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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하나
제1부 물의 지문 | 가시의 시 | 그늘 소묘 | 등꽃 아래 | 깃털의 꿈 | 둥지의 시 | 밤과 사물 1 | 밤과 사물 2 | 꽃의 크레인 | 다리미의 생 | 물의 문신 | 겨울의 선(線) 1 | 겨울의 선(線) 2 | 빈 껍질 | 돌꽃 | 숨 터 | 감자꽃 소묘 | 색 계 | 육필의 서(書) 1 | 육필의 서(書) 2 제2부 새의 집 | 푸른 손 | 인동꽃 소묘 | 새의 의자 | 여울 | 일렁임, 일렁임들 1 | 일렁임, 일렁임들 2 | 불빛 따라 | 투영 | 발광체 | 밤의 집 | 섬 | 탄생 | 옹이 7 | 옹이 9 | 눈사람 | 실버들 | 목어(木魚) | 피사체 제3부 母法 1 | 母法 2 | 상상으로 연주하는 피아노 | 라쿠카라차 | 넙치 | 기도하는 손 | 폐가의 꿈 | 연탄불 | 헌책방 | 깡통 | 양파의 시 | 못의 체위 | 둘레춤 | 수의 1 | 수의 2 | 물고기 무덤 | 물그림자 1 | 물그림자 2 | 풀의 의자 제4부 연(緣) | 소신(燒身) | 골목에 대하여 1 | 골목에 대하여 2 | 어떤 삶 | 쇼윈도 | 붕어빵 | 한 끼의 식사 | 부릅뜬 눈 | 나무의 뿔 | 망각 | 소금의 집 | 의자 | 하루의 꿈 | 날인(捺印) | 연탄 | 헛꽃에게 | 화음 해설: 텅 빈 중심의 감응_구모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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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만들어 내는 동심원들, 작은 파문들
마른 풀의 눈시울을 적시는, 물의 숨결들―. --- 「물의 지문 전문」 중에서 잎 다진 겨울 실버들의 가지들을 보면, 허공에 무수히 돋은 실핏줄 같다. 자꾸만 텅 비어가는 의식의 끝까지 수액을 밀어올리기 위한 실버들의, 그 꿈의 모세혈관 같다. 겨울빛에도 차갑게 빛나는, 저 은백색의 모발들은―. --- 「실버들 전문」 중에서 물에 비친 형상은 명명하는 순간, 지워진다 아무런 의미 없음의 의미는 그렇게 물의 그림자로 흘러간다 바라보는 순간의 아름다움, 이름 짓지 않은 것들의 이름―. --- 「물 그림자1 전문」 중에서 의자는, 사람이 앉을 때 의자가 된다. 사람의 체온으로 젖어 있을 때 의자는 제 얼굴을 지닌다. 저기,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의자 하나 이제는 낡고 퇴락해 있으면서도 사람이 버리고 간 흔적 하나에도 저렇듯 간절한 몸짓을 내비치고 있다 ---「의자 전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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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 속으로 스며들어 텅 빈 중심에 닿다
저 등꽃, 환하다. // 제 그늘 너무 짙어 등 하나 켜 놓은 것 같다. // 빈자(貧者)의 일등(一燈)도 저와 같을까 // 대낮에도 밝게 켜 놓은 // 저 등, 아래 서면 // 그래, 누군가 발 헛디딜 이 없겠다. _「등꽃 아래」 표제 「등꽃 아래」가 암시하듯, 이 시집은 화해와 합치, 낙관과 긍정의 지평 위에 서 있다. “빈자의 일등”처럼 가장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삶의 공덕을 쌓은 결과이다. 시인은 피고 지는 등꽃의 이미지 아래에서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덧없음 응시한다. 사물과 같은 높이에서 세계를 감각하며 삶을 해석하기보다 그 흐름 속에 자신을 놓아두고 존재의 리듬에 몸을 맡긴다. 나아가 시인은 “명명하는 순간” “물에 비친 형상”(「물그림자 1」에서)처럼 사물이 지워진다고 말하며 소유와 지배를 경계한다. 그는 언어로는 세계를 붙잡을 수 없다고 인식하며 세계를 유영한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쓰인 시는 사라짐과 공백 속에서 새로운 질문과 감응을 생성하기 위한 시도이다. 사물과 존재가 간격 없이 감응하는 자리 김신용 시의 특징은 사물을 인간의 시선으로 재단하지 않는 데 있다. 그는 세계를 대상화하지 않고 사물과 존재가 서로 물들고 눈빛으로 감응하는 무매개의 과정을 드러낸다. 「가시의 시」에서 탱자나무의 가시는 “무엇을 찌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햇살과 물기를 간직하기 위한 것이라 말하며, 통상적 인식을 전복한다. 옹이가 빠진 뒤의, 저 나무의 빈 구멍. 그래, 한때 이것은 상처였다. 달빛 한 점 흘러들지 않는 빈집이었다. / 그러나 언제부턴가 새 한 마리 찾아들었고 // 그것은 숨결이었다. // 빈 목관에서 차오르는 음악이었다. _「둥지의 시」 「둥지의 시」에서는 상처로 남아 있던 빈 공간이 어느 순간 생명의 거처로 전환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처럼 김신용 시는 ‘버려짐’과 ‘생성’의 긴장을 관통한다. 시인은 버려진 것, 비어 있는 것, 사라진 것들 속에서 오히려 생의 가능성과 숨결을 발견한다. 이러한 시선은 대상과의 거리를 지우고, 간격 없이 존재와 존재 사이의 감응을 가능하게 하며 비워짐을 허무가 아닌 끊임없이 질문을 생성하는 자리로서의 공백으로 만든다. 그 결과 시인의 시세계는 “어디선가 던져진 한 줄기의 빛”이 “삶의 빛이”(「불빛 따라」에서) 되듯 상처와 고통의 자리에 새로운 생의 가능성이 움튼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순환으로 흐르는 자리 이 시집에는 노년에 이른 시인이 체득한 삶의 감각이 깊이 스며 있다. 마른 풀을 “오직 뼈만 남긴 몸의 골격미”(「겨울의 선(線) 1」에서)로 바라보거나, “풀의 실로 만들어져 삭으면 흔적도 없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흙으로 돌아가 다시 풀의 옷이 되는 것”(「수의 2」에서)이라 말하며 생의 순환을 사유하는 시선은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는다. 김신용 시인의 시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세상에 버려진 삶은 없다”(「깃털의 꿈」에서)는 시적 진술처럼 가장 낮고 버려진 자리에서 시작된 시는 사물과 세계 전체로 확장되며 하나의 순환적 인식에 도달한다. 시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형식의 존재이며, 소멸은 새로운 생성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시인이 궁극적으로 그리고자 했던 것은 “서로가 서로의 벽이 되어주는 혼신의 포옹”(「육필의 서(書) 2」에서)처럼 모든 존재가 ‘서로 삶’을 사는 세계다. 버려진 것들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해 사물과 세계 전체를 공명하는 자리까지 나아간 시인의 여정. 그 마지막 언어가 이 시집에 깃들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