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드릴의 소리
1장 - 멘로파크에서 서울로 2장 - 보리차와 레몬 3장 - 50,000개를 만든 사람들 4장 - 소은이와 미아 5장 - 분화 2주년 6장 - 아테네의 문 7장 - 두라호의 귀환 8장 - 냄새의 이름 9장 - 수첩의 마지막 줄 10장 - 이서진의 첫 상담 11장 - 3번째 열림 12장 - 김응수의 겨울 13장 - 고리의 완성 14장 - 5세대 15장 - 수렴 16장 - 통일의 언어 에필로그 - 다시 태어남 |
|
수첩 열세 권이 태평양을 건넜다
이 권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노학자가 자기 인생을 상자에 넣어 부치는 대목이다. 강민호는 오른손이 더 이상 글씨를 만들지 못하게 되자 왼손으로 쓰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 왼손으로 쓰는 시간마저 하루 한 시간 45분으로 줄었다. 수첩이 자기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안다. 그래서 열세 권을 미국으로 보낸다. 아내 정혜원이 밤새 한지를 끼워 순서대로 포장한다. 우체국 창구에서 항공 등기로 부친다. 7일에서 10일. 50년이 상자 하나가 되어 태평양을 건너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보내기 전에 그는 마지막 줄을 적는다. 무엇을 적어야 하는가를 하루 종일 생각한 끝에 한마디를 적는다. 멈추지 마. 그리고 같은 날 오후, 수원에서 온 열여섯 살 조카손녀에게 빈 수첩을 건넨다. 열세 권이 떠나는 날 열네 번째 권이 시작되는 구조다. 큰할아버지가 스물여섯에 시작한 것을 조카손녀가 열여섯에 시작한다. 십 년 이르다. 소녀가 첫 줄에 적는 말은 멈추지 않겠다이다. 마지막 줄이 첫 줄이 되는 것, 그것이 이 권의 전승 방식이다. 과학이 감각을 확인하는 방식도 이 권의 축이다. 탐사선이 멈춰 선 좌표는 어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이었다. 그 방향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108일과 3,500톤의 배와 텅스텐 카바이드 드릴이 필요했다. 작가는 이 순서를 뒤집지 않는다. 코가 먼저, 펜이 나중. 감각이 먼저, 데이터가 나중. 그러나 감각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정확히 쓴다. 48년 동안 아무도 어부에게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냄새가 이름을 얻은 뒤에도 어부의 킁킁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다음 날에도 4시에 일어나 가자미를 잡으러 나간다. 이름이 붙는 것과 삶이 계속되는 것은 별개라는 것을 이 인물이 조용히 증명한다. 치유가 사람을 건너다니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스물세 살 상담사가 열 살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아이의 눈을 본 열세 살이 의사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그 열 살은 상담사가 되고 싶다고 쓴다. 나도 이서진 언니처럼 되고 싶어. 시작한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구조다. 작가는 이것을 보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만 편지가 평주에서 멘로파크로, 붉은색 연필에서 화면으로 옮겨 가는 경로를 한 번 더 따라 적을 뿐이다. 이 권은 재난 서사가 흔히 놓치는 자리도 비워 두지 않는다. 세계가 유전 발견과 국제 승인으로 움직이는 동안, 국경 너머 옌지에서는 영하 32도의 방에서 한 노인이 아홉 번씩 기침한다. 세계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은 안다. 그의 폐가 몇 퍼센트인지, 그의 무릎 위에서 두 돌 지난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줄어드는 것과 자라는 것이 같은 이불 속에 있는 장면을, 이 소설은 유전 발견 장면과 같은 무게로 쓴다. 그래서 아홉 번째 권의 부제는 '돌아온 사람들'이다. 배가 돌아오고 사람이 돌아오고 기록이 건너가고 말이 돌아온다. 벽만 보던 아이가 상담사에게 말한다. 언니, 나 이제 토끼 없이도 돼. 인형을 거쳐야만 말할 수 있던 아이가 다리를 건넌 것이다. 분화 후 1,001일, 다른 세상의 첫 아침에 어부는 다시 장화를 신고 노인은 다시 보리차를 받고 아이는 다시 연필을 잡는다. 팔린게네시스, 다시 태어남. 이 권이 남기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그 다음 날 아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