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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05
1부 슈퍼 코로나가 오고 있다 대지는 죽어가고 15 미래는 없다 16 비닐 꽃 17 빙하 18 빙하는 총을 쏘지 않는다 19 슈퍼 코로나가 오고 있다 20 아, 수백조 원이 사라지고 있다 21 장마 22 대형 산불 23 하얀 눈물 24 텃밭의 아우성 25 혹서 탈출 26 처서 마법 27 2부 악양루 반딧불이 니네들은 좋겠니? 31 아, 낙동강 32 악양루 반딧불이 33 추억의 곤천내에 서면 34 폐화廢花 36 한강은 울고 있었다 38 함안보 애가·1 40 함안보 애가·2 41 함안보 애가·3 42 함안천도 잡아 먹히고 있다 43 가뭄 44 잃어버린 계절 45 장마 46 화력발전소는 잘도 돈다 47 3부 지구의 청구서 범인은 따로 있다·1 51 범인은 따로 있다·2 52 범인은 따로 있다·3 53 자연은 명령하고 있다 54 종말이 오고 있다·1 55 종말이 오고 있다·2 56 중립지대는 없다 57 지구의 경고 58 지구의 청구서 59 마지막 식사 60 지구의 질문 61 벙어리산 62 탄소에게 안녕을 63 태양은 탄소의 밥이 되고 64 원전은 우리의 미래를 보장 못한다 65 4부 재두루미 울음 울다 북극 곰의 눈물 69 북극의 곰 70 상괭이가 없어졌다! 71 자두꽃 옐로카드 72 재두루미 울음 울다 73 펭귄의 눈물 74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75 가마솥 76 목이 쉰 청개구리 77 마산 정어리떼는 어디로 갔을까? 78 꿀벌의 행방이 묘연하다 79 5부 아직은 희망을 위하여 삽질은 멈춰야 한다 83 강대국에는 기후 정의가 없다 84 기후 정의·1 85 기후 정의·2 86 기후 평화·1 87 기후 평화·2 88 기후 평화·3 89 기후 평화를 위하여 90 기후 평화의 선물 하나 91 강은 흘러야 하고 사람은 만나야 한다 92 범인은 행동하라 93 아, 네팔 94 아직은 희망을 위하여 95 그래도 우린 승리할 겁니다 96 해설 / 지구의 울음을 받아쓰는 시 97 — 임창연(시인·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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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흘리는 하얀 눈물, 우리에게 돌아온 경고
『하얀 눈물』은 이상익 시인이 기후위기의 현장에서 마주한 자연의 신음과 인간의 책임을 담아낸 시집이다. 폭염과 폭우, 가뭄과 산불, 녹아내리는 빙하와 오염된 강, 사라져 가는 생명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기후위기의 모습을 거침없는 언어로 기록한다. 시인은 자연의 변화를 단순한 이상 현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 안에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소비, 개발이 만들어 낸 결과를 읽어 내며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는다. 이상익 시의 가장 큰 특징은 기후위기를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으로 바라본다는 데 있다. 「비닐 꽃」에서는 강둑과 들판에 나부끼는 폐비닐을 생명을 잃은 꽃으로 바라보며 편리함을 좇아온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고, 「악양루 반딧불이」에서는 해마다 줄어들다 마침내 사라진 반딧불이를 통해 우리가 잃어 가고 있는 자연의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고향의 강과 습지, 삶의 터전에서 일어난 변화를 통해 기후위기가 자연뿐 아니라 인간의 기억과 일상까지 바꾸어 놓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얀 눈물』의 시선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범인은 따로 있다·1」과 「강대국에는 기후정의가 없다」에서는 더 많은 생산과 소유를 위해 자연을 소비해 온 인간 사회의 책임을 정면으로 묻는다. 부와 편리함은 일부에게 쌓이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탄소의 피해는 가난한 나라와 힘없는 생명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돌아간다. 시인에게 기후위기는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와 공존, 평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집은 절망과 경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나무 한 그루를 심고, 한 끼를 나누고, 전등 하나를 끄는 작은 실천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며, 덜 먹고 덜 만들고 덜 파헤치는 삶을 통해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내려놓자고 말한다. 거대한 위기 앞에서도 우리의 작은 선택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자연이 흘리는 눈물은 결국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눈물이며, 지구가 보내는 경고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하다. 시인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 가고 있는지 바라보게 하고, 더 늦기 전에 무엇을 멈추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작가는 묻는다. 기후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구와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책임과 희망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시집 해설] 지구의 울음을 받아쓰는 시 — 이상익 시집 『하얀 눈물』의 생태적 상상력과 기후 위기의 시학 임창연(시인·문학평론가) 서론 — 아름다운 자연에서 아픈 자연으로 자연은 오랫동안 시의 가장 오래된 고향이었다. 꽃과 나무, 강과 바다, 새와 별은 인간의 사랑과 외로움, 상실과 그리움을 대신 말해주는 서정의 언어였다. 그러나 기후 위기의 시대에 자연은 더 이상 아름다운 배경으로만 존재하기 어렵다. 꽃이 제철을 잃고, 강이 흐름을 잃으며, 철새가 돌아올 습지를 잃고, 빙하가 제 몸을 녹여 바다가 되는 시대라면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상익의 여섯 번째 시집 『하얀 눈물』은 바로 그 변화된 자연 앞에서 시작한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내가 쓰고 싶은 시는 따로 있지만 기후 위기의 심각함이 나를 다르게 인도하였고”라고 고백한다. 더 나아가 “기후 위기와 재난을 알리고 기후 정의와 기후 평화를 목 놓아 부르짖는 것 외에 / 그 어떤 시를 쓸 수 있으랴”라고 자문한다. 