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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1부│비소설(非小說)

꽃무늬를 새기다
현대시작법
물고기가 아니다
천렵
투명
신파 소설
7월 이야기
내일 여름, 두번째 천변에서
숨은 신
상견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바벨 아파트
의미가 변하지 않는 문장들
내면에 사막을 들인 자의 은유 위로 EC 002가 떨어질 때
천사가 입던 옷 팝니다
디자이너
유실된 여름으로 만든 전집
일기예보
테디베어
밝은 방
치킨 런

2부│조리 부조리 비조리 간편 조리

장르
작가주의
소설책
비소설
모던 소설 타임스
연연(戀戀)
비소설(非小說)적 망상의 보관함이 멸망한 인류의 마지막 유품으로 습득될 때
혀의 아포리아
연행(演行)
부당거래
소설책의 쓰임

3부│미소설(未小說)

시인은 독사의 머리를 밟고
소설적 얼음
에스키모
문학 연구자
액자식 구성
경종
생년월일
점화(點火)
밤의 징조와 유령들
멜로드라마
북토크
지우개를 잃고 소설가는 쓰네
소설가 코스프레
탈고
소설가
독자와 목차
서평가
우리 모두는 비상시국이었다

해설
레이어드 모노포니 - 조강석(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1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0년 시인이 된 이후, 2013년 문학평론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첫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로 2014년 제33회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으며, 2018년 두 번째 시집 『소피아 로렌의 시간』을 출간했다. 라임(lime)처럼 상큼한 책을 파는 1인 출판사 [리메로북스(limerobooks)]에서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다. LP음반과 진공관앰프를 좋아하고, 스토리 가공과 신상 막걸리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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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1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188쪽 | 266g | 125*210*10mm
ISBN13
9791124128329

책 속으로

세상에 없는 과학처럼 장벽의 부조(浮彫)가 조금씩 움직였다
사어(死語)가 되던 날 밤의 조각은 자신의 출생지를 떠올렸다
가슴속 석공의 그림자가 수천 년 전 피어난 꽃잎 위로 깊어지고 있었다
--- 「꽃무늬를 새기다」 중에서


너는 스스로의 발음으로 헤아려본 적이 없다

구름이 지나가면 당신은 구름
새가 날아가면 당신은 새
가을이 전쟁터라면 당신도 떨리는 심장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꿈을 꾼다는 건
무생물의 흔적일까?
--- 「물고기가 아니다」 중에서


모래 위에 적어놓은 마지막 신화(身火)의 유서들이
폭풍과 함께 솟아오르는 동안
중력을 잊은 모래는 비로소 작두를 탈 채비를 한다

슬픔의 신내림을 사랑이라 방언하면서
신기루로 길을 잃은 내면의 문명을

외계의 몸을 빌려 점쳐보는 것이다
--- 「내면에 사막을 들인 자의 은유 위로 EC 002가 떨어질 때」 중에서


태초에 빛이 있었지만 텍스트는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빛을 좇는다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신은
TV 채널을 돌리고 있다

화면 속 이미지는
죽을 수 없는 곳에서만 빛을 죽인다
--- 「밝은 방」 중에서


나무로 만든 종이 위에
나무라는 글자를 쓰면 슬프다
소설이 되지 못한 나무가 실패한 문장을 접고
접힌 기억이 모여 종이비행기가 되어 날아갈 때
나무의 고향에선 나무끼리 사랑하고
두 발로 걸어가 연인의 어깨를 감싸고
밤마다 초록색 외계인이 찾아오는 꿈을 꾼다는데
이상하지? 씨앗의 자유로움을 기억할 때 잎새는
주어가 되었다가 푸름을 지닌 결말이 되었다가 아슬아슬한
서술어가 되지
--- 「비소설」 중에서


그러므로 울음은 계절의 흔적이 아니라
남몰래 덧칠한 내부의 보호색이다
소설가에게도 입말은 필요 없었다 구원은 언제나
예상 밖의 코트를 걸치고 찾아온다
수압이 거세면 춤을 춰야 했지만 붉은 혀를 떠올리진 않았다
마침내 고무호스 속 안락에 맡겨지게 되었다
--- 「시인은 독사의 머리를 밟고」 중에서


아무도 쓰지 않은 소설 속 한파를 계절 대신 눈동자라 불러봅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여름을 꼭 껴안고 스르륵
눈동자가 감기는 자장가를 직육면체로 서서 흥얼거립니다

언젠가 꿈의 북극이 사라진다 해도 당신의 생시에 각진 모서리로 남겠습니다
--- 「소설적 얼음」 중에서


사실 파도를 움직이는 건 액자다
액자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그물을 찢고 배를 침몰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미술관에 걸린 바다엔 파도가 없다
파도의 부재를 감추려고 미술관은
관람객 모두를 파도의 이야기로 바꾸는 중이다
--- 「액자식 구성」 중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선 영원하다는 한끗을 지워야 한다 반쯤 타버린 쥐포의 아슬아슬함처럼 생활과 좌절을 반복하는 피부밑에는 꺼지지 않은 불씨가 도사리고 있다 성장이란 비리고 짭조름한 탄 맛이 제 몸을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매번 몸을 바꾸고 나타난다 해도 소주의 숙취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지린내 가득한 숯불로 남은 사춘기를 끄고 또 끄면서 성기는 비로소 미성년의 소유가 된다
--- 「점화(點火)」 중에서


사랑처럼, 너무 큰 말은 쓰지 말라고 해서 풍경이라고 했던 것이다
너와 내가 같은 액자에 담기기를 바랐던 것이다
풍경 속 호수와 미루나무 작은 날다람쥐까지도 실은
사랑을 쓰지 않으려고 거기 있던 것이다

--- 「서평가」 중에서

출판사 리뷰

현실을 초과하는 비상(非常)한 세계,
“사실 시는 사기가 아니라 겹치기야”


시집의 중심을 관통하는 핵심 기제인 ‘레이어드(layered)’의 감각은 이 시집을 ‘경험하는 지층’으로 변모시킨다. 여기서 겹침은 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자 시집 전체를 지탱하는 구조다.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발화의 층위가 하나의 장면에 포개지며, 단일한 진실로는 포착할 수 없는 세계의 무게를 드러낸다.

