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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축시_박덕은 제1부 곁, 문득 그리운 곁, 문득 그리운 꽃자리의 꿈 홍매화 강변 찻집 독백 녹차를 우려내며 엉겅퀴 그리움 무등산 토함산 해돋이 모항의 윤슬 봄날 삶의 미학 사랑 매화 향기 꽃샘 눈 고향의 봄 녹색의 방 그리고 가끔은 이팝나무꽃 제2부 어느 여름의 여운 각시붓꽃 동적골 장음계 가지치기 그 후 어느 여름의 여운 쑥부쟁이 바닷가 단상 오월 장미 용마루길 수국 꽃밭에서 광야 사자 소리 불면 달맞이꽃 설화 해바라기 빛의 보살상 물레방아 정경 풍경 소리 치자꽃 명사십리 밤 파도 그리움은 옛집 가득 제3부 바람 부는 날 찻집에서 가을비 어떤 사랑 회한 석류 귀소의 늪 바람 부는 날 찻집에서 장불재 억새 도라지꽃 삐비꽃 피는 언덕 11월 들산재 오르며 툇마루 달그림자 노송 나이테 세월 강 바람꽃 붉은 달 구절초 어떤 고백 제4부 아직도 못다 한 말 섬의 뜨락에서 입동 무렵 눈꽃 그해 겨울 살아가노라면 호수 호접난 기우杞憂 소릿재 애환 백화 태풍 불던 밤 등대 마음 저 편 간이역 가는 길 노을 가시나무새 그리움·2 아직도 못다 한 말 유년의 기억 하나 평설 김애순 시인의 제3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박덕은 |
靑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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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 문득 그리운
공명의 거리 초행길 동행하다 이름 바랜 비망록 어느 길목에서 가끔 마주치는 낯선 해후 저마다 사유의 뿌리 뻗으면서도 명도 다른 붙박이로 광채 발하며 어느새 한 표적 밝히고 있는 우주 작은 공간 인연 꽃 호수에 잠긴 수면에서도 오묘한 시간의 익숙함에 잔물결도 일지 않는 산 그림자 품어 눈빛 하나로 도화 동백 피워내느니 가깝다는 것은 벽이 없는 걸까 내밀한 언어 마디도 한통속으로 스며 대나무 몸통 키우며 서성이는 날들 다가가 숨결 이슬에 젖어보아도 라일락 감싼 공기의 살결이여 오늘도 생존의 보풀 한 올 사려 들고 운명의 피륙을 직조하는 지상에 존재하는 푸른 직녀 곁에 있어도 문득 그리운 건 비우며 채우며 쌓여가는 인연의 등걸 세월 무늬인가 지금은 뿌리까지 물들어가는 것을 -------------------------------------------- 꽃자리의 꿈 침묵의 세월 벽두에서 정갈한 촛불 서기 품었느니 초록을 삼킨 잎눈은 앙상한 가지 언저리에 덜 여문 배아로나마 머지않은 꽃자리 어르는데 새날을 여는 풋풋한 기운 몇 타래 남루를 털어내고 발효시킨 삶의 적조 숙성될 그 날은 잎사귀 움트는 그맘때쯤일까 대물려 그랬듯이 설렘 깃든 발걸음 되새김하는 묵은 해 즈려밟고 잿빛 능선 올라선 뾰족 연두 초입의 첫새벽 말간 기운 마주하며 새 부대에 담길 한해의 첫 문장 느낌표 살폿 어르고 심지 돋우는데 지난날 갈무리한 나목엔 하얀 입김 모락모락 갈길 서두는 춘설의 기별에 꽃자리 파르르 꿈을 잉태한다 -------------------------------------------- 홍매화 눈발 날리는 도내기샘 식솔 무명옷 대야 그득 서슬 맺힌 생의 설빙을 붉은 볼로 헹궈내는 고결한 기품 싸리 껍질 손등 입김으로 녹이며 햇살 점지 메아리치는 휘파람새 방망이질 층층이 매운 설움 끝내 멍울져 핏빛 물든 심장에 꽃눈 벙그는가 계절의 꼭두새벽 잉걸불 지피는 내 유년의 어머니 -------------------------------------------- 강변 찻집 아슴한 기억의 창 너머 윤슬 파닥이던 강물에 은빛 물고기 튀어 올라 발그스레 술 익는 하늘가에 덧뵈기 춤사위 내걸던 즈음 마주한 찻잔 속엔 사유하는 은유의 잎새 부풀고 등 뒤로 물드는 저녁놀 따라 서로의 가슴에 번져나던 다래 넝쿨 스쳐 지나간 바람도 아닌데 꽃무릇 인연 날리며 더디 온 해후에 쌓인 그리움 밀물 되었나 섬진강 물안개로 자욱해지던 연둣빛 감성 가끔은 탯자리 찾아드는 연어가 