이 고백은 단순한 창작 배경이 아니라 『하얀 눈물』 전체를 관통하는 시인의 윤리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이 시집에서 자연의 위치는 달라진다. 자연은 인간의 감정을 비추는 배경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발언의 주체가 된다. 대지는 죽어가고, 빙하는 눈물을 흘리며, 강은 숨을 쉬지 못한다. 반딧불이가 사라지고 상괭이가 돌아오지 않으며 재두루미의 울음은 기후 위기의 현주소를 가리키는 신호가 된다. 미국의 문학연구자 셰릴 글로트펠티(Cheryll Glotfelty, 1958~)가 생태비평을 문학과 물리적 환경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문학연구로 정립했다면, 이상익의 시 역시 인간의 내면만을 중심으로 읽던 시선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생명, 지역과 지구 사이의 관계를 묻는다. 그러나 『하얀 눈물』이 주목할 만한 것은 거대한 ‘지구’를 관념적으로만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시 속에는 낙동강과 악양, 곤천내와 함안, 거제 앞바다와 주남저수지가 있다. 북극과 그린란드에서 일어나는 기후위기가 시인의 생활권과 기억의 장소에서 다시 발견된다. 따라서 이상익의 생태시는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에게 지구적 기후위기는 언제나 지역적 생명의 사건으로 번역된다. 1부의 「대지는 죽어가고」와 「하얀 눈물」, 2부의 「악양루 반딧불이」와 「추억의 곤천내에 서면」, 3부의 「지구의 청구서」와 「마지막 식사」, 4부의 「상괭이가 없어졌다!」와 「재두루미 울음 울다」, 그리고 5부의 「강대국에는 기후 정의가 없다」와 「기후 평화를 위하여」를 중심으로 읽어보면 이 시집의 사상적 궤적은 더욱 뚜렷해진다. 대지가 죽고, 생명이 사라지고, 지구가 인간에게 청구서를 내밀며, 인간 이외의 생명들이 먼저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울음을 들은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정서는 결국 울음이다. 『하얀 눈물』은 자연에 관한 시집이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도착한 수많은 울음의 기록이다. 1. 죽어가는 대지와 흘러내리는 빙하 — 「대지는 죽어가고」와 「하얀 눈물」 『하얀 눈물』의 생태적 위기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매일 밟고 살아가는 대지다. 기후위기라는 말은 종종 너무 크고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이상익의 시는 그 거대한 위기를 땅속의 작은 생명에서부터 끌어올린다. 지렁이와 땅강아지, 땅거미 같은 존재가 먼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인간의 눈에 쉽게 보이지 않지만, 토양의 건강을 유지하는 생태계의 가장 기초적인 구성원들이다. 「대지는 죽어가고」에서 시인은 농약이 지렁이와 땅강아지, 땅거미를 차례로 ‘잡아먹고’, 마침내 “죄 없는 대지마저 잡아먹는다”라고 말한다. 농약을 포식자로 바꾸어 놓은 이 표현은 인간이 더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 만든 물질이 결국 인간의 생존 기반을 파괴하는 역설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잡아먹는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의인화 이상의 역할을 한다. 농약이 작은 생물을 죽이는 행위가 곧 대지 전체를 잠식하는 과정임을 연쇄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렁이가 사라지는 일과 땅이 죽어가는 일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작은 생명의 소멸이 곧 생태계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농약만이 아니다. 농약을 뿌리게 한 인간의 욕망이다. “더 많은 소출 앞에 우리의 욕심은 끝 간데없고”라는 구절은 이후 시집 전체에서 반복되는 ‘더 많이 가지려는 인간’의 모습을 예고한다. 소출은 원래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더 많은’이라는 욕망이 붙는 순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공존에서 지배로 바뀐다. 필요한 만큼 얻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이 생산하려는 태도가 대지를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특히 “죽음의 대지를 베개 삼아 / 흡족의 낮잠을 즐긴다”라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자신이 누워 있는 땅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풍요에 취해 있다. 여기서 ‘낮잠’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생태적 무감각의 은유다. 더 나아가 자신이 만든 파국을 보지 않으려는 문명의 자기기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레이철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이 『침묵의 봄』을 통해 인간이 사용한 화학물질이 곤충과 새, 토양과 물을 연결하는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경고했다면, 이상익은 작은 토양생물의 죽음에서 대지 전체의 죽음을 읽는다. 카슨의 경고와 이상익의 시가 만나는 지점은 명확하다. 생태계에서는 하찮은 생명도, 고립된 죽음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대지는 죽어가고」는 단순한 농약 비판시가 아니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는다. 자연을 인간의 편의를 위해 끊임없이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 더 높은 생산량과 더 큰 경제적 효과를 자연의 건강보다 앞세우는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잡을 수 없는 버스”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비유다. 인간이 자연의 분노를 알아차렸을 때 이미 버스가 떠나버렸다면 남는 것은 “후회해도 소용없는 한탄의 곡소리”뿐이다. 이 이미지는 생태적 임계점의 문제를 매우 일상적인 감각으로 바꾸어 놓는다. 놓친 버스는 다시 기다릴 수도 있지만, 이 시에서의 버스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에 가깝다. 한 번 지나가면 이전의 생태적 상태로 되돌아가기 어려운 시간을 상징한다. 이 대지의 위기는 「하얀 눈물」에서 행성적 규모로 확대된다. 그린란드의 빙산은 인간에게 “제발 제발”이라고 호소하며 “탄소 독약 그만 퍼먹이라고 / 하얀 눈물 됫박으로 쏟아내고 있다” 「대지는 죽어가고」에서 농약이 대지를 잡아먹는다면 「하얀 눈물」에서는 빙하가 인간에게 자신을 그만 죽여 달라고 호소한다. 