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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기일지 …… 007
작가의 말 ……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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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석기의 물음을 건네받은 그때 그 순간, 나는 스스로를 남처럼 대하지 않고 스스로처럼 대했다. 인사이드 아웃, 부캐를 안으로 수납하고 본캐를 밖으로 내돌렸다. 전설의 포켓몬처럼 진귀한 순간이었다. 난 나일 뿐이야,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순 없어!
---p.31 “하여간 진짜 시어머니 납셨다니까.” 진진주가 오래 참은 오줌을 눈 뒤처럼 진저리쳤다. “맞잖아, 시어머니.” “응?” “시어머니 맞다고. 암만 레즈랑 게이랑 위장 결혼을 했대도, 호적상으로는 진주 네가 며느리인 게 명명백백하니까.” ---p.53 이물질이 침입했다고 여겨지는 일종의 비상사태. 그 이물질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애쓰는 과정이 곧 진주의 탄생기라면, 지금 나에게 가장 낯설고 불결하고 아름다운 이물질은 무엇일까? 때때로 진진주는 생각했다. 그냥 생각한 건 아니고, 완전범죄를 꿈꾸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던 범인이 필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신문에서 글자를 하나하나 오려 문장을 만들듯,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조각조각 흩어진 침묵의 파편을 애써 그러모으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p.63 살과 살이 맞닿는 감촉은 뜨겁거나 차갑기보다는 사랑스러웠고, 나는 그 사랑스러움과 입 맞춘 적이 있었다. ---p.105 내 사전에 사랑은 없었다. 사랑이 있기 전까지는. ---p.105 이윽고 내 가슴속의 불이 꺼지고 빛과 어둠의 배열이 깨진 순간, 나는 난생처음으로 내 침묵을 배신했다. 내가 내뱉은 말이 끝끝내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떠나버림으로써 나를 영영 외롭게 만들 거란 걸 알면서도. ---p.121 오직 침묵으로 빚어진 문제와 답을 몇 차례 주고받으면서, 어쩌면 나는 우리 사전에 모종의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나’를 ‘네 앞에 있는 사람’으로 풀이하고 ‘너’를 ‘내 앞에 있는 사람’으로 풀이하면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는 형편없는 사전이 되고 말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 애를 나로부터 가장 멀고 외딴 곳에 존재하는 나의 자전축으로 두고 싶었다. ---p.129 아니요. 반대예요. 시간이 허락해준 게 아니라, 시간이 허락해주지 않았음에도 그러기를 선택한 거예요. ---p.173 마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 같았다. 마음이 변했어, 라고 하지 않아도 마음은 그 자체로 변하는 것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딴마음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내리고 흩날리고 녹고 더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눈 같은 것이었다. ---p.195~196 그날 나는 앞으로 내 안에서 끊임없이 내리고 흩날리고 녹고 더러워지기를 반복할 눈을 보았다.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이었지만 혼자 봤다. 더 이상 내 사전에 ‘함께’라는 단어는 없었으니까. ---p.196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는 말은 잘못됐다. 무언가 나아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지나가야만 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시간이 잠시 멈춰 있기를 간절히 바라곤 한다면, 내 경우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머뭇거리거나 뒤를 돌아볼 새 없이 부지런히 발을 놀려서 나로부터 최대한 멀리 떠나가버리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시간이 시간을 거스르기를, 스스로의 배신자가 되기를 바랐다. ---p.209~210 그 안에 담긴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나는 물었다. 찌르르한 가슴속에서 물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나의 급소는 사랑이었고, 사랑은 오직 내 밖에만 있었다. ……내 사전에 더 이상의 사랑은 없었다. ---p.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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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겹으로 포개지는 시간의 궤도
스스로 미아가 되기를 택했던 계절을 마주하다 출판사에서 타인의 문장을 다듬는 일을 하고, 로맨스 소설 속 오탈자 찾기를 취미로 둔 편집자 진진주에게 삶이란 온전히 몰입하는 무대가 아닌, 객석에 우두커니 앉아 무대 위의 자신을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감정이 소용돌이칠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하지 않고 “진진주는 마음이 아프다”라며 스스로를 제3자의 자리에 놓아두는 사람. 자신과의 인력을 지워내고 타인처럼 거리를 두어야만 마음이 편한 그는 규정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 감정을 극도로 아끼며 일상을 영위해나간다. 모든 것이 겉돌던 12월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소란과 함께 첫눈이 내리고 진주는 뜻하지 않게 시누이의 아이들을 홀로 돌보게 된다. 고요하던 진주의 일상에 침입한 다섯 살 조카 석기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너는 둘 중에 누가 더 좋은데? 만약 둘이 영영 헤어진다 그러면 누구랑 같이 살 건데? 진진주는 그렇게 물으려다 관두었다. 이석기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고 물었을 때 둘 중 하나를 택하는 대신 “나는 엄마랑 아빠 하나뿐이야!” 자신 있게 소리치는 애였다. ‘하나뿐’의 정의를 지 맘대로 달리했다. (21쪽) 석기는 소떡소떡이 먹고 싶다고 떼를 쓰다가도 막상 눈앞에 대령하면 “이제 안 먹고 싶대요, 쟤가”라며 엉뚱하게 주어를 돌려버린다. 석기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은 계속된다.