되어 그 가을 강변 찻집 삶의 어귀를 회귀의 지느러미로 차오르는 것을 -------------------------------------------- 독백 수십 여 년 전 눈 내리던 이브의 그 밤 불꽃의 선율 하나 사막의 오선지에 획을 그었소 저음의 안단테로 막오른 소나타 쉼표로 흩어져있던 음표들이 저마다의 꼬리를 달고 오선의 여백을 넘나들었소 그날 이후 후광 맑은 영혼을 품고 오솔길 찾아들었지요 선선한 솔바람과 계곡물 소리 널찍한 바위 틈새에 스며 나는 숲 내음에 인드라망 호흡하고 어느 날은 부치지 않을 편지를 썼지요 함께 해도 늘 그리워서 들꽃 매무새에 끌려서 햇살 웃음 나누고 싶어서 지금까지 토닥이며 굵어 온 연분 만개한 연못에 만다라 새겨두고 꽃 피우며 연향의 언어들 직조해가요 가시연꽃 벙글어 은은한 향기 피어나는 어느 후일 기다리며 -------------------------------------------- 녹차를 우려내며 동지섣달 해거름 창밖에 시린 바람 서성일 때면 마중물로 차오르는 봇재 작설향 갯마을 어귀 홀로 선 마음 자락엔 뱃고동 멀어지는 수평선 바라보며 눈시울 붉히던 그 시절 아련하고 장독대 옆 오종종 피어난 옥국 향내에 감성의 모서리 젖어들 즈음 툇마루에 내려 쌓이던 이름 모를 그리움은 어느 하늘 언저리쯤 뭇별 되었을까 사계절 뒤채던 언어의 은비늘 하얀 차꽃으로 별밤 지새 피고 지더니 마른 혀에 정을 적셔 시간 숨결 얼러서 뜨겁게 받아내던 회오리의 날들이 풀빛 아포리즘 몸 물 빚어 심금을 적시는 물푸레 추억이여 -------------------------------------------- 엉겅퀴 홀로 나선 바람 휘도는 난장 건드리면 찌를 듯 볏 세우고 지난한 투병의 시간 만신창이 상처 안고 살아간다 각을 세운 털 복숭이 껍질 안 보드라운 줄기 속살 곁에 서면 흘러나온 말마디에서 헤쳐 온 에움길 묻어나는데 스러지는 병마의 모퉁이를 돌아서며 밋밋한 들풀의 여린 고갯짓에도 허리 낮춰 흔들릴 줄 아는 그녀 항가새 가슴에 핏빛 잇자국 새기며 꼿꼿한 가시꽃 피워낸 홀로서기에 푸른 작은 점에서 영겁 속의 찰나를 살아내는 풀숲의 고독을 읽는다 -------------------------------------------- 그리움 그대 발자국 소린가 하니 나뭇잎 스치는 소리 옷깃 사락거리는 기척인가 하니 솔바람 소리 사위 에워싼 건 초록 숨인데 눈자위 불 밝히는 황새냉이 꽃등 습지인 듯 꽃물 들어 심금 젖어들면 가을 안개로 차오르는 가슴 언저리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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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설
김애순 시인의 제3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박 덕 은 (문학박사, 전 전남대학교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1. 김애순 작가론 가) 문학적 자양분과 실존적 출발점 청아靑雅 김애순의 문학은 학식 있는 가문의 내력(’서당집 손녀딸’)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유년의 도서관 경험에서 싹을 틔웠다. 초등학교 시절 동시로 최우수상을 받으며 조기 발현된 문학적 재능은 전남여중과 전남여고를 거쳐 광주교육대학교 국어반 시절 교지 권두시 발표와 방송 출연 등으로 이어지며 단단해졌다. 특히 청소년기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며 겪은 ‘오동나무 고샅과 메밀꽃밭’의 임사臨死 체험은 그에게 삶과 죽음, 환상과 실존의 경계를 응시하게 만드는 근원적인 시적 트라우마이자 자산이 되었다. 이후 36년간의 헌신적인 교직 생활과 섬 분교장 시절의 고독은 그의 시 세계를 단순한 감상에 머물게 하지 않고, 존재를 위로하는 따뜻한 시선으로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 문학적 연대기와 성과 1995년 계간 『문학춘추』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2000년 『문예사조』를 통해 중앙 문단에도 이름을 알리며 시인의 문학적 영토는 확장되었다. 