하나는 토양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빙하의 죽음이다. 그러나 두 죽음의 근원은 다르지 않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 더 많은 편리와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한쪽에서는 토양을 병들게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기의 온도를 높인다. 두 작품 사이에는 분명한 확장의 구조가 있다. 지렁이 → 대지 → 대기 → 빙하 → 지구 이 구조는 『하얀 눈물』의 생태적 상상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가장 작은 토양생물과 거대한 그린란드의 빙하는 크기와 거리가 전혀 다르지만, 시인의 시선 안에서는 하나의 생태적 관계망으로 연결된다. 지구의 위기는 먼 곳의 사건이 아니라 지렁이 한 마리의 죽음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빙하를 ‘하얀 눈물’로 형상화한 것은 이 시집의 중심적인 시적 성취다. 과학은 빙하의 면적과 온도와 녹는 속도를 측정할 수 있지만, 시는 그 빙하에 몸과 표정과 감정을 부여한다. ‘하얀 눈물’이라는 은유를 통해 독자는 빙하의 융해를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의 사건으로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하얀 눈물’은 빙하만의 눈물이 아니다. 농약에 죽어가는 작은 생명의 보이지 않는 눈물이고, 병든 대지의 눈물이며, 아직 자기 눈물인 줄 모르고 있는 인간의 미래에서 미리 흘러온 눈물이기도 하다. 1부는 결국 아주 작은 생명에서 시작해 지구 전체로 시야를 확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사실을 확인한다. 자연의 위기는 규모만 다를 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끝에는 언제나 인간의 삶이 놓여 있다. 2. 사라진 것들의 지도 — 「악양루 반딧불이」와 「추억의 곤천내에 서면」 1부에서 생태 위기가 죽음의 징후로 나타났다면 2부에서는 그것이 부재라는 형태로 더욱 구체화된다. 죽어가는 자연보다 때로 더 두려운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자연이다. 부재는 소리도 내지 않고, 눈앞에 몸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뒤늦게 발견된다. 「악양루 반딧불이」에서 시인은 몇 년 전 악양 둑길에서 만났던 반딧불이를 회상한다. 어둑한 밤 머리 위에 여러 송이 ‘별꽃’이 피어 있었지만, 다음 해에는 겨우 하나가 남고, 다시 찾았을 때에는 그 하나마저 사라진다. 처음에는 여럿이었다. 그다음에는 하나였다.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 단순한 감소의 과정은 생태계 붕괴의 실제적인 방식과 닮아있다. 생명은 어느 날 갑자기 전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개체수가 줄고, 서식지가 좁아지고, 인간의 눈에 드문 존재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다. 시인은 이러한 변화의 시간을 ‘별꽃’이라는 아름다운 이미지로 기억한다. 반딧불이는 생물학적 개체이면서 동시에 밤의 풍경을 밝히는 작은 별이다. 따라서 반딧불이가 사라지는 것은 곤충 한 종의 감소뿐 아니라 밤의 감각과 기억, 인간이 자연과 맺어왔던 정서적 관계의 일부가 사라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 과정 끝에 시인은 말한다. “너의 부재는 우리의 부재” 이 문장은 『하얀 눈물』의 생태철학을 압축한다. 미국의 생태사상가 올도 리오폴드(Aldo Leopold, 1887~1948)는 ‘대지 윤리’를 통해 인간을 자연의 정복자가 아니라 토양과 물, 식물과 동물을 포함하는 생명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반딧불이의 소멸은 인간과 관계없는 작은 곤충 한 종의 소멸이 아니다.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사라지는 일이다. 생명공동체는 각각의 존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집합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의존하는 관계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의 부재는 우리의 부재”라는 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생태계의 타자는 곧 인간 자신의 일부라는 인식이다. 여기서 ‘부재’는 동시에 예고다. 반딧불이가 사라진 장소에서 언젠가는 다른 생명도 사라질 수 있으며, 그 끝에는 인간 역시 예외일 수 없다는 경고가 숨어 있다. 아름다운 별꽃의 상실은 결국 인간 자신의 미래가 조금씩 지워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추억의 곤천내에 서면」에서는 생태적 부재가 기억의 문제로 확장된다. 사십 년 만에 찾아간 곤천내에는 모래 속 실뱀장어도 없고, 지천으로 널려 있던 다슬기도 없다. 대신 페트병이 나뒹굴고, 과거의 아름다웠던 습지는 “사각 삼각 컨테이너 박스 밑에 누워 / 신음만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곤천내는 자연공간인 동시에 기억의 장소다. 소년 시절 친구들과 놀았던 냇가, 물고기와 다슬기가 살아 있던 물길은 개인의 기억과 지역공동체의 생활사가 저장된 공간이다. 물길은 단순히 흘러가는 물이 아니라 한 인간의 성장과 공동체의 시간이 함께 흐르는 장소다. 따라서 곤천내의 훼손은 환경파괴인 동시에 기억의 훼손이다. 생태계가 사라진 자리에서는 인간의 추억도 온전히 보존될 수 없다. 자연을 잃는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한 부분을 함께 잃는 일이다. 특히 시인이 곤천내를 어머니의 품으로 비유하면서 인간이 그 가슴을 “갈기갈기 파먹고만 있었구나”라고 고백하는 대목에서는 개발이 단순한 경제행위에서 윤리적 폭력의 문제로 바뀐다. 자연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었으나 인간은 그 품을 파헤쳤다. ‘어머니’라는 비유는 이 작품의 정서적 강도를 높인다. 자연이 인간을 먹이고 품어온 존재라면, 그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는 단순한 개발이 아니라 자신을 길러준 존재의 몸을 상처 내는 행위가 된다. 여기에서 생태문제는 개발과 보존의 논쟁을 넘어 윤리적 배반의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또한 「악양루 반딧불이」와 「추억의 곤천내에 서면」은 모두 ‘다시 찾아간 장소’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과거에 존재했던 생명을 기억하고 현재의 빈자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즉 두 작품에서 화자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시간의 증인이다. 