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자다 말고 횡단보도 위에 멈춰 서서 스스로 ‘실종’되기를 자처한다. 건너기 위한 길이 아니라 잠시 머무르기 위한 자리인 양 횡단보도 한복판에 선 조카를 데리러 가며, 진주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던 자신의 내면에 파문이 이는 것을 느낀다. 게다가 석기의 유치원 가방 속에서 발견된 한 장의 종이-겉보기엔 텅 빈 백지 같지만 연필을 눕혀 살살 문지르면 글씨가 드러나는 깜지-는 석기의 손목에 남아 있던 벌건 시계 모양 자국과 맞물리며 먼 시간 속에 잠들어 있던 진주의 기억을 현재로 소환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석기의 물음을 건네받은 그때 그 순간, 나는 스스로를 남처럼 대하지 않고 스스로처럼 대했다. 인사이드 아웃, 부캐를 안으로 수납하고 본캐를 밖으로 내돌렸다. 전설의 포켓몬처럼 진귀한 순간이었다. 난 나일 뿐이야,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순 없어! (31쪽) 이야기는 낯선 이국의 어학원 지하 방, 역시 세상과 섞이지 못하고 겉돌던 아이 ‘펄’과 마주 앉아 써내려가던 진주의 교환 사전으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단어의 뜻을 제멋대로 정의하며 마음을 나누던 시간,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것들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영영 잃어버려야만 했던 상실의 계절이, 지워지지 않는 손목 흉터처럼 진주의 시간 속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가 아닌 ‘진진주’라는 타인으로 숨어들어야 했던 과거가 석기의 투명한 시선을 따라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세상 속에서 자꾸만 길을 잃어버리는 석기와 시간 속에서 영영 길을 잃어버린 채 멈춰 선 진주. 두 사람은 어긋난 시곗바늘을 되돌리듯 서로의 발자국을 포개며 잃어버린 기억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진주는 과연 자신이 외면해왔던 슬픔과 결핍의 페이지를 제대로 마주하고 침묵의 사전 속에 잃어버렸던 ‘나’라는 단어를 다시 적어넣을 수 있을까? 사춘기가 오기가 무섭게 온갖 규칙을 위반하고 세계를 헤집고 다니는 식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애들한테 어른들이 아주 발라당 까져가지고! 하고 싫은 소리를 했다면, 나는 까지는 게 아니라 지워지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 하고 조금씩 서서히 지워지던 내가 앓던 건 성장통도 존재통도 아닌 부재통이었을지도 몰랐다. (127~128쪽) 상처의 자리 위에 다시 쓰는 단어들 침묵을 건너 비로소 완성되는 자기 호명 『잃기일지』는 언어의 형식과 균열을 서사의 뼈대로 삼는 지적인 소설이다. 진주는 어린 시절 경험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 선택적 함묵증을 겪으며 ‘말’을 잃고 침묵을 모국어처럼 체득한 인물이다. 그에게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가림막이다. 진주는 끊임없이 자신을 1인칭이 아닌 ‘진진주’라는 3인칭으로 부르며 고통의 주체로부터 자아를 탈각시킨다. 그와 동시에 소설 전반에 반복되는 “내 사전에 ~은 없다”라는 문장과 단어의 의미를 자유롭게 정의하는 사전 놀이는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지켜내려는, 조용하지만 완강한 방어적 선언에 가깝다. 소설은 ‘지금-여기’의 진주와 ‘그때-거기’의 진주를 “시시각각(씨씨깎깎)” 겹쳐놓으며 시간의 선조성을 거부한다. 작가의 말에서 고백하듯, 시간은 단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양안복시”처럼 두 겹으로 포개진다. 필리핀 바기오의 지하 방에서 펄과 주고받았던 교환 사전의 침묵은 현재 시점에서 조카 석기가 보여주는 기벽과 공명한다. 석기는 진주의 유년 시절이 투사된 거울인 것이다. 무엇보다 작가는 “잃어버린 것을 더 잘 잃어버리는” 일을 통해, 온전한 소유나 완벽한 복원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억지로 빈자리를 메우기보다 그 부재 자체를 응시하고 품어 안는다. 검은 잉크로 쓴 문장 뒤에 남겨진 새하얀 깜지의 눌린 자국처럼, 드러나지 않았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침묵의 상흔을 끌어안을 때, 진주는 비로소 오랜 시간 남처럼 대하던 ‘진진주’라는 방어벽을 깨고 나와 “나는 나”라고 스스로를 호명하며 주어의 자리 위에 당당히 바로 선다. 똑똑, 하고 노크하자 굳게 잠긴 문 안쪽에서 딸깍, 하고 잠금쇠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건 곧 입국이 허가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내게 허락된 건 한시적인 체류일 뿐, 서로의 시간과 서로의 마음과 서로의 사전에 적힌 단어를 완전히 포개놓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따 오는 것만큼이나 아득한 일이었다. 그 아늑한 아득함 속에서, 우리는 종종 서로의 이름을 포개어놓았다. (134~13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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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기일지》는 잃어버린 것들을 더 공들여 잃어버리는 중인 진진주의 이름 찾기, 자아 찾기, 언어 찾기의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 특별한 사건은 없다. 집요한 농담, 미묘한 진실, 영혼의 “난삽한” 파닥임이 있다. 늘 무언가가 “마려운” 감정에 놓인 인물들의 시급한 상황이 있다. 진진주는 슬프다는 말 대신 시종일관 농담한다. 여러 개의 목소리를 쓰고 벗으며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그의 유일한 가면은 목소리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목소리가 전부인 소설, 목소리로 이루어진 변검술이다. 이 울툴불퉁하고 자유로운 목소리는 슬픔을, 정확히는 슬픔이 퍼지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진진주의 ‘애씀’이다. 그가 애쓰는 이유는 지금, 이 삶이 어렵기 때문이다. 당신이 잃어버리고도 잃은 줄 모르는 것이 있다면, 이유 없이 슬퍼진다면, 진담보다 농담에 기대어 이 소설을 읽어보시라. “시간이 아프다”는 통각(統覺)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 박연준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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