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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가 파두에 젖는다
최형일
파란 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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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N IS

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시뮬라크르의 봄

시뮬라크르의 봄―진해 행암에서 한나절 - 13
덩굴장미 1 - 20
덩굴장미 2 - 21
자작나무 숲에는 초록이 산다 - 22
뫼비우스 띠 - 24
백일홍 아래서 - 25
멜랑콜리 에피소드 - 26
낙엽 - 28
인터셉트 - 30
공중화장실 앞에서 - 32
안티 오이디푸스 - 33
갈대 - 34
가포로 가는 길 - 35
퇴화 - 36
망종(芒種) - 38
거미의 집 - 40
다호리 텃밭 - 42
산책 - 43
백색 항아리 - 44
물질하는 여자 1 - 45
물질하는 여자 2 - 46
물질하는 여자 3 - 47
K 조선소 - 48
르네 마그리트 - 50
세잔의 정물, 푸른 사과 - 51
나무의 시문(詩文) - 52
단어를 찾아서 1 - 53
단어를 찾아서 2 - 54
봄날, 안민고개 - 55
봄날, 바다로 간 공룡들 - 56
봄 - 58
부랑(浮浪)―광인들의 배 - 59

제2부 수집가의 알고리즘

수집가의 알고리즘 - 63
채집기(採集期) 1―문체반정기(文體反正記) - 64
채집기(採集期) 2―무선마우스 - 66
채집기(採集期) 3―국수의기하학 - 67
시(詩)의 성장기 - 68
벚꽃의 독백―페르난두 페소아 식으로 - 70
굿 킬 - 71
벚나무와 자전거에 대하여 - 72
해열제 - 74
시선의 욕망 - 75
골조공사 - 76
봄―응시의 가면 - 77
봄눈 - 78
목련 - 80
어떤 기억들 - 82
꽃 - 84
문밖에서 - 85
계단의 말 - 86
가음정 장미공원 - 87
바깥 - 88
용지호수 - 89
평면거울 - 90
가문비나무 옆 거칠고 긁힌 거리를 나서며 - 91
청동거울 속 여행 - 92
매미 집 - 93
쓰레기통 - 94
하늘소 - 95
해바라기―고흐가 그랬다 - 96
반구대 암각화 - 98
가상현실 - 100

제3부 얼마를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청동의 시간 - 103
버려진 속도들 - 104
튤립 - 105
므네모시네 - 106
상남시장 - 108
창원 연대기 - 110
터널을 지나며 - 112
푸른 수염 나비 - 113
바다의 편지 1 - 114
바다의 편지 2 - 115
밤비가 파두에 젖는다 - 116
파두에 젖다―진주 유등에 부쳐 - 117
바닷가 터미널 구두점 점묘 - 118
스피노자의 렌즈 - 119
동굴의 우화 - 120
해변 식당에서 - 121
바다 한 점 - 122
화엄경을 읽다 - 123
동충하초 - 124
우두커니 - 126
화분의 상상력 - 128
계엄령 - 129
얼마를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 130
아카시아 초록 시첩(詩帖) - 131

해설 오민석 파편화된 기표들의 그물 - 132

저자 소개 1

구례에서 태어나 충청도에서 자라고 창원에서 살고 있다. 1990년 [시와 의식]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나비의 꿈] [아무도 울지 않는 시간이 열리는 나무] [밤비가 파두에 젖는다]를 썼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2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43쪽 | 128*208*20mm
ISBN13
9791194799191

책 속으로

1. 유사한 봄날

진해 봄은 바다보다 먼저 물든다 벚꽃이 하얀 산비탈을 오르고, 초록빛 새순에서는 새소리가 났다 바다를 끼고 도는 마을과 산마루 벚꽃 무리가 그 작은 뱃머리 위로 물그림자로 옮겨 앉는다 소낙비에 튕긴 음표 따라 고깃배 위로 꽃잎이 날린다 물오리 떼가 희끗희끗 고개를 수그려 부두의 서사를 줍는다 비릿한 창틀 바람이 스친다 부두 뱃머리 깃들이 중얼거린다 너를 닫을 때 나는 비로소 삶을 연다 수직 창문이 수평의 바다를 연다 느린 파도의 무늬들 푸른 파래 해조음을 모래 가생이에 풀어놓고, 창 넘어 바다를 연다 언제인지, 언제부터인지 늘 같은 바다는 어디부터인지 읽고 간 문장인지, 기억나지 않는 부두에 삶을 켠다