과거의 풍요와 현재의 빈자리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상실은 더욱 선명해진다. 이 점에서 2부의 생태시는 현재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사라지기 전의 자연과 사라진 이후의 자연을 동시에 기록한다.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에서 생태적 상실의 깊이가 드러난다. 이상익의 시에서 지역성은 이처럼 단순한 향토적 정취에 머물지 않는다. 지역은 지구의 축소판이다. 악양에서 반딧불이가 사라지는 일, 곤천내에서 다슬기가 없어지는 일은 멀리 떨어진 북극의 빙하와 무관하지 않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 배후에는 기온 변화와 개발, 오염과 인간의 소비방식이라는 공통된 원인이 놓여 있다. 따라서 이 시집의 지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악양과 곤천내는 기후 위기를 증언하는 생태적 좌표가 된다. 그 좌표들을 하나씩 연결하면 하나의 ‘사라진 것들의 지도’가 만들어진다. 그 지도에는 반딧불이가 사라진 밤이 있고, 다슬기가 사라진 냇물이 있으며, 습지 대신 들어선 컨테이너가 있다. 그리고 그 지도는 자연의 상실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과 삶의 방식이 함께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구적 위기가 지역의 작은 생명 하나의 부재로 나타나는 순간, 독자에게 기후 위기는 더 이상 먼 뉴스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장소에서 무엇인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는 현실이 된다. 3. 지구가 보내온 계산서 — 「지구의 청구서」와 「마지막 식사」 1·2부가 자연의 죽음과 부재를 보여주었다면 3부에서는 질문의 방향이 인간에게 돌아온다. 누가 이 사태를 만들었으며, 그 대가를 누가 치를 것인가. 「지구의 청구서」의 중심에는 ‘청구서’라는 경제적 은유가 있다. “흐느끼는 지구”는 인내에도 한계가 있음을 경고하며 마침내 “지구는 우리에게 곧 청구서를 내밀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이 표현에는 중요한 가치의 역전이 있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의 값을 계산해 왔다. 숲은 목재의 가격으로, 강은 개발의 이익으로, 땅은 부동산의 가치로 환산되었다. 그러나 이상익은 그 계산법을 뒤집는다. 인간이 자연의 값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값을 청구한다. 그리고 그 비용은 화폐로 지불할 수 없다. 산불과 장마, 가뭄과 폭염, 태풍과 재난을 인간의 몸으로 치러야 한다. 자연을 무상으로 사용한다고 믿었던 인간에게 뒤늦게 도착한 청구서다. 여기서 ‘청구서’는 단지 재난의 대가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 맺어온 관계 전체에 대한 심판의 문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인간은 자연을 끊임없이 소비하면서도 그 대가를 미래로 미뤄왔다. 숲을 베고, 강을 막고, 화석연료를 태우며 얻은 이익은 현재의 인간이 누렸지만, 그 비용은 다음 세대와 다른 생명에게 전가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청구서는 현재의 인간에게만 발행된 것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의 이름까지 적힌 부채의 명세서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식사」에서는 이 거대한 청구서가 한 동물의 몸으로 내려온다. 자바섬의 마지막 호랑이가 먹은 마지막 식사는 딱정벌레와 뱀 한 마리였다. 시인은 굶주린 호랑이의 텅 빈 위장에서 인간의 “탐욕”과 “개발지상주의”를 발견하고 그 말라죽은 몸을 “생생한 고발장”이라고 부른다. 이 작품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위장’이다. 기후 위기와 생태 파괴는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배고픈 몸의 사건이 된다. 그리고 시선은 곧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생태계의 정점에 있던 호랑이가 굶주려 사라졌다면 인간 역시 생태계의 붕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호랑이의 마지막 식사를 바라보던 인간이 미래에는 마지막 식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즉 작품의 제목은 중의적으로 변한다. 처음에는 호랑이의 마지막 식사였지만, 마지막에는 인간의 마지막 식사를 예고한다. 이때 호랑이의 몸은 단순한 멸종의 흔적이 아니라 인간 문명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한 종의 멸종은 그 종 하나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먹이사슬과 서식환경, 생태적 관계 전체가 무너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랑이의 텅 빈 위장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생태적 공백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생명의 그물을 한 올씩 끊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3부에서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만들어낸 재난을 되돌려받는 미래의 피해자로 자리한다. 그러므로 「지구의 청구서」와 「마지막 식사」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빌려 쓴 것은 무엇이며, 그 빚을 누구에게 넘기고 있는가. 이 지점에서 생태 문제는 윤리와 책임의 문제로 확장된다. 더 나아가 이 두 작품은 기후 위기란 자연이 인간에게 가하는 복수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맺어온 잘못된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지구의 청구서는 외부에서 날아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작성해 온 문서이며, 호랑이의 마지막 식사는 그 청구서의 가장 비극적인 영수증인 셈이다. 여기서 더 주목할 것은 ‘청구서’와 ‘마지막 식사’가 모두 시간의 지연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연을 훼손한 순간 곧바로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개발의 이익은 현재에 주어지고, 파괴의 비용은 미래로 넘어간다. 그래서 기후위기는 늦게 도착한 결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래전에 시작된 선택의 누적이다. 