제1시집 『오동꽃 필 때면』에서 시작해 제2시집 『겨울 그 뒤』를 거쳐 제3시집 『곁, 문득 그리운』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언어는 점차 정제되고 깊어졌다. 전남문학상(제38회)과 전남문인협회 공로상을 수상하고, 전남문학 편집장 및 광주문인협회 부회장 등 지역 문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역임하며 치열한 문학적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다) 주요 시 세계 분석 김애순의 시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자’는 전인적 인생관을 바탕으로, 상처를 응시하되 끝내 치유를 지향하는 건강한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김애순 시 세계의 삼각축은 다음과 같다. ① 우주적 인연과 교감의 미학 시인은 세상을 홀로 존재하는 고립된 섬으로 보지 않고, 모든 존재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인드라망’적 세계관을 보여준다(「독백」). 표제작 「곁, 문득 그리운」에서 알 수 있듯, 타인과의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단절이 아닌 서로 ‘뿌리까지 물들어가는’ 성숙의 계기로 삼으며, 스스로를 삶의 운명을 짜는 ‘푸른 직녀’로 형상화한다. ② 식물적 상상력과 낮은 곳을 향한 환대 김애순의 시에서 식물(꽃)은 시인 자신의 투사이자 가련한 인간의 초상이다. 「각시붓꽃」이 고단한 ‘층계 진 삶’에서 피워낸 보랏빛 기별이라면, 설화를 바탕으로 한 「쑥부쟁이」는 첫정의 외로움을 품고도 타인을 위해 단비를 주는 이타적 존재이다. 특히 인생을 ‘파랄 수도 붉을 수도 없는 뒤섞인 연보라 꽃잎’으로 정의하는 대목은 슬픔과 기쁨이 버무려진 삶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시인의 원숙한 시선이다. ③ 귀소 본능과 실존적 치유 그리고 비움의 미학 노년에 접어든 화자의 시선은 존재의 시원인 고향과 부모로 향한다. 「귀소의 늪」에서는 혈기 잃은 삶의 뒤안길에서 ‘무소유 꽃불’을 피우려 하고, 「툇마루 달그림자」에서는 과묵했던 아버지에 대한 서러운 기억을 ‘궁남지의 연꽃’이라는 찬란한 생명력으로 정화한다. 나아가 「풍경 소리」에 이르러 시인은 번뇌의 조임줄을 내려놓고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의 절대적 자유와 비움에 도달한다. 라) 폐허에서 밀어 올리는 ‘새순’의 화룡점정 김애순 시인은 시력이 나빠지는 육체적 한계와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마음 저 편」에서 잘려 나간 고목 가장자리에서 끈질기게 돋아나는 ‘새순’을 바라보며 생의 내력을 이어간다. 그녀의 시는 이생의 발자국 소리가 바람처럼 사라질지라도,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해 하얀 밤을 지새우는 「등대」의 외로운 성자처럼 존재한다. 고독과 슬픔을 발효시켜 끝내 아름다운 문학적 ‘화룡점정’을 찍고자 치열하게 정진하는, 청아靑雅 김애순의 문학적 여정은 여전히 푸르게 갱신되는 중이다. 2. 김애순 작품론 김애순 시인의 제3시집 『곁, 문득 그리운』에 수록된 다음 네 편의 시, 즉 「곁, 문득 그리운」, 「독백」, 「봄날」, 「꽃샘 눈」은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과 인연의 오묘함, 그리고 자연의 순환 속에서 피어나는 생의 서정을 깊이 있는 언어로 직조해내고 있다. 시인은 삶을 관조하는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을 탐구한다. 