2. 창틀에 핀 봄날

비릿하다 바다가 숨 쉬듯 둑길 이끼들이 금방 오므라들어 솜털처럼 파릇파릇 물결친다 늦은 오후가 내려앉아 펄럭인다 물의 뼈들이 갯가에 걸린 그물에 반짝인다 덜 마른 물비늘이 비워진 공간과 공간 사이를 비튼다 멀어짐과 사라짐에 익숙한 바다가 있다 사라짐 없이 살아 내는 바다는 없다 바다에 떨어진 벚꽃들이 물고기 떼를 불렀다 고깃배 사이 꽃잎들 물고기 밥인 양 끄덕끄덕 떠돈다 일어나면 물결이 일고 누우면 활짝 펴는 부두처럼, 페인트가 벗겨진 배들이 서로를 토닥거리며 저녁을 맞는다 파도인지 물결인지 하루의 기억이 새김질이다 기억나지 않는 문장이 오간다 물결의 기억을 그물에 꿰는 바람이 뒤척인다

3. 나무배

에미는 바다를 지고 말이 없다 지나고 나면 금방 둑길쯤에 흩어진 날을 포구는 안다 꽃가루가 바위틈에서 작은 물미역으로 나풀거린다 돌아오지 않는 바다를 안은 채, 물가로 어조사를 잇고 나눈다 몇 덩이 형용사를 묻게 펴며 번진다 뭍으로, 접속사를 붙여 잇는다 풍경이 줍는 바다의 말들이 집을 찾는다 부둣가 가로등 아래 비늘이 날린다 나비들이 한 잎 두 잎 나풀거린다 기억나지 않는 서술어로 길게 눕는다 짠 내를 헹군 저녁 햇살이 들썩인다 이곳 누구나 돌이킬 수 없는 봄날 하나쯤 바다에 묻고 산다고, 행암만 봄날은 안다 바닷길을 게워 내고 거울이 파도를 게워 내고 그녀를 게워 내고 둑방길을 게워 내고 익사체 같은 봄날을 게워 내고 꽃잎 지는 바람을 후려친다 에미는 뒷짐으로 말한다

4. 봄날은 간다

거짓말처럼 불었다 떠다니는 벚꽃이 머뭇거린다 바다는 그 꽃잎으로 잔잔히 끌어당긴다 희고 투명하게 모래무지들 물빛 따라 멀어진다 너의 풍경에 있지만 너를 가리키지 않는다 어딘가로 여전히 이어지고 있을 파도의 기척을 실어 나르고 있다 서로를 밀착한 채 가면 같은 아침을 씻는다 배들이 창가로, 메모지로, 희미하게 스며든다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부르고,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쓴다 왜 이곳에 있냐고 묻는다 봄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물결은 이미 봄을 잊었다고, 꽃이 떨어진 부두 둑길에 초록을 심는다 사라지는 물결이 먼바다를 당긴다 사라짐 속에서만 피는 바닷길 따라 봄날은 간다 기억나지 않는 바닷길을 찾아 배들이 멀어진다

5. 바다 너머

초록이 둑길을 오른다 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 바다는 매일 같은 풍경을 바라보지만, 파도는 늘 다른 문장을 건넨다 먼 뱃고동 소리가 꽃잎처럼 진다 포구는 터널처럼 긴 외로움으로 눕는다 새순이 연둣빛이다 말없이 이미 많은 말을 하며 서 있다 다시 바다를 본다 작은 고깃배들이 뱃머리를 낮춘 채 햇볕을 쬔다 두리번대는 어제의 햇볕은 따뜻했고, 오늘의 햇볕은 약간 더 길다 바다 너머로 파도는 사라짐과 드러남의 연속이다 늘 수평인 바다는 안다 사라진다는 건, 매일 새로워진다는 것을 기억 넘어 초록이 짙어 가는 이유를 아는 것이다 죽음은 조용히 바다를 덮는 햇살처럼 물결치며 삶을 적는다 행암만이 묽게 머문다 메모지 위 햇살이 다가와 물결의 언어를 적신다 봄날은 바다 너머에 지고 행암만 바람과 물빛은 문장으로 다가온다