이 시집에서 재난은 갑자기 발생한 불운이 아니라 인간이 미뤄온 책임이 시간차를 두고 되돌아오는 형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식사」의 호랑이는 과거의 멸종동물이면서 동시에 미래 인간의 예고편이 된다. 먹을 것이 사라진 호랑이의 위장은 생태계의 종말이 가장 먼저 몸에 기록되는 자리다. 결국 생태 위기의 마지막 단계는 풍경의 훼손이 아니라 먹고 살아갈 수 없는 세계다. 이상익은 이 단순하고 근원적인 생존의 문제를 통해 기후 위기의 실체를 인간의 일상 가까이 끌어당긴다. 4. 인간보다 먼저 우는 것들 — 「상괭이가 없어졌다!」와 「재두루미 울음 울다」 4부에서는 인간 아닌 생명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노르웨이 철학자 아르네 네스(Arne Næss, 1912~2009)의 심층생태학은 인간 이외의 생명 역시 인간의 필요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할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상괭이가 없어졌다!」를 읽는 데 유효하다. 화자는 이전에 상괭이를 만났던 거제를 다시 찾는다. 하루를 더 머물며 기다려도 상괭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물속 너는 길을 잃었을까”, “양식이 다 사라졌을까”라고 걱정하던 화자는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가 없음은 바다가 자기 심장을 멈춰 세우는 것” 상괭이의 부재는 “하늘이 보내는 기후 위기의 옐로카드”가 된다. 여기에서 상괭이는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관광의 대상이 아니다. 그 자체로 바다의 일부다. 따라서 상괭이가 사라진 바다는 한 종이 사라진 바다가 아니라 심장 하나를 잃은 생태계다. 2부에서 반딧불이의 부재가 “우리의 부재”였다면 4부에서는 상괭이의 부재가 ‘바다의 심장 정지’로 확대된다. 이상익에게 멸종은 숫자의 감소가 아니다. 세계에서 하나의 자리가 영원히 비는 사건이다. 이 ‘빈자리’의 감각은 매우 중요하다. 멸종은 단순히 개체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그 생명이 차지하던 관계와 움직임과 소리가 함께 사라지는 일이다. 상괭이가 사라지면 바다는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전과 같은 바다가 아니다. 시인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결손을 ‘심장을 멈춰 세우는 것’이라는 강한 은유로 형상화한다. 생태계의 변화는 눈에 보이는 파괴만이 아니라, 있어야 할 존재가 없는 상태로도 드러난다. 「재두루미 울음 울다」에서는 그 생태적 사유가 이동과 귀환의 문제로 확장된다. 겨울 주남저수지에서 시인은 수만 리를 날아온 재두루미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재두루미가 천연기념물 몇 호인가가 아니다. “내년에도 고향 찾아 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 너희들 몸짓”이다. 그리고 재두루미의 울음은 “이 땅의 기후 위기 현주소를 말해주는 / 잣대”가 된다. 보호종이라는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장소다. 철새에게는 국경보다 습지가 중요하고, 인간이 붙여준 번호보다 먹이와 물과 안전한 이동 경로가 중요하다. 철새는 국경을 모른다. 기후도 국경을 모른다. 한 지역의 습지 파괴와 다른 지역의 기후변화, 또 다른 곳의 먹이 부족이 재두루미 한 마리의 이동경로 안에서 연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재두루미는 지구적 생태공동체의 이동하는 증언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내년에도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는 몸짓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담겨 있다. 철새의 귀환은 단순한 계절의 반복이 아니라 생태계가 아직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다. 해마다 같은 곳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은 자연의 순환이 지속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 귀환이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 순간, 계절의 질서 역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때 재두루미의 울음은 한 마리 새의 울음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 자체가 보내는 구조 신호로 들린다. 「목이 쉰 청개구리」도 이러한 의미망 속에서 함께 읽을 만하다. 제철이 아닌 때 나타난 청개구리는 “계절을 잃어버린” 채 울고 있으며, 그 울음은 “노래가 아니라 위기의 마지막 경고”가 된다. 상괭이는 사라짐으로, 청개구리는 때 이른 울음으로, 재두루미는 불안한 귀환으로 인간보다 먼저 변화된 세계를 증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모두 몸으로 기후를 읽는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은 온도계와 통계, 보고서를 통해 기후변화를 확인하지만, 동물들은 이동 시기와 먹이의 부족, 서식지의 변화, 몸의 리듬으로 먼저 그 변화를 감지한다. 따라서 이상익의 시에서 비인간 생명들은 과학적 데이터 이전에 도착한 생태적 경보다. 따라서 이들은 보호해야 할 수동적 대상만이 아니다. 기후 위기를 먼저 읽어내는 생태적 증언자들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들의 울음과 부재를 인간의 언어로 옮겨 적는다. 그런 의미에서 4부의 시인은 자연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이기보다, 이미 자연이 보내고 있는 신호를 듣고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에 가깝다. 상괭이와 청개구리와 재두루미의 몸은 결국 『하얀 눈물』에서 인간보다 먼저 미래를 읽어낸 또 하나의 문장이 된다. 4부의 중요한 특징은 비인간 생명을 단순히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상괭이와 재두루미, 청개구리는 인간의 보호를 기다리는 존재이기 전에 자기 방식으로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반응하는 주체다. 이들의 울음과 부재, 이동의 혼란은 인간의 언어보다 먼저 도착한 생태적 문장이다. 시인은 그 문장을 번역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때 ‘듣기’는 『하얀 눈물』의 중요한 윤리가 된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에게 명령하고 자연을 관리하고 자연의 쓸모를 계산해 왔지만, 이제 필요한 것은 자연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상괭이가 보이지 않는 침묵도, 청개구리의 어긋난 울음도, 재두루미의 불안한 귀환도 모두 하나의 발화다. 