김애순 시인의 시 세계는 ‘인연에 대한 깊은 사유’와 ‘시간의 흐름을 포착하는 감각적 언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시인은 지상에서의 삶을 단순히 흘러가는 것으로 보지 않고, 우주적 인연의 실실이 모여 하나의 피륙을 짜나가는 ‘직조織造’의 과정으로 인식한다. 그녀의 시에서 자연(라일락, 연꽃, 홍매화, 꽃샘 눈)은 인간의 감정과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다. 겨울의 고통을 견디고 새봄을 맞이하는 생명의 에너지는, 고독 속에서 그리움을 비우고 채우며 성숙해가는 인간의 내면과 닮아 있다. 그중에서 「곁, 문득 그리운」을 살펴보자. 공명의 거리 초행길 동행하다 이름 바랜 비망록 어느 길목에서 가끔 마주치는 낯선 해후 저마다 사유의 뿌리 뻗으면서도 명도 다른 붙박이로 광채 발하며 어느새 한 표적 밝히고 있는 우주 작은 공간 인연 꽃 호수에 잠긴 수면에서도 오묘한 시간의 익숙함에 잔물결도 일지 않는 산 그림자 품어 눈빛 하나로 도화 동백 피워내느니 가깝다는 것은 벽이 없는 걸까 내밀한 언어 마디도 한통속으로 스며 대나무 몸통 키우며 서성이는 날들 다가가 숨결 이슬에 젖어보아도 라일락 감싼 공기의 살결이여 오늘도 생존의 보풀 한 올 사려 들고 운명의 피륙을 직조하는 지상에 존재하는 푸른 직녀 곁에 있어도 문득 그리운 건 비우며 채우며 쌓여가는 인연의 등걸 세월 무늬인가 지금은 뿌리까지 물들어가는 것을. - 「곁, 문득 그리운」 전문 이 시는 표제작답게 핵심 정서인 ‘그리움’과 ‘인연’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인간은 타인과 연대하면서도 동시에 철저히 혼자다. 이러한 실존적 한계를 문학 이론에서는 ‘존재론적 고독’이라 부른다. 이 시는 바로 그 지점, 즉 타인과 함께하면서도 느낄 수밖에 없는 근원적 그리움의 정서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포착한 그리움은 단절이나 소외로 인한 슬픔의 찌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와 타자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상호 주체적 물듦’이자, 인간 정신이 한 단계 도약하는 성숙의 과정으로 그려진다. 곁에 있어도 문득 그리운 감정은 상대와의 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고유한 단독자로서 빛을 발하면서도 결국 하나의 거대한 인연으로 묶여 있음을 깨닫는 우주적 신비에 가깝다. 이러한 관계의 신비는 시 속에서 동양적 관조의 미학을 통해 극대화된다. “잔물결도 일지 않는 산 그림자 품어/ 눈빛 하나로 도화 동백 피워내느니”라는 구절은 주객합일主客合一과 이심전심의 동양적 정신주의 비평의 시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백미다. 외물外物의 요동에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내면(잔물결도 일지 않는 산 그림자)이 존재할 때, 비로소 언어를 초월한 깊은 교감(눈빛 하나)이 가능해진다. 언어적 수사나 물리적 접촉 없이도 침묵 속에서 도화와 동백이라는 생명의 꽃을 피워내는 행위는, 대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 자체로 비추어보는 관조적 태도가 도달할 수 있는 미학적 극치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순응과 관조의 세계 속에서도 시적 화자가 결코 수동적인 객체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을 “지상에 존재하는 푸른 직녀”로 명명한다. 이는 신화론적 비평과 페미니즘 비평의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재해석이다. 설화 속 직녀가 단절된 세계에서 견우를 기다리며 눈물짓는 수동적 인물이었다면, 이 시의 ‘푸른 직녀’는 매일의 삶이라는 주어지거나 지워진 운명의 실을 스스로 짜 내려가는 능동적인 창조자다. ‘푸른’이라는 색채 이미지는 직녀가 가진 생명력과 주체성을 시각적으로 보증한다. 