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더러운 것들 007
댄스, 댄스, 댄스 051 아무것도 아닌 093 누구도 133 우리가 다시 안을 때 169 |
장희원의 다른 상품
|
“이 책은 고통을 초과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 사람은 우는 법도 잊은 채 고통의 한복판을 배회한다. 사람이 몸을 붙잡는 것은 그때다.” 다섯 편의 연작소설의 화자들은 각기 다른 상실을 경험한 존재들이다. 상실은 개인을 취약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기분에 사로잡히게 한다. 화자들이 상실과 관계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는 상실의 당사자로, 혹은 목격자로, 생존자로, 관계자로 존재한다. 그러나 상실은 그들을 질적으로 바꾼다. ‘더러운 것’(〈더러운 것들〉), 아무것도 아닌 존재(〈아무것도 아닌〉), 무엇을 느끼거나 감각하기 어려운 상태의 존재(〈댄스, 댄스, 댄스〉, 〈누구도〉, 〈우리가 다시 안을 때〉). 상실을 겪은 개인은 있지만 없는 존재가 된다. 한참 후에 사장이 가게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두 달치에 가까운 월급을 주지 않고 그를 내쫓았을 때, 그러나 여전히 버젓이 영업하는 가게 앞으로 그가 찾아갔을 때 사장은 그의 눈을 똑똑히 보고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네가 누군데. 대체 누군데. 네가. ―본문 102쪽 그러나 개인의 특수한 고통이라는 생각되는 사건들에서 우리는 무관하지 않다. 거대한 미디어를 통해 연결된 우리는 심지어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도 이 세계의 죽음과 불합리에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사자이자 목격자로, 목격자이자 관계자로 존재하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노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두려워한다. 그 모든 것의 총합으로서의 자신을 견디지 못할 때는 그저 뻣뻣하게 굳고자 한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기를. 그저 묵묵히 내 일을 하고, 나의 소망을 바라고, 그렇게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녀는 휴게실에 앉아서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았다. 어지러운 화면 속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그녀는 집중을 하려고 애를 썼다. 어둑한 거리가 보였다. 죽 뻗은 대로 위에 검고 거대한 구멍이 뻥 뚫려 있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비가 고인 지하를 보여주다가,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것을 주제로 보여주는 방송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화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하려고 하면 할수록 모든 것이 점점 더 멀어졌다. 익숙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오고 누군가는 그러지 못하는. ―본문 89쪽 장희원은 이 세계의 개인들이 ‘춥다’고 말한다. 고립되고, 자신의 고통을 언어화하지 못하는 사람들. 목격자가 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거나(〈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다시 안을 때〉), 참사의 이미지 속에서 자신의 상실을 보는 사람들(〈댄스, 댄스, 댄스〉). 분명히 우리는 춥다. 이 거대한 고통과 참사 앞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몸의 온도를 낮추고 무감각해지기를 선택한 우리들은 ‘당신은 춥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가 춥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동상에 걸린 피부를 만지면 고통스럽듯, 타인의 온기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를 다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실재하는 타인의 몸, 그 온도, 그 고통이다. 몸과 몸의 만남. 그 물성이 우리를 이 땅에 붙든다. 당신은 춥다. 그는 검지로 그녀를 가리켰다. 아주 많이. 엄청나게. 그는 지금부터 많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숨을 참았다.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검고 육중한 몸. 땀과 향수로 번들거리는 피부. 두꺼운 목. 땀 냄새가 났다. 그는 거대한 두 팔을 벌리고 옷을 벗었다. 입고 있던 얇은 자줏빛 원피스가 바스락거렸다. 그러고는 뒤에서 그녀를 꽉 껴안았다. (중략) 그녀는…… 추웠다. 그의 말처럼 순식간에 추위가 엄습했다. 아주 오랫동안 비를 맞고 있었던 것 같았다. 추위와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헤맸던 것 같았다. 뼛속 깊이 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부딪쳤다. (중략) 모든 감촉이 낯설고 크게 다가왔다. 고통스러웠다. 그녀가 버둥거릴수록 그는 더욱 더 힘을 주었다. 자신을 붙잡는 힘.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그녀는 새삼 그 앞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 이게 내 몸. 내 팔과 다리. 누군가가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이 세상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본문 165~166쪽 ‘몸의 없음-있었음’의 시공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참사 이후, 우리의 존재와 비존재를 적극적으로 마주하는 소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가장 먼저 발전한 분야는 인간 오감을 확장하고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감각하고자하는 시도였다. 전등은 인간의 시각을 보완했고, 전화는 청각을 보완하는 식이었다. 