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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초월과 인식 가능성 앎으로서의 정신 학과 현전 존재와 자신을 주기 내재성의 현상학 초월 개념과 형이상학의 종말 앎을 따르는 것과는 다르게 종교로서의 사유 우리 안의 무한 관념 무한의 로고스 현상학을 한다는 것 초월적인 것의 인식 가능성 에마뉘엘 레비나스와의 대화 옮긴이 해제 레비나스의 초월: 하늘의 지혜를 이 땅에서 실현하기 |
Emmanuel Levi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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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앎과 의식 속에서 정신을 탐구한다.
--- p.13 끊임없이 새로움이 분출하는 것 자체. 새로운 것의 절대적 새로움. 의식의 동화 작용으로 환원되지 않는 초월의 정신성. 새로움들의 끊임없는 분출은, 정확히 앎 너머에서, 그 절대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으로 말미암아 의미를 만들어낼 것이다. --- p.28 모든 초월적인 것을 내재성으로 환원하지 않으며, 초월을 이해하면서도 훼손하지는 않는(타자를 동일자로 동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타자를 동일자에 통합시키는 것도 아닌) 것을 추구하는 사유란 결국 무엇인가? --- p.31 현상학을 한다는 것은 인간적 또는 상호 인간적 얽힘을 궁극적 인식 가능성의 직조물로서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하늘의 지혜가 땅으로 돌아오는 길일 것이다. --- p.42 저는 구약 성서를 읽는 것처럼 신약 성서를 읽는 경험을 한 적이 없습니다. 구약 성서는 제게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책입니다. --- p.66 아마도 유대교에서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의식은 진리에 대한 모든 이의 동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 대한 책임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방식으로 보편적 역사가 유대인의 역사 속에 반영되는 것이겠지요. --- p.67~68 우리는 사랑 안에서 둘이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애석해하지만, 제 생각에는 바로 이 이원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융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데 그 탁월함이 있습니다. 관계는 반드시 초월 그 자체와 맺어져야 합니다. 이 관계가 초월의 낯섦을 잃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낯섦은 초월의 장엄함에 속하는 것입니다. --- p.69 진정한 기도는 결코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 고통 속에 있는 인간, 아픔으로 찢긴 인간은 자기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고통은 언제나, 시편 91편 15절에서 보듯 “환난 중에 그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고통입니다. 자신을 위한 진정한 기도의 의미는 고통받으시는 하느님을 위한 기도입니다. --- p.74 비참한 이들의 비참함과 스스로 연대하시는 하느님의 낮아지심!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이 고통의 신학의 항들을 뒤바꿔서, 나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오는 고통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분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 p.74~75 이 땅의 고통 속에,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고통이 있습니다. --- p.75 고통받는 인간들의 기도는 이러한 하느님이 받으시는 고문 또는 ‘수난’을 덜어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케노시스입니까? 여하간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기에 케노시스에 가까운 어떤 것이 있습니다! --- p.76 응답할 의무란 공권력에 의지하는 어떤 사법적 심문의 형식적 절차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이례적인 복종(예속 없는 봉사!)이, 곧 타자의 얼굴의 올곧음에 대한 복종이 있습니다. 그 얼굴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은 위협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그 비할 데 없는 권위는 고통을 통해 명령하며, 정확히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일컬어집니다. --- p.78~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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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 불가능한 타자를 향한 초월의 여정
