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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평온한 풍경 뒤에 감춰진 보이지 않는 진실 · 5
검은 수선화 · 17 |
Rumer God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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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 들어간다는 건 고요 속으로, 아무리 축축하고 캄캄하더라도 따뜻함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여야 하지만, 궁전에 들어가면 금세 한기가 정강이를 감쌌다. 집 안에 있어도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바람은 마룻널 사이로, 천장 장식 천과 지붕 사이의 통로를 타고 안으로 들어왔다. 모푸의 궁전에서 살기 위해서는 바람 소리, 그리고 귀와 발목 주변을 감싸는 한기와 언제나 함께해야 했다.
--- p. 46 “오래도록 생각해 봤는데,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거기는,”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꼭 세상의 끝자락 같습디다. 실제보다도 훨씬 더 외딴곳 같고요. 어쩌면 너무 광활해서 그래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도 거세고요! 물론 아주 청정해서 건강에는 좋을 만한 곳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반드시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자매님. 너무 외롭거나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곳 환경에 현혹되지 말고 말씀하세요. 내가 괜한 말을 해서 자매님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게 아니어야 할 텐데.” --- pp.54-55 “과거에 장군님의 부친께서 이곳에 여인들을 두셨습니다.” 미스터 딘이 전에 말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이 여기를 ‘여인의 집’이라고 부르죠. 여기 오기로 결정하신다면, 참 걸맞은 이름이 아닐 수 없겠네요. 안 그렇습니까?” 여태 무례하던 미스터 딘이 이제 대놓고 적대적으로 굴었고, 그건 관리인이라는 노파 앙구 아야도 매한가지였다. --- pp.66-67 “이곳 사람들에게는 명령할 수 없습니다. 명령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거든요.” “모르면 배워야지요.” 클로다 수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죠?” “하라는 대로 하는 게 그들에게도 더 좋으니까요. 그게 규율이잖아요. 누구에게나 규율이 필요하고요.” “왜죠?” “조금 전에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이곳 사람들이 ‘아이들 같다’고 말이에요. 규율이 없으면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어요.” --- pp.93-94 그러나 여기 이 집은 고요할 새가 없었다. 사생활을 깡그리 쓸어버리는 바람 속에서 집은 쉬지 않고 삐걱삐걱 울어댔다. 모푸에는 사생활이랄 게 없었다. 모든 소리가 집 안으로 들어왔고, 유리창으로 된 방문들은 끝없이 긴 복도를 향해 나 있었으며, 그 복도를 하인과 일꾼들이 늘 지나다녔다. 가끔 텅 빈 듯한 느낌이 들 때면, 마치 이 집이 모두를 집어삼켜 버린 듯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럴 땐 몇 분을 걸어도 마주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이 집이 그들을,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모든 규율까지 꿀꺽 집어삼켜 버린 것 같았다. 그들은 오랜 익숙함에 묻혀버렸고, 성상들은 낱낱이 흩어진 묵주 알처럼 여기저기 놓여있었으며, 실처럼 가늘게 이어지던 종소리마저 어느새 뚝 끊겨 버렸다. --- p.106 그날 밤 클로다 수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강둑의 장례식 생각을, 쿤드라라는 청년의 시신 생각을, 음산한 나무 아래 장작더미와 횃불 주변을 빙빙 바쁘게 돌던 남자들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죽는 건 숱하게 봐 왔지만, 피부색도 종교도 낯선 젊은 외국인의 죽음을 목격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밤이 되자 더욱 끔찍했다. 그녀는 뜬 눈으로 누워 궁금해했고 슬퍼했다. 머릿속이 점점 더 혼란해졌다. 횃불이 물에 비치는 강둑에 어린 장군이 서 있기도 했고, 고향 집 하얀 현관문 앞 포치의 불빛 아래 콘이 서 있기도 했다. 바람이 불꽃을 흩뜨릴 때마다 나무들이 반짝였고, 월계수 덤불이 계단 옆에서 살랑이며 바스락거렸다. --- pp.123-124 “예에…….” 로버츠 신부가 주저하듯 말했다. “모두 훌륭해 보입니다. 아주 훌륭해요. 그래요, 확실히 그렇죠. 그런데…….” 그가 말을 멈추고 클로다 수녀를 바로 보았다. “자매님, 혹시 무슨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하시죠?” 클로다 수녀가 착실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지만, 뭔가 변한 것 같습니다. 네, 다들 변한 것 같아요. 내 오랜 벗인 브라이오니 자매님만 빼고요. 브라이오니 자매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죠.” “저희가 어떤 면에서 변했나요?”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콕 집어 말할 순 없습니다만, 다들 뭔가 달라진 것 같아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데요. 꼭 여러분 모두가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아무 일 없었던 것, 맞지요?” --- p. 219 “그렇다고 말할 용기가 없는 거겠죠. 언제나 자기 자식을 갖고 싶어 했으니까요. 그래요.” 루스 수녀는 다른 수녀들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낮게 속삭였다. “자기-자식을-낳고-싶어-해요.” 그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소리쳤다. “그렇다고 인정할 리는 없겠죠. 입 밖으로 꺼내기 겁날 테니까요.” --- pp.301-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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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산맥의 외딴 산골 마을 모푸. 영국의 한 수도원은 그곳에 수녀들을 파견한다. 과거 어느 인도 왕족이 자신의 여인들을 머물게 했던 궁전, 속칭 ‘여인의 집’이라 불리던 장소를 성스러운 공간으로 바꾸고, 학교와 병원을 세워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수녀들은 각자의 임무에 몰두한다. 그러나 궁전을 소유한 왕족의 대리인이자 이미 모푸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는 영국인 관리자 미스터 딘은, 이 시도가 실패로 끝날 것이라 단언하며 그들에게 돌아갈 것을 권한다. 수녀회의 최연소 분원장인 클로다 수녀는 거칠고 야성적인 그를 경계하지만, 건물 보수를 위해 그가 수녀원 안을 드나드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
