권은 개인의 권리이지 인민의 권리는 아니다. 따라서 국가권력이 인권, 즉 개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인민이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민권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개인과 일반시민의 구별이 없다고 후쿠자와는 지적했습니다.... 이 말을 번역하기 어려웠다는 것은 프랑스 민법의 번역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미쓰쿠리 린쇼(箕作麟祥)였던가요. 프랑스어 droit civil을 민권이라고 번역했지요. 그런데 그것은 재산권 등 민법상의 私權을 말하는 겁니다. 자유민권론과는 다르죠. 똑같은 droit civil을 한쪽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인권이라 번역하고, 다른 쪽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된다는 이유로 민권이라 해버리는 것, 그것 역시 일본어에 단수와 복수의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메이지 10년대의 유명한 유행가 가사 '좋잖아. 시빌이야 아직 부자유스러운들 폴리티컬이라도 자유롭다면' 같은 것은 위압적입니다. civil right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거죠. political(right)이란 참정권을 말합니다. 이리 되면 전체주의로 나아가는 건 시간문제인 셈입니다. --- pp.88-89 |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중국어냐 네덜란드어냐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여러 개라는 것이겠죠. 일본어말고도 같은 언어가 있다고 하는 것 말입니다....소라이가 일본어를 수많은 언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그건 무척 흥미로운 점이라고 생각하는데....일종의 의식혁명이지요. 혁명입니다'. --- pp.36-37
'일본의 산업혁명은 훨씬 나중 일입니만, 러시아의 허무당이라거나 유럽의 사회주의를 보고 정부가 이에 반응해서, 문제가 국내에 일어나고 있지 않았던 시기, 아주 빠른 시기에 사회주의에 대한 예방책을 강구한다는, 바로 이점이 일본의 근대화를 생각할때 중대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후진국에 어느 정도 공통된 사상적 조숙성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 p.165 ---p. |
가토 메이지 초기의 번역서를 보면 우선 군사관계, 병법이 두드러집니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지요. 과학 기술을 보면 자연과학 중에서 물리나 수학보다도 화학 분야의 번역이 많아요. 증기기관 같은 공업기술을 빼면 말이죠. 의학도 많습니다만, 의학의 경우에는 난학이 기초에 있었기 때문에 내용은 충분히 알고 있는 만큼 좀더 자세하게 알자는 요구야 있었겠지만, 에도 시대 이래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번역서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화학은 그렇지 않죠. 따라서 왜 그랬을까 하는 문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루야마 세이미가쿠라는 거죠. 케미스트리(Chemistry)의 음을 문자로 딴 겁니다. ('화학'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조어다 - 옮긴이.) 가토 그 다음이 법률제도의 문제입니다. 서양과의 교류라는 필요성으로부터, 뭐니뭐니 해도 '만국공법'에 관심이 모아집니다. 그리고 제도개혁을 하려면 우선 상대방의 제도를 참고 하지 않으면 안되는 만큼 그 배경을 알자는 의도도 있어서, 후쿠자와가 전형적이지만 서양 사정 일반에 관해서 정보를 얻고 싶었던 거죠. 지리적 지식이나 역사 말입니다. 메이지 시기에 어떤 것을 번역했는가 하는 데에 당시의 사회적 요구가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과 예술이 오지요. --- p.146 |
가토 메이지 초기의 번역서를 보면 우선 군사관계, 병법이 두드러집니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지요. 과학 기술을 보면 자연과학 중에서 물리나 수학보다도 화학 분야의 번역이 많아요. 증기기관 같은 공업기술을 빼면 말이죠. 의학도 많습니다만, 의학의 경우에는 난학이 기초에 있었기 때문에 내용은 충분히 알고 있는 만큼 좀더 자세하게 알자는 요구야 있었겠지만, 에도 시대 이래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번역서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화학은 그렇지 않죠. 따라서 왜 그랬을까 하는 문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루야마 세이미가쿠라는 거죠. 케미스트리(Chemistry)의 음을 문자로 딴 겁니다. ('화학'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조어다 - 옮긴이.) 가토 그 다음이 법률제도의 문제입니다. 서양과의 교류라는 필요성으로부터, 뭐니뭐니 해도 '만국공법'에 관심이 모아집니다. 그리고 제도개혁을 하려면 우선 상대방의 제도를 참고 하지 않으면 안되는 만큼 그 배경을 알자는 의도도 있어서, 후쿠자와가 전형적이지만 서양 사정 일반에 관해서 정보를 얻고 싶었던 거죠. 지리적 지식이나 역사 말입니다. 메이지 시기에 어떤 것을 번역했는가 하는 데에 당시의 사회적 요구가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과 예술이 오지요. --- p.146 |
번역은 자국의 말을 만드는 재창조의 과정
19세기 초 서양 열강은 일본 근해까지 출몰하여 직접 교역과 개방을 요구해 왔다. 당시의 일본 막부 정부는 한국이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마무기 사건, 페리 내항 등 충격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서양과 치른 몇 번의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바꿔 버린다. 서양에게 졌다고 자각하는 순간, 쇄국의 이데올로기였던 존왕양이론을 버리고 막부를 몰아내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생을 보내고 시찰단을 파견한다. 그러나 유학이나 견학 이상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책이었다. 서양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일본어로 번역한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번역문화가 서양과의 접촉이라는 외적인 충격에 의해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자국어와 외국어의 차이를 의식하지 못하면 번역이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한국과 일본은 한자를 자기의 문자처럼 사용했고, 특히 지식인들은 자국어보다 한자가 더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그런데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하면 17세기 말 일본에서 최초로 중국어를 외국어로 인식한 인물이 등장한다. 오규 소라이(1666~1728)이다. 그는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낙호(不亦樂呼)아"라는 식으로 『논어』를 읽어서는 『논어』를 읽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식으로 바꿔 읽었을(번역했을) 때만이 그 의미를 제대로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통해 번역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번역을 통해 자신의 언어적 정체성을 자각했다. 메이지 초기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번역밖에 없다는 번역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수많은 번역서들이 양산 되었다. 늘 그렇듯이 이때에도 잘된 번역과 잘못된 번역이 혼재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보수적인 사상가이며 사회진화론으로 유명한 허버트 스펜서의 Social Statics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직역하면 『사회정학』(社會靜學) 정도가 되는데, 엉뚱하게 『사회평권론』으로 번역되어 급진적인 자유민권운동가들의 성전(聖典)이 되었다. 한편 이무렵 번역주의 보다 훨씬 더 과격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모리 아리노리가 '영어 국어화론'을 주장한 것이다. 일본어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일본어만 가지고서는 도저히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수 없으므로 영어를 국어로 하자는 주장이었다. 물론 일본 사회는 이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비록 일본의 이야기지만, 이 대목은 그로부터 한 세기 이상 지난 오늘날 유례없는 영어 열풍이 불고 심지어는 '영어 국어화론'이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는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