윤리학과 신학을 넘나드는 레비나스 철학의 궁극적 지향 《초월과 인식 가능성》은 일흔여덟의 레비나스가 1983년에 제네바대학교에서 한 강연과 강연 다음 날 동료 교수들과 나눈 대담을 모은 책이다. 레비나스는 이 책에서 한평생 추구해온 ‘타자의 철학’, ‘초월의 철학’을 다시금 급진화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족과 친구를 잃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 역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포로로 잡힌 적도 있는 레비나스는 폭력의 근원을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찾았다. 타자의 차이를 소거하고 흡수해 주체성을 형성한 서양 철학의 전통이 상대를 말살하는 전체주의, 전쟁과 닮은 점이 있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기존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레비나스는 전통 현상학에 반하는 태도를 견지하며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다. 현상학은 서구 철학이 전통적으로 타자를 인식 가능한 존재로 대한 것의 연장에 있다. 그 때문에 레비나스에게 현상학은 타자를 흡수하는 동일자의 철학이다. 초월은 이를 넘어서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말년의 레비나스가 원숙한 사유로 자신이 평생 천착해온 초월 개념을 다시 한번 거침없이 급진화한 책 《초월과 인식 가능성》의 특이성은 신학의 언어를 더해 종교와 초월을 논한다는 점이다. 다만 레비나스가 신학의 언어를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신학은 최고 존재인 신에 대한 앎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신학을 윤리적, 실천적 행위와 연결해 논의를 전개한다. 절대자에 대한 앎에서 그치는 신학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서 벗어나 더 높은 자인 타인에게 복종하고 헌신한다는 의미의 신학을 제시하고 이를 초월과 연결하는 것이다. 신학을 그저 최고 존재에 대한 앎이 아닌, 행위를 통해 존재하는 것 너머로 나아가는 것에 관한 학문으로 전환하기. 레비나스는 이 전환을 ‘하늘의 지혜가 땅으로 돌아오는 길’이라는 은유로 표현한다. 케노시스는 이를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 되어준다.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인 케노시스는 신이 자신의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지위를 포기하고 스스로를 인간의 지위로 낮춘 것을 일컫는 말이다. 레비나스는 케노시스를 윤리적, 실천적 신학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진정한 기도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기도이며, 이 행위야말로 비참한 자들과 연대하는 신의 행위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레비나스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염려하고, 자신을 고통받는 자리에 놓는 것으로 케노시스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여 윤리적 초월로 나아가고자 한다. 기존의 레비나스가 신학의 언어를 잘 사용하지 않고 엄밀한 철학의 자장에 머무르고자 한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초월과 인식 가능성》에 신학의 논의를 들여온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초월을 급진화하고 과장하여 강조하기 위해서, 즉 하늘의 성스러운 윤리를 이 땅에서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존재와 진리에 대한 철학의 사유를 윤리와 행위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철학과 신학, 윤리학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논의를 전개한 것이다. 레비나스가 50여 년간 심화, 발전시킨 타자를 향한 초월의 철학이 마침내 도달한 곳! 한편 이 책에는 그간 여러 권의 레비나스 저작을 우리말로 옮긴 김동규 역자의 상세한 해제도 실려 있다. 해제에서, 역자는 《초월과 인식 가능성》이 레비나스 사유의 궤적에서 어떤 자리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상세히 짚는다. 1935년에 발표된 레비나스 최초의 독창적 철학 논고인 《탈출에 관해서》, 레비나스의 주저로 꼽히는 《전체성과 무한》, 레비나스가 사유의 원숙기에 접어든 시기에 전통 현상학과 대결하며 초월의 의미를 심화한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를 거쳐 레비나스의 초월 개념이 어떤 궤적을 따라 깊이를 더해왔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레비나스 사상의 거대한 흐름과 맥락 속에서 《초월과 인식 가능성》의 의의를 더욱 적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냉전 종식 이후의 짧았던 ‘평화와 번영’의 시기는 빠르게 저물어가고 있다. 변화는 전쟁과 국제 패권 경쟁에서만 일어나고 있지 않다. AI의 등장과 로봇 공학의 발전은 전례 없는 속도로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흐름 속에서도 자명한 진실이 있다. 힘으로 힘을 제압하는 것은 언제나 절멸의 위험을 품고 있고, 기술의 발전은 끊임없이 윤리의 시험대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자기 존재를 초월하여 타자를 지향하는 레비나스의 철학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한 바퀴 돌아간 지금 다시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리가 상실된 시대, 레비나스가 제안한 나를 비우고 타자를 위해 기도하는 소박하면서도 장엄한 실천은 길 잃은 시대에 절망한 사람들에게 가만히 위로의 손을 내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