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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감각으로 기록하는 문학
실비 제르맹의 감각적인 문체가 빛나는 소설. 천진난만한 여덟 살 소녀가 겪게 되는 폭력과 침묵의 시간을, 작가는 빛과 음향, 색채로 그려내며 '보는 소설'의 진수를 보여준다. 폭력의 잔흔 속에서도 끝내 다시 살아가는 법을 찾아가는 한 위대한 영혼의 이야기.
2026.02.13.
소설/시 PD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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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첫 번째 채색 삽화 - 14 전설 - 18 두 번째 채색 삽화 - 36 전설 - 40 세 번째 채색 삽화 - 64 전설 - 68 빛 첫 번째 붉은 분필화 - 86 전설 - 90 두 번째 붉은 분필화 - 104 전설 - 108 세 번째 붉은 분필화 - 132 전설 - 140 철야 첫 번째 세피아화 - 176 전설 - 180 두 번째 세피아화 - 204 전설 - 208 세 번째 세피아화 - 220 전설 - 224 소환 첫 번째 목탄화 - 244 전설 - 248 두 번째 목탄화 - 266 전설 - 270 세 번째 목탄화 - 294 전설 - 298 인내 프레스코화 - 312 전설 - 314 옮긴이의 말 - 338 |
Sylvie Ger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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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밤, 예기치 못한 밤이 대낮에 나타난 참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보이지 않았던 달이 어둠과 속도와 힘으로 완벽히 무장하고 하늘 한복판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달은 자신이 묶여 있던 밤의 홋줄을 끊고 진청색과 자주색 거대한 구름 소용돌이를 거슬러 돌진했다. 평소라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며 하늘에 입성하는 달이 이제 시간의 질서를 파기하고 모든 구속과 법칙을 벗어던진 것이다. 잉크 빛을 띤, 전쟁과 광기의 빛을 띤 달이 해를 향한 공략에 나서고 있다.
--- p.14 죽은 아이면서 살아 있는 아이인 그 랭부르 씨네 아이가 요정이 된 것이다. 육신을 도난당하고 비탄에 빠진, 가엾기 그지없는 어린 요정. 우화들을, 그것들의 놀라운 현실성을 뤼시가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살아 있는 자들이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 그것들에 육신과 얼굴과 목소리를 부여하고 있는데 말이다. 세상은 하나의 우화며, 삶은 커다란 그림책이다. 울림과 냄새를 지닌 알록달록한 그림들, 춤을 추거나 후려지는, 움직이는 그림들. --- p.79 그는 그 시선을 보고 있다. 쉭쉭 소리를 내고, 이를 갈고, 피를 흘리는 시선, 그가 땅속에 던져넣은 아이들의 눈물을 그에게 쏟아붓는 시선이다. 그는, 실추한 그 식인귀는 감지한다. 고통과 증오, 추악함과 아름다움이 결합된 이 마녀 아이의 커다란 눈에서 헤어날 순 없으리라는 걸, 공포에 사로잡혀 감지한다. 메두사의 시선이다. --- p.172 그러다 어느 날, 심장 한복판에서 일이 벌어진다. 잡초가 무성한 심장, 가시덤불과 지의로 뒤덮인 그 심장이 질식당한다. 생각은 어디로, 어떻게 돌아서서 달아나야 할지 더는 알 수 없다. 시큼한 개밀이 갉아먹은 생각 위로 어둠이 내린다. 그 일이 언제 가시화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 그게 전부다. 무엇보다 죽음의 순간에야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게 끔찍하다. 대개는 후회할 시간조차 없다. 벌거벗겨진 생각은 무방비 상태가 되어 우왕좌왕한다. 고통과 두려움에 빠진 생각은 이제 휴식도, 출구도, 희망도 찾을 수 없다. 후회 때문이 아니라 그저 겁을 먹어서다. 범죄는 저질러진 뒤에도 오래오래 지속되는 행위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 범죄가 불러일으킨 공포는 뒤돌아서서 그 원천을 덮치기 때문이다. --- p.208 자신의 시선을 끝없이 증식시키고 왜곡하며 거울 속을 응시한 덕에 그녀는 자아를 포기하면서 자신의 증오와 고통을 잊었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그 비밀을 부지중에 즐기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오빠의 ─ 밤의 방문자였던 오빠의 ─ 눈으로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다. 감히 인정하진 못해도 자신이 가공의 영웅적인 인물들로 왜곡되고 확대되는 걸 보는 데서, 또 스스로를 범죄와 방탕의 비밀스러운 밤의 작은 여왕으로 응시하는 데서 불안한 쾌감과 수치스러운 기쁨을 느꼈다. 그런데 이 사악한 기쁨, 고백할 수 없는 쾌감이 그녀의 분노를 더한층 돋우었다. 그녀를 공범으로 만든 그 식인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분고분한 만큼이나 반항적인 노예였다. 