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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최은영, 백지 앞에 서다
소설가 최은영의 첫 산문집. 최은영이라는 한 명의 작가이자 개인을 이루는 감정, 생각, 변화의 기록을 전한다. 약점과 취약함을 숨기지 않는 순백의 문장들, 글쓰기를 통해 살아감의 영역을 넓혀온 그가 통과한 시간들을 담아낸 책.
2026.05.08.
에세이 PD 이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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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버려진 일기장에게 … 007
백지 앞에서 … 021 당신이 더는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기분 … 051 긴 겨울 … 067 천천히 달리기 … 099 혼자 사는 연습 … 135 못생겼다는 느낌 … 159 그때의 은희들에게 … 181 174517 … 201 그날 이후 … 227 인간과 동물 사이 … 249 에필로그|나의 거의 모든 것 … 2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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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추동하고 나아가게 하는 내 안의 이야기,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삶의 방식, 쓰지 않으면 어째서인지 약해지고 마는 나의 존재.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백지 앞에 서게 한다.
--- p.49 「백지 앞에서」 중에서 글쓰기는 나 자신을 계속 대면하게 하여 나의 취약성을 인정하게 했다. 그리고 언어로 그 취약성을 드러내기를 원했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나의 가면을 깨뜨리기를 원했다. 그건 내가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 호감과 비호감의 대상을 넘어선 나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진짜가 되고 싶었다. 그게 어떤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 p.64 「당신이 더는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기분」 중에서 사람들의 말처럼 상처를 잘 극복하여 성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타격을 받더라도 잘 맞서 싸우고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 같은 말이 옳다고 여길 수 있다면. 내가 경험한 고통은 나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나를 강하게 하지도 않았다. 어떤 상처는 내 마음의 구조를 비틀어 내가 원하지 않은 모양으로 바꿔놓았고, 사람을 덜 믿게 만들었다. 마음의 힘을 고갈시켜서 나를, 타인을 사랑하는 힘을 앗아가기도 했다. --- p.92 「긴 겨울」 중에서 내 진짜 삶은 언젠가 어떤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불완전해 보이는 여기에 있다. --- p.97 「긴 겨울」 중에서 4월은 변덕이 심한 달이다. 하루는 패딩 코트를 입어야 할 정도로 춥다가 다음날에는 바람막이만 입어도 덥고, 열기에 가까운 온기가 가득한 오후 뒤에 갑작스럽게 차가운 비가 내리는 식이다. 그런 와중에도 나무와 풀은 아랑곳없이 새잎을 낸다. 나는 그런 4월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 p.115 「천천히 달리기」 중에서 언제쯤 삶은 결코 통제할 수 없으며 삶의 사건들은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언제쯤 모든 규칙을 깨고 펼쳐지는 삶의 불규칙성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연약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이 모든 일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 p.125 「천천히 달리기」 중에서 외로움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혼자‘여서’ 외로운 것은 아니지만 혼자‘여도’ 외로울 수 있다. 함께‘여서’ 외로운 건 아니지만 함께‘여도’ 외로울 수 있듯이. --- p.156 「혼자 사는 연습」 중에서 그래서 나는 나의 사소한 이야기를 글로 쓴다. 이 이야기가 특별하거나 대단해서가 아니라 나의 진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의 상처뿐만 아니라 당신의 상처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 p.178 「못생겼다는 느낌」 중에서 어려서는 욕망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나를 욕망의 대상으로 두는 상황이 더 익숙했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람, 사랑받을 만한 사람, 호감 갈 만한 사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욕망하지 않는 ‘못생김’이라는 것을 내 얼굴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내가 외모에 집착할수록 나는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져갔다. 나는 나를 그저 하나의 외적 대상으로 축소해 바라봤다. 그것도 신랄하게 비난하고 뜯어고쳐야 할 대상으로. 욕망의 대상에서 욕망의 주체로 나아가려 했던 노력이 내가 경험한 성장의 과정이었다. --- pp.178-179 「못생겼다는 느낌」 중에서 누군가는 잊고, 누군가는 정당화하고, 누군가는 오래도록 그 기억을 소화하지 못한 채로 꿈속에서 빈 교정을 걸어 다닌다. --- p.186 「그때의 은희들에게」 중에서 마음은 단죄의 대상이 아니다. 비록 그늘지고 아픈 마음이더라도 그 마음을 억누를 필요도,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되지 않는데 억지로 자신을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된다. --- p.197 「그때의 은희들에게」 중에서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화학자였던 프리모 레비가 작가로 다시 태어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기억하기를 선택했다. 기억하고 말함으로써 침묵을 깨뜨리기로. --- p.221 「174517」 중에서 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 사회의 인간성에 대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애도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이자 동시에 인간의 권리이기도 하다. 애도의 기간과 방식은 오로지 애도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 p.237 「그날 이후」 중에서 이 모든 일이 한 마리의 고양이를 사랑하면서 시작됐다. 고작 한 마리의 고양이를 사랑했을 뿐인데 세상의 모든 동물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 p.262 「인간과 동물 사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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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새잎을 내는 봄부터 한기로 가득찬 겨울까지