정보통신의 발달은 개인의 오감이 닿지 못하는 세계의 이야기를 우리 앞에 생생하게 가져다놓았다. 뇌의 매커니즘을 알아가면서 인간은 점점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4D영화나 가상현실은 특정한 기술을 통해 인간에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감각을 갖게 했다. 그러나 이런 세계의 개인은 너무나 많은 정보와 감각에 노출된 나머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감각을 차단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정보에는 무감하기. 이것은 어쩌면 과잉된 감각의 세계의 새로운 생존법인지도 모른다. 뉴스에서는 연일 참사가 보도된다. 패권주의와 테러리즘, 전쟁처럼 먼 곳의 이야기뿐 아니라, 당장 내가 타는 지하철, 갔던 골목에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죽는다. 우리가 먹는 빵을 만들면서, 우리가 타는 자동차를 만들면서 사람이 죽는다. 손미 시인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손미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몸과 몸》은 당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소설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 앞에 생의 감각을 가져다둔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의 몸, 붙들 수 있는 너의 몸. 끌어안으면 체온이 느껴지고, 더운 날에는 땀과 냄새가 나고, 미끌거리고 끈적이기도 하는 우리의 ‘몸’. 이 소설이 지금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라도 안부를 묻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작가의 말은 그렇기에 의미심장하다. 멀리 있어도 나의 몸을 통과해간 사람들, 구체적인 물성으로 기억되는 순간을 가진 사람들, 더럽거나 추하거나 따듯하거나 다정했던 그 모든 사람을 가로지르는 물성이야말로 최후의 순간에 우리가 붙드는 것이 된다. 시인이자 소설가 장혜령은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고통을 초과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프다고 말할 시점을 놓쳐서 고통의 종점까지 가버린 사람. 그 사람은 우는 법도 잊은 채 고통의 한복판을 배회한다. 사람이 몸을 붙잡는 것은 그때다.” 한편 이 소설이 개인에게 모든 것을 미뤄두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다섯 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섯 편의 소설을 느슨하게 이어주고 있는 것은 ‘기준’이라는 인물이다. 그러나 여느 연작소설과 다르게, 소설 속 기준은 서로 다른 나이, 성격, 관계로 등장한다. 고통을 지켜보고 고통의 곁에 서고 고통 받는 당사자, 어느 순간에는 부재 자체. 그러나 고통을 함께 걷는 ‘우리’에게 기준은 어쩐지 낯설다. ‘이상하게도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었다. 그럴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는데도’(28쪽). 그러나 기준은 위로의 순간을 담담히 담당한다. ‘뭐가 됐든 기준이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50쪽) 참사를 겪고 난 개인들, 인물의 소실을 마주한 개인들이 등장하는 다섯 편의 소설을 묶어주고 있는 인물의 이름이 ‘기준’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수많은 죽음들 앞에서 흔들린 것이 무엇인지,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가 다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소설은 그림자처럼 드리운 기준의 존재를 통해 묻는 듯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뜨겁다. 우리의 자리를 성찰하게 하고 우리가 어떤 그림자 속에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섬세하고 예리한 문장을 통해 독자의 모든 통각을 열게 하고, 그대로 외부와, 타인과 접촉하게 한다. 그 펄펄 끓는 통각 속에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몸, 우리의 실체, 말로써는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구체성. 존재를 존재이게 하는 어떤 것은 아닐까? 작가의 말 쓰는 동안 감히 써도 될까,라는 마음 때문에 괴로웠지만, 누군가에게 위로를, 직접 끌어안고 위로를 건네고 싶다는 바람을 조심스럽게 담고 싶었다.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끌어안는 일이 전부가 아닐까. |
|
이 소설을 읽고 떠오른 이미지가 하나 있다. 황야를 걸어가다가 주저앉은 한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앤드류 와이어스의 그림이다. 모델은 화가의 이웃으로,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화가는 비참을 폭로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자의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작가 장희원의 시선이 이 그림을 닮아 있다. 고통에서 쉽게 회복될 수 있다는 바람이 타자에 대한 모독일지 모른다는 시선. 작가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철저히 바라보지만, 그를 쉽게 일으켜 세워주지는 않는다.
이 책은 고통을 초과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프다고 말할 시점을 놓쳐서 고통의 종점까지 가버린 사람. 그 사람은 우는 법도 잊은 채 고통의 한복판을 배회한다. 사람이 몸을 붙잡는 것은 그때다. 그는 사랑이 끝난 연인의 몸을 붙잡고, 죽은 아들의 재를 붙잡으려 하고, 모멸을 감수하며 때로 더한 고통 속으로 자기 자신을 내던진다. 몸이 있어 고통이 있기에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거임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 - 장혜령 (시인,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