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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다시 백지를 꺼낸다 강 넘기 - 11 제로섬 게임 - 13 첫날의 매직 - 14 겨울, 해인사 - 16 뒷모습 - 18 소리의 벽 - 20 밤의 낮 - 22 눈사람 찾기 - 24 잠수함은 교신 중 - 26 별들의 고향 - 28 올리브 상담실 - 30 경전이 말하길 - 32 제2부 달빛 가계 사과꽃은 파스타를 먹고 잠든다 - 37 종잇밥 - 40 내 이름은 - 42 파음 - 44 꽃밭에서 - 46 검은 눈 - 48 나비잠 - 50 안개 - 52 안개‥ - 54 안개… - 56 페넬로페의 거미줄 - 58 초대 - 60 명랑한 젠가 - 62 재첩, 국 - 64 퇴근길 - 66 제3부 자꾸 멈추는 날이 있다 아주 잠깐 사이 - 69 천국을 읽다 - 70 봄밤의 일 - 72 깃들다 - 74 벚꽃 엔딩 - 77 아무것도 아니다 - 80 사과 - 81 연꽃 필 때 - 84 가장 - 86 유턴 지점 - 87 세 개의 시선 - 90 티파니의 아침 - 92 제4부 착륙 햇살 유서 - 95 혼술 아닌데요 - 98 다녀왔습니다 - 100 이사를 가면 - 101 어긋났대요 - 104 빗소리듣기동호회 - 106 셋이서 쿠바 - 108 만약에 그때 - 110 저녁 일곱 시-인터라켄 - 112 회귀 - 115 다시 오고 - 118 오늘 도착한 어제 - 120 줌 아웃 - 122 허공 착륙기 - 124 밤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 놓고 - 126 해설 성윤석 내부의 이야기를 꺼내 든 실루엣 - 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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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벽
딸칵― 전원을 살리면 벽이 생긴다 소리로 만든 벽이다 파도가 오고 바람이 오고 물이 흐르고 새가 울고 청소기가 울고 드라이기가 운다 벽 안에서 소리들은 섞인다 바깥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들으라는 것인지 듣지 말라는 것인지 소리는 조용하고 편안하다―그게 벽의 방식이다 딸의 방 문고리에 작고 동그란 것이 남아 있다 딸은 갔는데 백색소음기는 같이 가지 않았다 남아서, 들려준다 나는 누워 있다 밤바다 모래밭에― 파도를 건너온 바람이 솔숲으로 흩어지고 검은머리물떼새가 그 위를 간다 날개를 치며, 간다 하얗게 세워진 벽을 오랜 불면의 내가 오르고 있다 소리 없이 감은 눈이 자꾸 떠진다 불면 이제 볼 수 없는 얼굴이 있다 ■ 꽃밭에서 비가 진눈깨비처럼 흩뿌리던 저녁 해주국밥집 뒷마당에서 엄마는 기타의 목을 잡고 화단 돌담에 내리쳤어 맨드라미 목이 꺾이고 있었어 순간이었지 아버지가 주먹으로 엄마의 뺨을 치고 기타를 빼앗은 건 두 사람의 눈은 번개 치는 동굴이 되고 있었어 기타는 목이 부러진 채 작은방 구석에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아버지는 아픈 자식 들여다보듯 한참씩 보곤 했어 퇴근하는데 경비실 모퉁이에 낡은 악기 가방을 멘 아버지가 서 있었어 누가 볼세라 팔을 끌고 택시를 잡아탔지 ―역전 세고비아 악기점 갑시다 작정하고 왔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 신기하게도 아버지는 내가 다니는 회사를 알고 있었어 오늘이 월급날이란 것도 ―수리가 가능할까요 물으려는데 이미 아버지의 눈은 벽에 걸린 기타를 보고 있었어 가방 속 단단히 넣은 월급봉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어 가문비나무로 만들어 울림이 깊다는 새 기타를 메고 버스 정류장에 선 아버지 먼 산을 보고 있는 축축한 눈 매일매일 꽃밭에서는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고 어딘가에서는 소리 없이 금이 메워지고 있었어 그런데 가문비나무는 무엇으로 울음의 깊이를 만들었을까 맨드라미 목에 새살이 돋고 있어서 다행이야 ■ 만약에 그때 마지막 실업급여를 신청해 놓고 먼 곳으로 갔다 버스가 다리를 지나면서 나라 이름이 바뀌는 강을 사이에 두고 언어가 달라지는 지중해의 햇볕이 유리 가루처럼 쏟아지는 리스본 광장이었다 하필 에그타르트를 한입 베어 물던 그때 알람이 왔다 실업급여가 입금됐다는 한 오백 년은 산 것 같은데 더 이상 새로운 두려움 따윈 없을 만도 한데 왜 늘 허물어진 성 앞에 서 있는 것 같을까 국경을 넘는 게 일상인 이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온몸에 무수한 선을 그으며 살지 않아도 됐을까 귀퉁이가 닳은 이력서를 또 어디에 내밀어야 하나 ■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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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긴 장마 끝에 볕 든 날 여물지 못한 열매를 내다 말립니다 내다 말린다라 쓰고 실은 내다 버리는 것입니다 부디 훨훨 날다가 환한 꽃밭에 내려앉아 저마다의 계절로 무성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