한편, 처음에는 경이롭기만 했던 히말라야의 압도적인 자연과 낯선 환경은 점차 수녀들의 내면을 흔들기 시작한다. 고립된 공간 속에서 억눌려 있던 기억과 감정이 되살아나고, 개인의 욕망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공동체 내부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긴장과 균열이 번져 간다. 수녀원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펼쳐진 설산과 끝없이 이어지는 바람,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고독은 그들을 점점 궁지로 몰아넣는다.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버티려 하지만, 그 의지의 중심에는 더 이상 신이 자리하고 있지 않다. 굳건한 신앙으로 유지되던 이 작은 공동체는 점차 파국으로 치달으며, 예측할 수 없는 광기와 비극의 장으로 물들어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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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순간,
인간의 발걸음은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까? 『검은 수선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한 수녀가 뱉은 짧은 고백이다.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심고 있는 감자는 눈에 들어오질 않고, 감자를 심는 일이 아주 하잘것없게 느껴져요.”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앞에서, 그녀가 수행하던 일은 갑자기 의미를 잃는다. 이 장면은 이 소설이 다루는 균열의 본질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인간이 스스로 중요하다고 믿어온 가치와 질서는, 어떤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시선의 변화만으로도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루머 고든은 이 작품에서 인간의 내면이 무너지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감각과 인식이 아주 미세하게 어긋나는 순간들을 반복적으로 쌓아 올린다. 낯선 환경, 설명하기 어려운 동요, 그리고 점차 흐려지는 확신. 이러한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축적되다가,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균열로 이어진다. 신 앞에 무릎을 꿇고 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맹세한 이들이지만, 혼란 속에서 각자의 기댈 곳을 찾으며 점차 자신의 본분을 망각해 간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욕망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먼저, 욕망을 억제해 온 체계가 어떻게 흔들리는지에 주목한다. 인물들은 여전히 기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정원을 가꾸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믿지만, 그 행위에 부여되던 의미는 서서히 탈색된다. 그리고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는, 이전에는 의식되지 않았던 감정들이 스며든다. “자매님. 너무 외롭거나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곳 환경에 현혹되지 말고 말씀하세요.” _본문 중에서 특히 이 작품은 ‘환경’이 인간의 인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고립된 공간과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시선을 멀리 끌어당기는 압도적인 풍경은, 인간이 붙잡고 있던 현실의 크기와 대비된다. 그 결과, 지금까지 절대적이라 믿어왔던 가치들은 어느 순간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거의 피할 수 없는 과정에 가깝다. 수녀들은 매일 밤낮으로 히말라야산맥을 마주 보며,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이미 이전과는 다른 상태로 변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억눌려 있던 감정과 욕망이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수선화』가 끝내 남기는 것은 비극적 결말이나 단순한 파국이 아니라, 그 파국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통찰이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규율을 따르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만들 수는 없다. 억눌린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단지 더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순간, 그것들은 다시 깨어난다. 『검은 수선화』는 의미가 흔들리고,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소설이다. 책을 덮고 나면, 우리가 붙잡고 있는 신념과 질서가 과연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다시 묻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