그러므로 4부의 생태시는 결국 말하지 않는 존재의 말을 듣는 시학으로 확장된다. 5. 기후 정의에서 기후 평화로 — 「강대국에는 기후 정의가 없다」와 「기후 평화를 위하여」 5부 「아직은 희망을 위하여」는 앞선 네 부와 결이 조금 다르다. 1부에서 대지가 죽고, 2부에서 생명과 장소가 사라지며, 3부에서는 지구가 청구서를 보내고, 4부에서는 비인간 생명들이 위기를 증언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하나다. 이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5부는 이 물음에 대한 시인의 윤리적 응답이다. 「강대국에는 기후 정의가 없다」에서 시인은 기후위기의 원인과 피해가 동일하게 분배되지 않는 현실을 바라본다.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빙하와 숲과 갯벌을 훼손하고 화석연료를 소비한 국가들이 있는 반면, 그 피해는 오히려 가난한 나라들에게 더 가혹하게 돌아간다. 시인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돈은 몇몇 부자 나라 금고에 쌓여만 가고 / 탄소의 저주는 고스란히 / 가난한 나라의 것이 된다.” 이 대목에서 『하얀 눈물』은 중요한 전환을 맞는다. 기후 위기는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정의의 문제가 된다. 누가 더 많이 배출했는가. 누가 더 많은 부를 축적했는가. 누가 그 결과로 발생한 홍수와 폭염과 가뭄의 피해를 더 크게 떠안는가. 이어지는 「기후 정의·1」에서는 “물에 잠기는 곳은 가난한 곳 / 불에 타는 곳 또한 가난한 곳”이라고 말하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시집 앞부분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1부의 농약은 더 많은 소출을 얻기 위한 것이었고, 2부의 훼손된 강과 습지는 개발의 결과였으며, 3부의 청구서는 소비와 성장의 대가였다. 4부에서 상괭이와 재두루미가 위기를 겪는 배경에도 결국 인간의 개발과 탐욕이 놓여 있다. 따라서 5부에서 그 원인은 한 단어로 모인다. 탐욕이다. 그러나 5부는 고발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후 평화를 위하여」에서는 해결의 방향을 생활 가까이로 가져온다. 에어컨 대신 창문을 열고, 난방기 대신 내복을 입고, 사용한 물을 다시 쓰는 일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장으로 나아간다. “더 가지지 않는 것 / 남겨 두는 것.” 나아가 시인은 평화란 “우리의 욕심을 거둬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기후 평화’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을 끝없이 침범하지 않는 것, 다음 세대의 몫을 미리 사용하지 않는 것, 다른 생명에게 살아갈 자리를 남겨놓는 것 역시 평화다. 그러므로 이상익이 말하는 기후 평화는 결국 절제의 윤리다. 더 가지지 않는 것. 모두 써버리지 않는 것. 조금 남겨놓는 것. 인간만의 몫으로 독점하지 않는 것. 이는 1부의 “더 많은 소출”과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이다. 1부가 더 많이 가지려는 인간을 보여준다면, 5부는 덜 가지고 함께 살아가려는 인간을 요청한다. 이 대칭이 시집의 구조를 완성한다. 「기후 평화의 선물 하나」에서도 ‘나무 한 그루를 심고, 밥 한 끼를 나누며, 전등 하나를 끄는’ 행위가 평화의 실천으로 제시된다. 거대한 기후 위기에 맞서는 행동이 반드시 거대한 행동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5부 제목인 「아직은 희망을 위하여」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희망’만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은’이다. 아직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 완전히 늦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시집의 희망은 낙관이 아니라 위기를 정확히 본 뒤 선택되는 희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1~4부가 지구로부터 받은 진단서라면, 5부는 인간이 써야 할 처방전이다. 기후 정의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기후 평화는 “앞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다. 두 질문이 함께 놓일 때 『하얀 눈물』의 생태 윤리가 비로소 완성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기후 정의’와 ‘기후 평화’는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기후 정의가 과거와 현재의 책임을 묻는다면, 기후 평화는 그 책임을 미래의 삶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묻는다. 전자가 불균형을 드러내는 언어라면, 후자는 그 불균형을 줄이기 위한 생활과 제도의 방향을 제시하는 언어다. 따라서 5부는 책임 추궁에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상상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인이 거대한 정치적 구호만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가지지 않는 것’, ‘남겨 두는 것’, ‘욕심을 거둬들이는 것’이라는 말들은 모두 생활의 속도를 늦추고 소비의 욕망을 줄이는 데서 출발한다. 기후 위기의 원인이 과잉생산과 과잉소비, 인간중심적 개발에 있다면 그 대응 역시 덜 쓰고, 덜 빼앗고, 더 오래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얀 눈물』의 5부는 생태윤리를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생활의 자세로 번역한다. 거대한 지구의 문제를 한 사람이 오늘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크기로 낮춘다. 전등 하나를 끄는 일, 물을 아껴 쓰는 일,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일이 작아 보이지만 그 작은 행위에는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를 바꾸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또한 ‘남겨 두는 것’이라는 표현에는 중요한 생태철학이 숨어 있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생태적 삶은 모든 것을 사용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숲의 일부를 베지 않고 남겨 두고, 강의 일부를 개발하지 않고 남겨 두며, 다른 생명과 미래 세대를 위해 자원과 공간을 남겨 두는 것. 결국 ‘남겨 둠’은 소극적인 포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공존의 행위다. 