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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호정
청포도의 빛 •007 임승유 -숙모 -숙모 -숙모 -숙모 -숙모 -숙모 -숙모 •045 5문 5답 •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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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떠나올 때 네가 열세 살이었는데 지금의 너는 연배가 어떠한지. 어떤 모습의 너를 가정하여 이 편지를 적어야 하는지 고민이다. 지금 아버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모습을 상상해야 할까. 상상의 지평을 신화적, 만화적으로 확장하자면 그때보다 어린 너를 가정할 수도 있겠구나.
---「청포도의 빛」중에서 도망칠 곳이 없다니 그 얼마나 다행이냐? 그보다 단순한 문제가 어디에 있겠니? 네가 산수를 배울 때 0으로 나누는 문제만 나오면 만세를 하던 생각이 난다. 어떻게 다가오는 0을 거부할 수 있겠니? ---「청포도의 빛」중에서 망울인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의 눈동자를 볼 때 거기서 하나의 세상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그건 우주라고 부를 수도 있었고 소행성이나 그저 별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고, 일정 범위의 생태계를 지칭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세상이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이었다. ---「청포도의 빛」중에서 너는 어떠니.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날에, 우리와 희망 사이를 지나는 하나의 존재를 상상할 수 있겠니. 우안-푸를 상상하면 너무 슬플 테니, 누군가 던진 청포도 한 알이 마침 눈앞을 날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청포도의 빛」중에서 아버진 늘 창가에 앉아 지구 쪽을 바라보고 있겠다. 희망이 안 보여도 너무 안 보이는 날에는 절망 쪽으로 손을 흔들어라. 그럼 그림자 속에서 아버지가 손을 흔들게. 아버지 빈자리가 지긋지긋하거든 그 부재不在를 똑바로 응시해 보렴. 그럼 거기 반짝이는 빛이 나타날 거다. ---「청포도의 빛」중에서 산이와 경이가 돌리는 줄을 넘다가 그길로 빠져나와 나이를 먹었다.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되고 쉰이 되었다. 숙모가 되었다. ---「숙모」중에서 숙모가 살아가는 이야기는 쉬지 않고 흐르는 개울과 같았어요. 흐름이 흐름을 돕는 것처럼요. 한 번 더 할 수도 있어요. 아침이 아침을 돕는 것처럼요. ---「숙모」중에서 누가 뒤에서 부르면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아야 하는 생활을 해나갔어요. 숙모가 허리를 숙여 양말을 벗을 때 뒤집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요. ---「숙모」중에서 제가 아는 소설가는 그런 걸 쓰고 있었어요. 그 소설가가 저한테 말해줬어요. 숙모는 사선의 엄마라고. 안평수옥 혹은 여름철 대삼각형에서 피도 한 방울 안 섞인 사선의 엄마를 그려냈죠. ---「숙모」중에서 숙모를 떠올리면 숙모가 거기 있었어. 거기 있는 숙모를 말해보려고 했어. ---「숙모」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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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지 못할 걸 알면서도, 계속 닿으려는 마음
희망이 안 보여도 너무 안 보이는 날에는 절망 쪽으로 손을 흔들어라. 그럼 그림자 속에서 아버지가 손을 흔들게. ―「청포도의 빛」 중에서 산이와 경이가 돌리는 줄을 넘다가 그길로 빠져나와 나이를 먹었다.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되고 쉰이 되었다. 숙모가 되었다. ―「숙모」 중에서 현호정의 소설과 임승유의 시는 지금 여기에 없는 사람을 자꾸 불러낸다. 부르는 목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없던 사람이 거기 있게 된다. 현호정의 소설 「청포도의 빛」은 편지다. 지구를 떠나 먼 행성으로 간 아버지가, 지구에 남기고 온 아이에게 쓰는 편지다. 아버지가 도착한 행성 '망울'은 중력이 강해 모든 것이 납작하고, 사람들은 눈동자로 각도를 재고 광합성으로 살아간다. 그곳에서 '루'는 청포도이자 눈동자이자 태양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고, 사전의 마지막 뜻은 '희망'이다. 지구는 전쟁으로 대기가 망가져 아이들이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가는 중이고, 아버지가 떠나온 것도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다. 빛의 속도로 날아온 터라, 편지가 아이에게 닿을 즈음이면 아이는 이미 늙어 죽은 뒤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버지는 쓴다. 지금의 아이인지, 그때의 아이인지, 언젠가의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없을지도 모르는 그 아이를 향해 계속 말을 건다. 임승유의 시 일곱 편은 모두 제목이 「숙모」다. 줄넘기를 하다 그길로 빠져나와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되고 쉰이 되어 숙모가 된 사람, 곤로와 풍로 사이에서 전을 부치는 숙모, 옷장 속 파란 것을 뒤집어쓰고 "그것이 되었다"는 사람. 숙모는 건넛마을에 살거나 산 넘고 물 건너 살아서, 이야기 속에 좀처럼 자리가 없다. 그런데도 질녀는 자꾸 숙모를 불러낸다. 장례식장에서 절을 할 때는 질녀였다가, 육개장에 소주 몇 잔을 기울일 때쯤엔 자신이 숙모가 되어 있다. 그렇게 부르고 또 부르다, 마지막 시에서 질녀는 숙모에게 도착한다. "숙모 미안해요. 숙모한테 왔어요." 소설은 아버지가 왜 그 편지를 멈추지 못하는지를 시간과 거리로 쌓아 올리고, 시는 없는 존재를 부르는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되풀이되는 목소리로 들려준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끝내 불러내려는 태도가, 소설과 시 양쪽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한 권 안에 나란히 놓인 소설과 시는 그렇게 서로를 비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