1부 ‘비소설(非小說)’에서 시인은 소설이 되지 못한 세계의 파편들을 정밀하게 관찰한다. 「현대시작법」에서 짐승의 뼈를 갈아 물고기를 잡으려는 인디언의 행위와 “대책 없는 소설가의 미끼”를 대조하며 언어의 진실을 탐구하고, 「바벨 아파트」에서는 “상상력이 있던 자리에 자본이라는 이름이 내걸”린 풍경을 통해 소설적 근거를 잃어가는 현대의 공간을 포착한다. 또한 「투명」에서 묘사되는 “금이 간 세계 속/ 금이 간 사람들”은 부서진 채로 현재를 버텨내는 존재들을 가시화한다.

장기가 뼈를 입고 뼈가 피부를 입고 피부가 옷을 입고 옷이 나를 입고
그러니까 나
레이어드룩(layered look)으로 완성됐지
_「비소설(非小說)적 망상의 보관함이 멸망한 인류의 마지막 유품으로 습득될 때」

2부 ‘조리 부조리 비조리 간편 조리’는 자본의 시스템과 속도가 시의 형식을 어떻게 변주하는지 보여준다. 시집의 핵심인 장시 「비소설(非小說)적 망상의 보관함이 멸망한 인류의 마지막 유품으로 습득될 때」는 이 지점에 배치되어 현실의 파열음을 쏟아낸다. 시인은 인간을 “장기가 뼈를 입고 뼈가 피부를 입고 피부가 옷을 입고 옷이 나를 입”은 존재, 즉 “레이어드룩(layered look)으로 완성”된 존재로 명명한다. 이 거대한 보관함 속에는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 계엄령의 기억, 당근마켓 사기꾼의 사연 등이 층층이 쌓여 있다. 이어지는 「소설책의 쓰임」은 소설책이 ‘방탄복’이나 ‘벌레 잡기’처럼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도구로 사용되는 목록을 나열하면서, 고정된 예술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소설의 물성이 지닌 뜻밖의 활력과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3부 ‘미소설(未小說)’은 결말에 도달하지 못한 감정들 즉 “아직 소설이 되지 못한” 날것의 상태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소설적 얼음」과 「에스키모」에서 시인은 아직 이야기로 굳지 않은 정동, 말이 되기 직전의 감각을 붙든다. “당신이 사랑 대신 얼음을 주었더라면”이라는 가정은 감정을 완결하기보다 차가움과 열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긴장을 유지하게 한다. 특히 「우리 모두는 비상시국이었다」는 2024년 12월의 역사적 사건을 직접 호명하며 우리가 딛고 선 현실이 결코 계엄을 푼 적 없는 팽팽한 긴장 상태임을 상기시킨다.

비상시국을 통과하는 ‘레이어드 모노포니’,
다성적 혼란을 견지하는 발화의 조건


여름의 초록이 검정이 될 때까지
검정의 내부가 한없는 투명의 겹침이 될 때까지
젖음의 모노포니는 내일에만 들리는 신청곡 같은 것

가능성이라는 말, 이따금 슬픔으로 향하는 강가에서
당신의 어깨를 만진다
수북하게 쌓인 우주의 먼지를 툭툭
떨어보는 것이다
_「내일 여름, 두번째 천변에서」

해설에서 조강석 평론가는 기혁의 시가 보여주는 이 복잡한 층위를 ‘레이어드 모노포니’라는 개념으로 포착해냈다. 수많은 현실의 잡음과 이질적인 정보들이 겹겹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시인의 치열한 언어적 조율을 거쳐 결국 하나의 명료한 선율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겹침의 끝에서 『소설책』이 도달하는 지점은 다성적인 혼란을 그대로 끌어안으면서도 그 혼란에 함몰되지 않는 발화의 상태다. 소설보다 더 기묘한 현실, 매일같이 업데이트되는 비정한 뉴스들 속에서 시인은 “우리 모두는 비상시국이었다”라고 선언한다. 『소설책』이라는 반어적인 제목 아래에서 소설과 비소설과 미소설은 선택지라기보다 동시에 작동하는 조건이 된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세계는 하나의 양식으로 환원되지 않고, 투명한 거울 대신 불투명한 층위를 겹쳐 입은 상태로만 지속된다. 이 시집은 그러한 조건을 해소하기보다 끝까지 견지한다. 결론을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체류의 상태를 유지하며, 완결된 해답 대신 우리가 딛고 선 현실의 지층이 얼마나 위태롭고 복합적인지 드러낸다. 겹겹이 쌓인 아이러니와 슬픔 속에서 솟아나는 시집의 문장들은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현실의 국면들을 다시 가시화한다. 픽션의 형식을 경유하지만 현실을 해석하거나 봉합하고, 불안정한 상태는 끝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그 불안정성 자체가 이 시집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발화의 조건이다.


소설 속 시인처럼
분열의 안락에 취해본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당신 마음대로”

결말을 상실한 분리기(分離器)로서의 세계가
보들레르의 두 눈을 후려칠 때

진실은 거대한 숙취의 쓰임새이다
-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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