6. 글을 쓰는 물고기

바람에 날린 벚꽃 무리가 항구에 떠돈다 일렁이는 물비늘이 눈부시다 뭉게구름 아래로 물고기 떼가 흘러간다 물결을 읽는 중이다 폴폴 날리는 꽃잎 사이로 눈이 만지는 대로 번지는 바람의 언어를, 파도는 한 잎 두 잎 주워 먹는다 조각난 퍼즐을 다시 새긴다 수많은 아무도 쓰지 않은 무늬를 중얼거린다 항구를 떠나 돌아오지 않는 말들이 벚꽃으로 핀다는 전설은 항구만 아는 사실이다 어느 배도 건져 올리지 못한 기억이 핀다는 바다는 벚꽃에 묻는다 죽은 바닷새와 항구에 묶인 나무배들의 침묵을, 잎이 진 나무 죽은 새의 접은 죽지에 젖은 저녁을, 서로 다른 언어가 파닥인다 매운 냄비 한 사발, 깔깔한 바다 한 숟갈

7. 사라진 문장

벚꽃이 모두 졌다 뼈만 걸친 나무의 시간을 부두는 안다 벚나무 아래 죽은 길고양이 기억쯤은 잘게 부숴 파도에 보낼 줄도 안다 하얀 먼바다가 흘러갔다 지는 꽃이 초록에 들도록 푸른 잎들이 지저귀는 시간을 안다 그 잎들이 비추는 바다가 있다 사라지는 문장을 물고 물고기 떼가 거울로 들어간다 비린내가 희미하게 번진다 비늘의 흔적이 여전히 머물며 다시 쓰이지 않은 물결에 뒤척거린다 얇은 종잇장 아래 성별을 알 수 없는 파도의 무늬를 베낀다

8. 봄날의 기억

초록이 산을 가득 채우기 전, 바닷가에는 봄의 그림자만 남았다 지는 벚꽃이 파도에 젖어 떠내려가고, 해초와 모래가 엷은 숨결처럼 숨을 쉰다 기억을 물고 떠난 물고기 떼는 지난 바다가 남긴 바위틈을 들락거린다 해안선을 들락거리는 행암만은 말없이 시간을 품는다 떠나간 물결, 사라진 문장, 그리고 바다의 기억까지 그 풍경 안에서 부재한 봄날은 물때에 절인 결처럼 말없이 풍경이 된다

9. 무늬

벚꽃은 없다 초록이 묻었다 바다는 말이 없다 빈 고깃배만 남았다 물결이 잠잠하다 숨이 길다 바람은 고깃배 아래로 파고든다 꽃잎은 물 위에 떠돌다 사라지고 무늬를 불렀다 말이 아니, 기억도 하지만 남았다 쓰이지 않은 것들 닿지 않은 말들 버려진 모양들 그것이 바다의 문장이라는 그것을 바람이 돛을 뚝 칠 때까지도 고깃배는 몰랐다 아니 모른 척했다 끄덕끄덕 봄날이 저문다 파도가 달려오면 바람은 자리를 떠나간다 누구도 바다의 끝을 묻지 않는다 봄날의 무늬처럼 충분한 어쩌면

10. 뱃노래

저녁 바람이 부두에 선 바람막이 옷깃으로 날아든다 불룩해지도록 허리를 돌아 파고든다 바람에서는 갈매기 소리가 난다 모래 뭍이 하는 소리로 읊조린다 팽팽하게 졸라맨 머리 모자를 확 벗겨 간다 바다를 마주한 밤 부두로 날아간다 날아가는 갈매기를 쫓는다 내 머리를 낚아챈 갈매기를 따라간다 머리통을 낀 채 곤한 돛대가 펄럭인다 누가 부르다 만 노래방 기기가 깜박거린다 바람막이 점퍼가 날려 보낸 갈매기 떼가 한 박자 느린 허리춤을 치켜올린다 죽지가 걸쳐 올린 음계에 갈매기 떼가 점퍼 속으로 뛰어든다 한가득 생선 내음이 점퍼 속으로 사라진다
--- 「시뮬라크르의 봄―진해 행암에서 한나절」 중에서