시적 화자에게 운명이란 순종해야 할 절대적 굴레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직접 직조해 나가야 할 예술적 대상인 것이다. 결국, 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뿌리까지 물들어가는 것”은 타자에게 나를 잃어버리는 맹목적 종속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운명과 타자와의 인연을 온전히 껴안는 ‘아름다운 결단’이다. 개별성을 유지한 채 전체로 스며드는 이 물듦의 미학을 통해, 시적 화자는 인간이 가진 근원적 외로움을 우주적 인연의 따스함으로 치유해 낸다. 이 시는 고독을 성숙으로, 운명을 주체성으로 승화시킨 고요하고도 강렬한 성취다. 이번에는 「독백」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자. 수십 여 년 전 눈 내리던 이브의 그 밤 불꽃의 선율 하나 사막의 오선지에 획을 그었소 저음의 안단테로 막오른 소나타 쉼표로 흩어져있던 음표들이 저마다의 꼬리를 달고 오선의 여백을 넘나들었소 그날 이후 후광 맑은 영혼을 품고 오솔길 찾아들었지요 선선한 솔바람과 계곡물 소리 널찍한 바위 틈새에 스며 나는 숲 내음에 인드라망 호흡하고 어느 날은 부치지 않을 편지를 썼지요 함께 해도 늘 그리워서 들꽃 매무새에 끌려서 햇살 웃음 나누고 싶어서 지금까지 토닥이며 굵어 온 연분 만개한 연못에 만다라 새겨두고 꽃 피우며 연향의 언어들 직조해가요 가시연꽃 벙글어 은은한 향기 피어나는 어느 후일 기다리며. - 「독백」 전문 이 시는 성탄 전야의 내밀한 기억에서 출발하여, 한 인간의 영혼이 고독한 유랑을 거쳐 우주적 교감과 철학적 깊이로 나아가는 구도적求道的 여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 문학적 수작이다. 시적 화자는 인생의 전환점을 ‘사막의 오선지’라는 원형적 상징으로 형상화한 뒤, 그 위로 ‘불꽃의 선율’과 ‘저음의 안단테’를 교차시키며 시각의 청각화라는 탁월한 공감각적 심상을 구현한다. 황량한 삶의 트랙은 격정적인 불꽃과 묵직한 안단테의 음악적 대위법을 통해 장엄하면서도 차분한 서막으로 변모한다. 이어 숲이라는 자연 공간에서 펼쳐지는 ‘인드라망 호흡’은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우주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설緣起說적 깨달음으로 의식을 확장시킨다. 이러한 철학적 깊이는 “연분 만개한 연못에/ 만다라 새겨두고”라는 구절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연못이라는 공간에 우주의 진리인 만다라를 투영함으로써 삶의 모든 인연과 상처가 결코 무의미한 파편이 아닌 하나의 숭고한 예술이자 종교적 완성임을 선언한다. 시의 종막에서 시적 화자의 깨달음은 ‘가시연꽃’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고요한 기다림으로 수렴된다. 고통의 가시를 뚫고 피어날 연꽃의 은은한 향기를 기다리는 태도는 생生의 모든 질곡을 묵묵히 품어 안으려는 지극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결국 이 시는 음악적 비유로 삶을 열고, 불교적 사상으로 세계를 넓힌 뒤, 식물적 상징을 통해 생에 대한 경배로 문을 닫는 깊이 있는 서사를 완성해 낸다. 이번에는 「봄날」을 만나 보자. 관절 앓던 계절이 동안거 한 켜 밑둥치에 두르고 꼭두새벽 홍매 밝혀 자리 털고 일어나 분갈이 나서는데 얼얼했던 맨몸에 실핏줄 퍼져가자 쌉싸래한 나물 방천 단 바람 타고 움 자리 행간마다 연두 버물림 아지랑이 받아내는 나른한 하구 둑에는 시원에서 흘러와 넘실대는 방랑의 유체들 늘 시작의 의미 담아 떠나는 구원의 틈새길 초입일지라도 풀잠자리 알이라도 좇아보는 한 여행자 있었느니 벚꽃 난 싹틔우는 낯익은 길목엔 언제 달려왔는지 혼기 찬 하얀 목련 유두 붉히며 버선발로 따라와 봉긋 안긴다. - 「봄날」 전문 자연의 순환 속에서 겨울과 봄은 단순한 계절의 교차를 넘어, 죽음 같은 침묵과 경이로운 탄생이 부딪치는 극적인 도약의 공간이다. 