따라서 「아직은 희망을 위하여」의 희망은 기술 발전이나 경제성장의 연장선에서 오는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제한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오는 희망이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라는 자리에서 내려와 생명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직 관계를 회복할 시간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5부는 시집 전체에서 가장 윤리적인 동시에 가장 실천적인 공간이다. 앞선 네 부가 자연의 아픔을 보여주었다면, 마지막 5부는 그 아픔을 본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때문에, 이 시집의 희망은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다. 희망한다는 것은 결국 다르게 살겠다고 선택하는 일이다. 결론 — ‘하얀 눈물’ 이후, 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얀 눈물』의 전체를 따라 읽고 나면 하나의 흐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대지가 죽는다. 생명이 사라진다. 지구가 인간에게 청구서를 내민다. 인간 아닌 생명들이 먼저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는다. 이 흐름을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죽음 → 부재 → 경고 → 청구서 → 책임 → 평화 동시에 정서적으로는 또 하나의 흐름이 있다. 울음 → 눈물 → 부재 → 경고 → 희망 이것을 『하얀 눈물』의 ‘울음의 시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에서 울음은 처음부터 인간의 것이 아니다. 대지가 먼저 신음하고, 빙하가 먼저 눈물을 흘리고, 반딧불이는 사라짐으로 말하고, 상괭이는 돌아오지 않음으로 말하며, 재두루미는 하늘을 향한 울음으로 말한다. 인간은 그 신호를 뒤늦게 해석하는 존재다. 이러한 사유는 글로트펠티, 카슨, 리오폴드, 네스의 생태적 사유와 자연스럽게 만난다. 글로트펠티는 문학과 환경의 관계를 묻게 하고, 카슨은 생명의 상호연결성을 깨닫게 하며, 리오폴드는 인간을 대지공동체의 지배자가 아닌 구성원으로 돌려놓는다. 네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아닌 생명에게도 그 자체의 고유한 존재가치가 있음을 환기한다. 그러나 『하얀 눈물』의 의미는 이런 이론을 시로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생태학이 개념으로 설명한 것을 생명의 구체적인 몸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 기후 위기는 추상적인 숫자가 아니라 목이 쉰 청개구리가 되고, 생물다양성의 감소는 반딧불이가 사라진 어두운 둑길이 되며, 멸종은 마지막 호랑이의 텅 빈 위장이 된다. 해양생태계의 위기는 돌아오지 않는 상괭이가 되고, 철새 서식지의 위기는 내년에도 돌아올 수 있을지를 알 수 없는 재두루미의 울음이 된다. 여기에 이상익 생태시의 중요한 미학적 성취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의 미학적 긴장도 인정해야 한다. 『하얀 눈물』에는 ‘탄소’, ‘기후 위기’, ‘탐욕’, ‘재앙’, ‘기후 정의’처럼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말이 적지 않다. 이러한 언어가 앞에 나서면 시가 환경운동의 구호나 선언에 가까워질 위험도 있다. 시인 자신도 “시 아닌 것 같은 시”를 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 『하얀 눈물』의 긴장이 있다. 시인은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은 미학적 욕망과, 지금의 기후 위기를 침묵할 수 없다는 윤리적 요청 사이에 서 있다. 그리고 이 시집에서 보다 오래 남는 작품들은 그 두 힘이 만나는 순간에 탄생한다.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는 문장보다 반딧불이가 사라진 악양의 밤이 더 오래 남는다. ‘멸종위기종을 보호해야 한다’라는 선언보다 내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재두루미의 몸짓이 더 절실하다. ‘해양생태계가 위기다’라는 주장보다 상괭이가 사라진 바다를 “자기 심장을 멈춰 세우는 것”이라고 표현했을 때 독자의 감각은 더욱 강하게 깨어난다. 따라서 이상익 생태시의 미학적 성취는 단순히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말하는 데 있지 않다. 기후 위기에게 몸과 표정과 울음을 부여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다시 지역성이 중요해진다. 이상익에게 기후 위기는 북극과 그린란드에서 일어나는 먼 사건만이 아니다. 함안의 곤천내에서 다슬기가 사라지는 일이고, 악양 둑길에서 반딧불이가 사라지는 일이며, 거제 바다에서 상괭이를 만나지 못하는 일이다. 주남저수지를 찾아온 재두루미가 내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지구는 추상이 아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장소들의 총합이다. 이것은 『하얀 눈물』이 일반적인 환경시와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거대한 지구적 위기를 지역의 강과 습지, 곤충과 새, 바다와 기억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5부에서 이 지역적 생태의 문제는 다시 세계적 정의의 문제로 확장된다. 누가 더 많이 소비했는가. 누가 더 많은 탄소를 배출했는가. 누가 그 과정에서 부를 축적했으며, 누가 그 결과의 피해를 떠안는가. 기후정의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시집은 책임 추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시 ‘평화’라는 말로 돌아간다. 더 가지지 않는 것. 남겨 두는 것. 욕심을 거둬들이는 것. 여기서 『하얀 눈물』이 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환이 드러난다. 인간이 얼마나 덜 가져도 살아갈 수 있는가. 얼마나 덜 파괴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다음 세대와 인간 아닌 생명에게 얼마나 많은 자리를 남겨줄 수 있는가. 결국 『하얀 눈물』이 묻는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시집의 제목 앞에 서게 된다. ‘하얀 눈물’은 누구의 것인가. 빙하의 것인가. 죽어가는 대지의 것인가. 사라진 반딧불이의 것인가. 상괭이와 재두루미의 것인가. 아니면 미래의 인간이 흘릴 눈물인가. 어쩌면 이 눈물에 하나의 주인을 정하는 일 자체가 인간 중심적인 사고인지도 모른다. 