검은 돛배가 부두에 잠든다
리스본 바닷가 선술집 파두처럼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던 화살처럼
기약도 없이 파도는 푸른 자락을 끌어
모래의 기억을 사막처럼 읽는다

카메라 셔터에 터진 꽃들이 산기슭 따라 뭍에 머뭇거렸지, 누천년 묵은 나이테가 기억의 흰 뼈를 몰아 밤비를 쏟는다 빗나간 과녁을 짚는 화살의 기억으로, 따져 보니 백 년도 살지 못한 생의 무늬가 언제 정(定)한 결 따라 검은 돛배를 잠들게 하리오 늦은 밤비에

*파두(fado): 포르투갈의 역사를 담은 서정 음악.
--- 「밤비가 파두에 젖는다」 중에서


툇마루 거미줄이 비를 맞는다
허공에 얽힌 실들이
볕에 기대며 서로 살갑다
하늘과 땅,
비와 빗줄기 사이
주름들이 펄럭인다
삶의 무늬가 맺힌 물방울들이

여기 있으므로 저기 있고
저기 있으므로 여기 있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없다

--- 「화엄경을 읽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거울 속에서 희디흰 뼈들이 자라듯이
닮음과 비슷한 것들이 기억을 비튼다
혼자서도 알을 까고 자라고 날아간다
거리와 시간 넘어 스며들고 사라진다
끝없이 흩어지고 깨어지고 부수어진다
- 「시인의 말」

추천평

대저 “청동 갑옷을 두른 검푸른 새벽”이거나(「청동거울 속 여행」) “하지정맥류에 걸린 낮달”(「덩굴장미 2」), 혹은 “세상 대접받지 못한 품삯”이란(「상남시장」) 무엇인가. 이들 ‘새벽’, ‘낮달’, ‘품삯’ 등의 시적 소품?이미지 들은 다양한 수식 어구와 맞물린 형태다. 이렇게 수식어구와 만난 이미지는 일단 은유, 환유 등등의 비유로 읽힌다. 그것도 강한 텐션을 동반한 비유들로 말이다. 이번 최형일의 시들을 통독하며 나는 이 같은 중층적인 비유의 숲을 애써 헤쳐야 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은 두 가지 사실. 하나는 이들 비유가 의미론적 긴장을, 다른 하나는, 앞에서 보듯, 시적 소품들을 낯설고 새롭게 태어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저 독특한 이번 시집의 정조나 미감은 일차적으로 이 같은 사실들에서 비롯하고 있으리라.

또 이 중층적인 비유의 미학은 시들을 줄글의 단련 형식을 취하게도 만든다. 줄글은 복합문이나 숏츠식 단문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짧은 문장의 연속은 독해의 속도감 탓에 화자의 내면 심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읽힌다. 곧 들끓는 그러면서 명멸하는 의식의 파편들을 포착, 제시해 주고 있는 형국이다. 이 내면 심리의 시는 지난날 우리 시의 한 트렌드였다. 물론 이 시학은 서구 전위시학의 세례를 상당 정도 받기도 했다.

말이 난 끝에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 그의 시는 여러 서구 예술인들과 각종 외래 용어들을 제목이나 시적 언술 등에 구사한다. 일종의 현학취일 터인데 이는 단순 우연이거나 무의식적 소산만은 아닐 터이다. 말하자면 평범하고 비근한 현실을 낯설고 이례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적 의장인 셈이다. 그런데 막상 낯설게 만들어야 하는 현실은 최형일 시인의 일상 공간 속에 놓인 것들. 그의 시적 공간이나 배경은 남부 중소 도시 그것도 창원을 중심으로 한다. 더욱이 도심보다는 변두리 버스 종점이나 구두점 같은 장소들이다. 그래서일 터이다. 최형일 시인은 이 같은 공간 속 일상의 삶들을 저 중층적인 비유와 쉬르풍 절연의 미학으로 텍스트에 담는다. - 홍신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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