이 시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 새 생명이 움트는 봄의 역동성을 지극히 신선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해 낸다. 생명의 태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시적 화자가 선택한 첫 번째 미학적 장치는 의인화 기법이다. 겨울을 단순히 황량한 배경으로 방치하는 대신 ‘관절 앓던 계절’이나 ‘동안거冬安居’라는 시어로 치환한 점이 돋보인다. 이는 겨울을 묵묵히 견뎌낸 생명에게 인격을 부여한 결과이다. 내면의 에너지를 응축하며 봄을 준비하는 신성한 침묵의 시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인고의 시간을 깨뜨리며 찾아온 봄의 풍경은 공감각적 심상의 폭발을 통해 시각과 미각, 촉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시 속에서 빛나는 ‘연두 버물림’이라는 수사는 봄의 색채를 미각적·촉각적 행위로 버무려낸 이 시의 백미다. 싱그러운 연두색이 가득 차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형상화함으로써, 독자는 봄을 온몸의 감각으로 입체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처럼 거대한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시적 화자의 시선은 결코 거시적인 풍경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봄의 길목에서 스스로를 ‘풀잠자리 알이라도 좇아보는 한 여행자’로 낮추는 태도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마저 소중히 응시하는 따뜻한 생명 존중의 세계관을 투영한다. 시적 화자는 대지 위의 모든 존재가 봄이라는 축제의 동등한 주인공임을 나직이 선언한다. 시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러한 생명력의 예찬은 극적인 시각화를 통해 정점에 달한다. “혼기 찬 하얀 목련 유두 붉히며 / 버선발로 따라와 봉긋 안긴다”는 구절은 목련이 피어나는 순간의 설렘을 관능적이면서도 순수한 이미지로 터뜨린다. 순백의 목련이 개화 직전 품어내는 붉은 기운을 버선발로 달려와 품에 안기는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낸 표현은 탁월하다. 이는 겨울이라는 기다림 끝에 마침내 봄을 맞이하는 자연의 환희가 감각적으로 폭발하는 지점이다. 이번에는 「꽃샘 눈」을 탐구해 보자. 차창으로 혼돈의 아우성을 바라봅니다 길 잃은 영혼의 잔상들이 환생한 듯 종횡무진 휘돌다가 투명한 가림막에 정수리 부딪치고선 냉담의 빗장에 뒷걸음칩니다 숨이 찬지 주춤거리다 때론 물구나무로 천지를 뒤집으면서 긴 겨울 강 건너오더니 저리도 분분한 몸짓 마지막 절규 터뜨리며 생애를 던져 나뒹굽니다 국경 없는 행로에 계절은 넘나들고 어설픈 연민은 하염없이 흐느적거리는데 흘러간 추억은 흰 벌떼로 되살아왔는가 황망히 돌아서서 선웃음 날리다 바람인 듯 혼령인 듯 허물어지는 퇴색한 넋 삼월 꽃샘 눈 어룽어룽 떠돌다가 최후의 환절마저 이내 지우고 맙니다 머물고 싶은 간절함은 보이지 않는 섭리의 재촉에 뼈 녹은 눈물 뒷걸음 치면서 홑겹 생의 한 쪽 시려옵니다. - 「꽃샘 눈」 전문 삼월에 내리는 꽃샘 눈을 바라보며 계절의 변화 속에 투영된 존재의 유한함과 소멸의 비장미를 노래한 이 작품은, 앞선 시들이 보여준 따스한 조화 및 생동감과 날카로운 미적 대비를 이루며 한층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낸다. 