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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산바라지 8 석전동 30 너무 아팠던 시절의 가을 저녁 52 시간의 금에 물드는 가을빛 74 운명의 보랏빛 98 행복한 여자들 116 적광묘토(寂光妙土) 138 하얀 등 158 안젤라 184 모란이 다시 피어날 때 204 쑥갓 224 얼어붙은 호수에 부는 바람 2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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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변화에 둔감하고 안정적인 것에 익숙했던 서희, 아니 원래 시골 소녀였던 서희에게 도시는 무한한 자유와 꿈과 희망과 생동감을 주었다. 그 반면에 외로움과 자신을 작고 초라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 거대한 괴물,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어디선가 자신을 지시하거나 감시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곤 했다. 위축의 뒤에는 무거운 침묵이 찾아오고 침묵이 오래되어 가니 무표정해지거나 짙은 우울이 찾아왔다. 그런 가운데서도 서희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과 다가오는 사람들, 혹은 서희 쪽에서 다가가는 사람들 이런 인간관계 속에서 서희는 어떤 때는 거대한 밀림 속에서, 이 도시를 움직이는 거대한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안에서 빠르거나 한없이 느려 권태스럽게 가동되는 기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이 거대한 도시를 작동하고 있을까, 그는 잠을 자지 않고 24시간을 제어하고 있을까, 당번을 정해서 불침번을 서고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K가 접근을 했을 무렵만 해도 대학 4년간 혼자 살다가 서울 언니네 집 식구들과 함께 사는 것도 쉽지만은 않을 무렵이었다.
--- 「석전동」 중에서 금요일의 밤거리는 꺼지지 않는 욕망의 붉은 불빛으로 흥청망청하고 있었다. 거대한 욕망의 질주는 거리 한가운데로 굉음을 폭발시키면서 시야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럴 때면 차들도 사람들도 귀를 찢는 소리의 폭력에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검은 어둠과 붉은 불빛의 조화를 흔드는 소리의 폭발은 도시가 뿜어내는 온갖 종류의 크고 작은 소리를 일거에 거두어 잠시나마 먼 곳으로 내던져 버리고 빛의 속도만큼이나 재빨리 원래의 소리로 돌려놓는다. 그것은 마치 괴물 같은 소리를 지르는 거대한 짐승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쳐 쓰러지게 하는 위력을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폭발음이 사라져간 거리의 포장마차는 널따란 찻길에 매달리듯 올망졸망하게 늘어서서 환한 등을 켜고 밤손님들을 부르고 있었다. 폭발음이 아무리 밤의 대기를 뒤흔들어도 생존을 향한 천막 안은 초 한 자루 켜고 기도하듯 불빛의 소망을 꺼뜨릴 수 없었다. ---「하얀 등」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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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않게 되었으니 책을 읽었던 모양이다. 일 년 정도 후에 나는 다시 말을 찾았고, 아이들과 예전처럼 놀기 시작했다. 동화 다음으로 소설이 나에게 왔다. 나는 힘들 때마다, 아프고 난 후 회복기에 있을 때마다 소설을 읽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회복하기 위해 소설을 읽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내가 쓰는 것을 소설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쓰면서 소설이 되어 가는 어떤 것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원래 일기를 썼고 지금도 종종 쓰고 있다. 그리고 시를 썼고 한동안 멈추었다가 다시 시심을 회복하여 현재까지 쓰고 있다. 그러면서 시 평론도 하고 있다. 소설을 쓰게 된 것은 내가 삼각산이 있는 동네로 이사 오면서 이 지역의 작가들과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분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일상 속에서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같이 먹으면서 나는 소설이 쓰고 싶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소설이 되겠는가? 나는 먼저 소설 비슷한 것부터 써보기로 했다. 써보니까 어떤 때는 재미도 있고 외로운 내가 나의 창 앞에서 혼자 수다를 떨기도 하는 것 같은 착각에도 빠지고, 어떤 힘들었던 기억을 재현해 볼 때는 고통스러워서 중단하거나 겨우 다 쓰고는 앓기도 하였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나를 들여다보기도 하였고 속 좁은 내가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한 것 같다. ‘당신은 왜 소설을 쓰는가요’라고 묻는다면 아마 내 안의 못된 놈의 정체를 발견하고, 그놈을 나로부터 끌어내는 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설의 그릇에 담아내어 한 번 끓이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놈이었다. 여러 가지 잡철이 용광로에 들어가 용해되어 선철이 되듯이 소설은 나에게 용광로가 아닌가 싶다. 불순물을 걸러내고 선철이 되도록 하는 데 소설이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는 것이다. 장마철에 뽑아도 또 올라오는 잡초처럼 글을 쓰는 것은 풀 뽑기가 아닌가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댄스 댄스 댄스』에서 ‘쓴다는 것은 눈을 치우는 것’이라고 했다. 나에게 소설은 ‘풀 뽑기’일 것 같다. 어차피 이 길은 잡초가 심하게 자라서 길이 보이지 않은 길이었다. 뽑아낼 수준이 아니라 큰 낫으로 베어내면서 지나가야 할 길이 아니었던가 싶은 것이다. 일상의 흐름에서 그 흐름을 깨는 것이 있다. 나는 살아온 것 중에 그 흐름을 깨는 것에 대해 집요하게 용광로에 넣어볼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풀 뽑기를 하듯이 뽑아내기 위하여 없는 길도 만들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소설 창작은 나에게 하나의 도전으로 유혹하고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소설의 신이신 분들께서 보셨을 때 서툰 것도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열두 편의 단편집을 기꺼이 출판하시겠다고 나를 격려해주신 청어출판사 이영철 대표님, 소설 창작에 대해 조언을 주신 소설가 박정규 선생님, 고 김중태 작가님, 박소연 작가님, 우이동 작가분들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부족한 첫물이지만,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다. 2026. 3. 삼각산 아래에서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