그녀는 동시에 너무 많은 인물이 되어 그 무리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식인귀를 상대로 벌이고 싶어 하는 전쟁은 그녀 자신마저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식인귀의 뒤를 이어 그녀 안으로 침범한 그 모든 다른 자아들과 그녀 자신 사이에서, 그녀는 오로지 거울을 마주하고 싸울 뿐이었다. --- p.237 뤼시는 땅에 이마를 갖다 댄 채 운다. 3년이 지나고서야 그녀는 불쑥 눈물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러나 기쁨의 맛은 여전히 빼앗긴 상태다. 아주 오랫동안 뤼시는 기쁨과 무관하게 살아갈 것이다. 너나없이 이미 식인귀의 표징들로 얼룩진 사람들 사이에서 추방당한 상태로. --- p.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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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 속에서 파괴되는 세계
늪과 숲과 황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여덟 살 소녀 뤼시는 상상력과 생명력으로 충만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새들과 다양한 동식물,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이 세계는 평온하고도 아름답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데, 뤼시는 자신의 영웅이기도 했던 이부異父 오빠 페르디낭으로부터 강간당하며 3년에 걸쳐 밤마다 같은 일을 겪게 된다. 이 잔인한 사건 이후, 그녀의 세계는 침묵과 공포로 뒤덮인다. 수치와 고통이라는 비밀에 잠식된 뤼시는 점차 마르고 추하며 증오로 가득 찬 존재로 변해간다. 어른들의 무지와 방관 속에서 고립된 뤼시는 인간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늪과 자연의 생명들 곁으로 스며든다. 그렇게 그녀의 내면에서 한 아이의 침묵은 점차 응시의 힘으로 변모하고, 오직 자신의 시선이 지닌 힘, 메두사의 눈과도 같은 응시로 이 폭력에 맞선다. · 고통을 감각으로 기록하는 문학 『메두사 아이』는 근친싱간이라는 극단적이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고발이나 재현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실비 제르맹은 폭력 이후의 시간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침묵이 어떻게 한 인간의 내부에서 언어와 형상으로 변해가는지를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고통은 설명되지 않고, 대신 감각과 이미지, 리듬을 통해 체험된다. 비극적인 서사 위에 덧입혀진 서정적인 문체는 잔혹함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내면이 끝내 파괴되지 않음을 증언한다. 더불어 뤼시를 둘러싼 인물들의 사랑과 희망, 좌절의 장면들은 비극 속에서도 삶이 지닌 다층성과 아이러니를 드러내며, 독자를 단일한 감정이 아닌 복합적인 정서의 결로 이끈다. · 고통을 통과한 응시, 상처를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법 『메두사 아이』의 핵심 주제는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폭력 이후에도 살아남은 존재가 세계와 맺는 관계의 변화이다. 순수는 되돌릴 수 없지만, 기억과 응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메두사의 신화를 변주한 이 소설에서 ‘응시’는 복수가 아니라, 침묵을 침묵으로만 남겨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형태다. 색채와 음향으로 가득한 회화적인 산문은 매 페이지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내면의 풍경을 펼쳐 보이며, 고통과 시가 하나의 노래로 공존하는 세계를 완성한다. 『메두사 아이』는 잔인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깊이 아름다운 소설이다. 상처를 넘어서는 구원이 아니라, 상처를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법에 대한 문학적 응시다. “실비 제르맹은 전 세계 인류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고통과 악의 실재를 마주하고 동시에 생명과 희망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작가이자 언어를 통해 소설 장르의 오래된 가능성을 현대적 맥락에서 새롭게 창조하고 확장하는데 기여하는 작가이다.” -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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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하면서도 엄숙한 비극을 읽다가 전율 속에서 밤을 샜다.” - 구병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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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 제르맹은 오늘날 유럽 문학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강력한 목소리 중 하나다.” - 조지 스타이너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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