시적 화자는 창밖의 눈발을 단순한 자연현상이나 시각적 대상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대신 이를 ‘길 잃은 영혼의 잔상’이나 ‘황망히 돌아서서 선웃음 날리는 혼령’과 같이 살아 숨 쉬는 인격체로 바라보는 의인화의 기법을 활용한다. 투명한 창에 부딪혀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눈의 잔혹한 운명을 ‘마지막 절규’와 ‘나뒹구는 생애’로 구체화하여 형상화한 지점에서는, 대상에 시적 화자 내면의 슬픔과 고뇌를 온전히 투사한 강렬한 감정 이입의 성취가 돋보인다. 이러한 수사학적 장치들은 소멸의 과정을 관조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비극적 역동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문학을 세계의 법칙과 현실의 거울로 바라보는 반영론적 관점에서 분석할 때, 겨울과 봄 사이를 매개하는 ‘최후의 환절’은 단순한 계절의 교차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우주의 순환론적 질서와 보이지 않는 섭리를 상징한다. 시적 화자는 머물고 싶지만 시간의 흐름에 밀려 어김없이 떠나야만 하는 눈의 유한한 운명 속에서, 거대한 세계의 법칙과 유한한 존재의 한계가 부딪쳐 빚어내는 미학적 범주인 비장미를 건져 올린다. 성취될 수 없는 소망이 현실적 한계와 충돌할 때 발생하는 이 비장미는 작품 전체의 엄숙한 분위기를 지탱하는 핵심 동력이 된다. 나아가 이러한 자연의 소멸 과정을 시적 화자 자신의 내밀한 존재론적 성찰로 연결 짓는 표현론적 관점을 취해 볼 수 있다. 눈의 소멸에서 느끼는 ‘홑겹 생의 한 쪽 시려옴’이라는 감각적 고백은 단순히 외부 세계를 향한 연민이 아니라, 자연의 거대한 질서 앞에 선 인간 존재가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쓸쓸함과 고독감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시는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의 대조적인 이미지를 정교하게 교차시키고, 감정 이입을 통한 주객일체의 깊이 있는 세계 인식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외적인 자연의 변화를 내적인 자아 성찰의 계기로 치환함으로써, 존재의 근원적 한계와 비장한 아름다움을 한 편의 완성도 높은 문학적 고백으로 승화해 내고 있다. 김애순 시인의 시 「각시붓꽃」, 「쑥부쟁이」, 「용마루길」, 「풍경 소리」 이 네 편의 시들은 앞선 작품들에서 보여준 인연과 삶에 대한 관조를 한층 더 심화하여 식물적 상상력과 불교적 사유(수행과 해탈)로 확장해 나간다. 작은 들꽃(각시붓꽃, 쑥부쟁이)의 생태에서 가련한 인간의 운명과 지극한 사랑을 읽어내고, 자연의 공간(용마루길, 산사)에서 비움을 실천하는 과정을 깊이 있는 어조로 그려낸다. 이번 네 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정서는 ‘낮음’과 ‘비움’이다. 시인은 화려하고 높은 곳 대신 ‘층계 진 삶의 어귀’, ‘후미진 터’, ‘논둑길 밭둑길’, ‘벼랑 끝’처럼 소외되고 위태로운 공간에 주목한다. 그곳에서 피어나는 생명들을 통해 시인은 인간이 짊어진 외로움의 업보를 위로하고, 나아가 ‘내려놓음’으로써 도달하는 정신적 자유를 노래한다. 특히 불교적 영성(사바세계, 설법, 연리지, 죽비, 소요유)이 시 전반에 깊게 스며들어, 시인의 시적 여정이 단순한 감상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숭고한 ‘정신적 수행’으로 고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각시붓꽃」과 대화를 나눠 보자. 