무한히 펼쳐진 시간 앞에 선 유한한 우리에게 『백지 앞에서』는 삶에 드리운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껴안을 수 있을지 오래도록 고민한 사람의 기록이다. 누군가에게는 종이 한 장의 무게를 지닌 사소한 문제가 누군가에게는 온몸을 짓누르는 무거움으로 다가가듯이 우리 각자가 삶에서 느끼는 어려움은 상대적이고, 그렇기에 절대적이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하는 것 자체가 “만인에게 (…) 패를 보이는”(17쪽) 어리석은 일로 비칠 수 있는 것이다. 약점과 취약성을 감추는 게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여겨지니까. 하지만 최은영은 그것을 모두 노출하는 쪽을 택한다. 이 삶은 내가 무언가를 더 얻거나 잃는 승부의 세계가 아니라, 나의 약점과 취약성을 인정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진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최은영이 첫번째로 털어놓는 것은 ‘진짜 감정’에 대해서이다. 최은영은 결핍이 많은 사람으로 보일까봐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르거나,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 타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던 시간에 대해 말하며 그 근간에는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하는 깊은 자기혐오가 있었음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 같은 말이 칭찬으로 쓰이는”(63쪽) 상황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사랑받는 사람”(64쪽)으로 보이고 싶었다는 작가의 고백은, 자신의 감정과 욕망의 키를 다른 사람에게 내맡긴 적이 있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두번째는 ‘유약한 상황’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오래도록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오다 몇 년 전부터 혼자서 살아가고 있다. “자발적으로 독거를 선택했지만, 애초부터 혼자 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고, “내가 꿈꿨던 미래에는 아이를 낳거나 입양하여 양육하는 모습이 언제나 존재했다”(138~139쪽)는 말처럼 작가에게 ‘혼자 사는 삶’은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정확히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날씨처럼 언제든 허를 찌르며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펼쳐지는 삶, 최은영은 그런 삶 앞에 여러 차례 서 있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최은영이 현재의 삶을 오래전에 바랐던 삶의 기준에 맞추어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은영은 과거와 현재의 낙차를 진솔하게 보여줌으로써 삶의 유동성을, 불규칙성을, 연약함을 끌어안는다. 그것은 매 순간 달라지는 삶을 새롭게 배우며 살아내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인식이 부서지는 순간’에 대한 것이다. 달라지는 것은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만이 아니다.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또한 변화한다.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또는 이전과는 다른 낯선 세계에 진입하면서. 최은영은 대학생 때 ‘여성주의 교지 편집부’에 가입하기로 결심한 순간이 인생의 큰 방향을 좌우하는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마치 “평생을 근시로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어느 날 안경을 쓰고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본 사람처럼”(25쪽) 그전과는 다른 빛깔과 형태를 지닌 세상이 펼쳐졌다고. 최은영은 동물에 대한 생각도 변화를 거쳤다고 말한다. “고작 한 마리의 고양이를 사랑했을 뿐인데 세상의 모든 동물에 대한 시각이 달라”(262쪽)졌다고 말이다. 두툼한 교지 한 권, 길에서 마주친 노란색 치즈 고양이 한 마리, 억눌러왔던 내 욕망을 일깨우는 책 속 어떤 문장 하나… 『백지 앞에서』는 인생은 크고 거대하지만, 그것의 구조를 바꿔놓는 것은 자그마한 무엇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삶은 예상치 못한 속성 탓에 우리에게 어려움을 안기고, 동일한 바로 그 속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뜻밖의 무언가를 건넨다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당장 판단하지 않으려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나는 작가로서의 내가 인간으로서의 나를 피해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삶의 전부를 살아내는 사람, 최은영을 이루는 거의 모든 것 그리고 무엇보다 『백지 앞에서』가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글쓰기에 삶의 거의 전부를 건 작가의 모습이 책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은영은 데뷔하기까지 여러 공모전에서 고배를 마셨고, 데뷔하고 예상치 못한 성공을 가져다준 『쇼코의 미소』 이후에도 일종의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리며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여왔다. 첫 책이 나오고 몇 년 뒤에는 “소설은 물론이고 메일이나 일기를 쓰는 것조차 어려운 시기”(39쪽)를 겪기도 했다. 최은영은 그런 시간을 다른 무엇도 아닌 글쓰기를 통해 서서히, 그리고 끝내 돌파해왔다. 그렇기에 이번 책에서 최은영이 자신이 ‘죽거나 되살아나는’ 순간을 글쓰기와 연결해서 말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최은영은 오랫동안 데뷔하지 못했던 시기에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제 꿈을 꿨는데 길몽인 것 같다면서 백원을 주고 사라고 했다. 내가 죽는 꿈이었다.”(37쪽) 그리고 짧지 않은 시간 글을 쓰지 못하다가 마침내 장편소설 『밝은 밤』을 완성한 순간에 대해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밝은 밤』을 쓰면서 작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소생했다.”(41~42쪽) 『백지 앞에서』가 극적인 모험담인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스펙터클함이 있다면, 그것은 글쓰기로 자신의 한계를 밀어붙이고 삶의 영역을 넓혀온 작가의 안간힘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다. 최은영은 이번 책을 준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세이에서 독자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간인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타인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는 기분을 느낀다”(10쪽)고.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고 난 우리도 그 어느 때보다 최은영 작가가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그의 밝은 면모만 취하는 게 아니라 그의 어두움, 슬픔, 고통 또한 함께 받아들이는 과정임을. 그런 관계의 본질을 『백지 앞에서』는 마음을 아프게 할 정도의 담백한 담담함으로 보여준다. 누군가의 사적인 고백이 다른 누군가를 일으켜세울 수도 있다는 것은 새로운 진실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의 가장 깊숙한 바닥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들여다본 후에도 여전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최은영만의 놀라운 힘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