생태계가 하나의 거대한 관계망이라면 어느 한 생명의 눈물은 이미 다른 생명의 눈물 속으로 흘러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얀 눈물’은 자연이 인간에게 흘리는 눈물이면서, 인간이 아직 자기 눈물인 줄 모르고 있는 미래의 눈물이다. 과학은 기온을 기록한다. 시는 그 더위 속에서 길을 잃은 생명의 표정을 기억한다. 과학은 개체수를 조사한다. 시는 반딧불이가 사라진 뒤 더 어두워진 악양의 밤을 기억한다. 과학은 빙하의 면적을 측정한다. 시는 녹아내리는 빙하에서 눈물을 본다. 과학은 멸종위기종을 분류한다. 시는 재두루미가 내년에도 돌아올 수 있는지를 묻는다. 과학과 시는 서로 다른 언어이지만 위기의 시대에는 서로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 과학이 위기를 증명한다면, 시는 그 위기를 인간의 감각과 기억과 윤리 안으로 데려온다. 그래서 시인은 모든 눈물이 쏟아진 뒤 기록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아직 한 방울일 때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지가 보내는 작은 신음에서, 반딧불이가 사라진 어둠에서, 상괭이가 돌아오지 않는 바다에서, 재두루미가 하늘을 향해 내지르는 울음에서 시인은 아직 오지 않은 재난의 문장을 먼저 읽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익의 『하얀 눈물』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데 머무는 시집이 아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온 문장을 받아쓴 시집이다. 그 문장의 마지막에는 아직 마침표가 없다. 그것을 멸종과 재앙의 마침표로 끝낼 것인지, 기후 정의와 기후 평화를 향한 새로운 생명의 문장으로 이어갈 것인지는 이제 시인 한 사람에게만 남겨진 일이 아니다. 하얀 눈물이 완전히 쏟아지기 전에, 우리가 그 문장의 다음 행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그 질문이 이 시집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오래 남는다. 여기에는 시의 또 다른 역할도 놓여 있다. 바로 증언의 역할이다. 재난은 지나가지만, 기록은 남는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어떤 풍경을 보았고, 무엇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 순간 어떤 불안과 슬픔을 느꼈는지를 시는 보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얀 눈물』은 현재의 생태위기를 고발하는 시집인 동시에 미래 세대에게 남겨지는 하나의 감각적 기록이기도 하다. 언젠가 반딧불이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상괭이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재두루미의 이동경로가 달라진다면 그때의 사람들은 오늘의 자연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문학을 통해 기억할 수도 있다. 시가 생태학적 기록과 다른 점은 단순히 ‘무엇이 사라졌다’라고 적는 데 있지 않다. 사라질 때 인간이 무엇을 느꼈는지, 그 빈자리가 얼마나 아팠는지를 함께 남긴다는 데 있다. 따라서 『하얀 눈물』의 독자는 단순한 관찰자로 머물기 어렵다. 작품을 읽는 순간 독자 역시 시 속의 청구서를 받아든 사람이 되고, 반딧불이의 부재를 확인한 사람이 되며, 상괭이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시는 독자에게 정답을 강요하지 않지만, 더 이상 몰랐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태시는 윤리적 힘을 갖는다. 그것은 독자를 겁주거나 훈계하는 데서 생기는 힘이 아니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는 장면을 오래 바라보게 하고, 자연의 고통을 자기 삶의 문제로 느끼게 하는 데서 생기는 힘이다. 감각이 바뀌면 관계가 바뀌고, 관계가 바뀌면 행동의 가능성도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하얀 눈물』이 끝내 독자에게 남기는 것은 절망만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들을 수 있고, 아직 기억할 수 있고, 아직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시가 자연의 마지막 울음을 기록하는 장르가 아니라 그 울음이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인간의 감각을 깨우는 장르라면, 이상익의 이번 시집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얻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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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연을 노래한다는 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 한때 시에서 자연은 인간의 상처를 위로하는 장소였으며, 아름다움과 영원성의 상징이었다. 꽃은 피고 새는 울었으며 강은 흘렀다. 계절은 순환했고, 인간은 그 순환 속에서 삶과 죽음의 질서를 배웠다. 그러나 기후 위기의 시대에 이러한 자연관은 더 이상 온전하게 지속되기 어렵다. 봄꽃은 제철을 잃고, 철새는 이동 경로를 잃고, 강은 흐름을 잃으며, 빙하는 자신의 몸을 녹여 바다로 흘러간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을 위로하는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이 인간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역전이 일어난다.
이상익의 시집 『하얀 눈물』은 바로 이 역전에서 시작한다. 시인은 이번 시집을 내면서 자신이 본래 쓰고 싶었던 시가 따로 있었으나 “기후 위기의 심각함”이 자신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고백한다. 더 나아가 기후 위기의 원인을 인간의 “끝 간데없는 탐욕”에서 찾으며,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파헤치고 더 많은 돈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결국 지구 전체를 삼키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고백은 『하얀 눈물』을 읽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자연이 보내오는 위기 신호를 받아 적는 기록자가 되고자 한다. 따라서 이 시집에 반복되는 ‘울음’, ‘눈물’, ‘죽음’, ‘부재’, ‘경고’, ‘청구서’ 같은 어휘는 우연하지 않다. 그것들은 기후 위기 시대에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일종의 비상 신호이다. - 임창연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