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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삶은 아주 미세하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다마을 리와인드 - 주해진 사라진 것들의 향기 - 김주욱 서쪽 사원 - 전현서 못난이 인형 - 이월성 항하사 한 줌 - 이종숙 스콜 - 김태정 델리스파이스 - 심예주 50센티미터 너머 - 임미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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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수건의 자리만큼, 조금의 빈틈이 생겼다. 그리고 그 빈틈으로 새로운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 p.34, 「바다마을 리와인드」 중에서 엄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잘 말린 시래기 한 묶음 같았다. 어깨뼈가 손에 닿을 때마다 부서질 것 같아, 나는 몸을 힘껏 안지도 못했다. 엄마에게서 슬픈 냄새가 났다. 꿉꿉하고 마른 인비늘 냄새였다. --- p.56, 「사라진 것들의 향기」 중에서 “맞아요, 우리는 뭐든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를 쓰죠. 그런 행동은 사실 두려움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그런 두려움이 우리를 살게 하기도 하죠.” --- p.78, 「서쪽 사원」 중에서 3분이면 딱딱한 면과 가루가 짜장면이나 카레, 수프로 변하는 마법을 부리는 시간이다. 있던 게 없어지기도 하고 없던 게 생기기도 하는 시간.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건 당연하다. --- p.97, 「못난이 인형」 중에서 항하사에 마음을 담으면 그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 p.144, 「항하사 한 줌」 중에서 “과거를 리셋하는 최고의 방법이 뭔지 아세요?” 지선은 겸손하게 답을 기다렸다. (중략)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새로운 사랑입니다. 증오도 분노도 부끄러움도 사랑 앞에서는 힘을 발휘 못 해요.” --- pp.170-172, 「스콜」중에서 뿌리 없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처럼 둥실둥실 부유하는 거야. 그렇게 흔들리지… 그래서 늘… 혼란스럽지. --- p.188, 「델리스파이스」 중에서 남자와의 거리가 겨우 50센티미터인데도 수아는 소리 내어 남자를 부르거나 만질 수가 없었다. 순간 수아는 자신은 그랜드 캐니언 위에, 남자는 협곡 아래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 p.226, 「50센티미터 너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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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끝난 일’로 정리하곤 합니다. 이미 지나갔으니, 이제는 말해도 소용없으니, 지금은 다른 삶을 살아야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말, 사라졌다고 믿었던 얼굴, 잊었다고 생각했던 냄새, 끝내 꺼내지 못한 고백 같은 것들은 마음 한쪽에 남아 있다가 어느 날 예고 없이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삶은 아주 조용히 멈추거나, 혹은 아주 미세하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앤솔러지에 실린 이야기들도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끝난 줄 알았던 계절과 관계,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다시 돌아와 우리 앞에 조용히 서는 순간들입니다. 이 작품들은 그 기억을 억지로 밀어내거나 덮어두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남아 있는 감정의 결을 천천히 따라가며, 독자가 그 시간을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곁을 내어줍니다. 여덟 편의 단편은 서로 다른 키워드와 정서를 품고 있습니다. 되감기와 여행, 질투와 오해, 말하지 못한 비밀을 따라가며 관계의 시간을 다시 펼쳐 보이기도 하고, 냄새의 기억을 통해 사라진 감정의 잔향을 더듬기도 합니다. 또한 윤도라는 물건 하나로 애도와 방향을 이야기하고, 가족의 재회와 침묵의 세월, 낡은 물건이 남긴 시간의 표정을 조용히 비추기도 합니다. 어떤 작품은 모래처럼 쌓인 오랜 시간 속에서 결국 남는 한 줌의 위로를 건져 올리고, 또 어떤 작품은 스콜처럼 쏟아지는 감정의 순간을 음악적 리듬으로 포착합니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상실과 길 잃음, 무너진 언어를 사랑으로 복원하려는 마음, 그리고 50센티미터 너머의 거리에서 드러나는 관계의 경계와 조용한 연대까지, 이 책은 다양한 삶의 결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야기들은 말합니다. 사라진 것들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남아 우리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고요. 그리고 그 움직임은 늘 아주 조용하게 시작된다고요. 너무 가까워서 상처를 덧내기도 하고, 너무 멀어져서 돌아갈 수 없게 되기도 하는 거리 위에서, 인물들은 흔들리면서도 자신만의 속도로 다시 삶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 과정 끝에서 독자 여러분께도 작은 온기와 오래 남는 여운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