늘 한 모서리 허허로운 층계 진 삶의 어귀 흘러내린 달빛 차올라 기운 밤 하얗게 지새우고도 이슬 눈망울 건네주는 청초한 꽃잎 그 깊은 바다에 빠져든다 생태공원 후미진 터에 수줍게 피어나 낮은 땅 언저리 맴도는 후광은 사위의 옷깃 부여잡는 그리움의 환대 무용의 혈맥에 봄물 파르르 오르면 꿈에도 잊지 못할 인연의 붓발 받쳐 들고 오월을 물들인 기별은 온통 보랏빛이다. - 「각시붓꽃」 전문 이 시는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청초함을 잃지 않고 인연의 소중함을 전하는 ‘각시붓꽃’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노래한다. ‘층계 진 삶의 어귀’라는 공간은 현대인이 마주한 고단한 현실의 축소판이다. 시적 화자는 이 삭막한 숙명의 공간에서 밤새 이슬을 머금고 피어난 각시붓꽃을 발견하며, 인간 세계의 고뇌를 자연의 청초한 생명력으로 치유하는 문학적 반전을 시도한다. 시의 구조적 측면에서 주목할 점은 고달픈 현실 공간과 각시붓꽃이라는 자연 세계가 이루는 공간적 대립 구도이다. 굴곡진 인생을 상징하는 ‘층계 진 삶의 어귀’는 세속적 고뇌의 공간이지만, 그곳에서 피어난 꽃잎은 오히려 ‘깊은 바다’라는 원형적 상징으로 확장된다. 시적 화자는 꽃잎의 보랏빛 생명력에 깊이 침잠함으로써, 유한한 현실의 고통을 무한한 생명의 깊이로 포용한다. 나아가 ‘낮은 땅 언저리 맴도는 후광’이라는 표현은 소박하고 평범한 존재들이 지닌 숭고한 가치를 일깨우는 역설적 미학을 보여준다. 가장 낮은 곳에서 빛나는 후광은 세상을 향한 외면이 아니라, 상처받은 이들을 향해 시적 화자가 내미는 ‘그리움의 환대’로 기능한다. 이러한 관념적 주제 의식은 이미지즘 이론을 통해 감각적으로 구체화된다. 시적 화자는 오월에 피어나는 보랏빛 꽃이라는 시각적 색채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인연의 붓발’이라는 구체적인 사물로 형상화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과 인연의 소중함이라는 추상적 가치가 붓글씨의 힘찬 획처럼 시각적으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 감각적 전이를 통해 봄이 전하는 생명의 메시지는 독자의 마음속에 더욱 선명한 잔상을 남긴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문학이 지닌 정서적 기능과 표현주의적 가치를 충실히 수행한다. 시적 화자는 각시붓꽃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웅숭깊은 위로와 희망을 선물한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청초함을 잃지 않는 꽃의 생명력은 곧 우리 삶이 지닌 숭고한 가치에 대한 긍정이며, 봄이 인간에게 건네는 따스한 구원의 악수이다. 이번에는 「쑥부쟁이」를 탐구해 보도록 보자. 사유의 여백 타고 시려오는 가련한 혼백 무심한 발길에 밟히는 지천에 널린 들풀이라고 심령조차 헤프다 하리 불쟁이 딸의 비련에 얽혀 절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순간까지 비바람 찬 방황으로 떠돌았던 멍에 첫정의 허상에 뼛속까지 물들어버린 외로움의 업보라서 논둑길 밭둑길 가시덤불 틈새 어딘들 마다 않고 누비었거늘 바라기 식솔들 눈에 밟혀 머나먼 뜬구름으로 떠돌다가 우정의 구슬 은총 타인 위한 단비로 쏟아주고 그렁한 눈시울에 떠도는 설움 바위로 우레 견디며 꽃무릇 인연인 듯 가슴 졸이며 꿈결마저 파르르 야윈 영혼으로 고샅길 뿌리내린 가난한 화신 적막한 너의 눈빛 삶은 늘상 파랄 수도 붉을 수도 없는 뒤섞인 연보라 꽃잎인 것을. - 「쑥부쟁이」 전문 쑥부쟁이에 얽힌 불쟁이 딸의 슬픈 전설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과 타인을 향한 숭고한 희생을 애절하게 그려낸다. 이 시는 인류의 보편적인 신화나 민담의 구조가 어떻게 변주되는지 주목하는 원형비평적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시적 화자는 지천에 널린 쑥부쟁이를 단순한 들풀로 치부하지 않고 ‘첫정의 허상에 뼛속까지 물들어버린 외로움의 업보’를 지닌 존재로 바라봄으로써, 오랜 시간 전해 내려온 설화 속 비극적 정서를 현대적 시선으로 재해석한다. 척박한 땅 어디든 마다치 않고 피어나는 쑥부쟁이의 모습은 고단한 삶을 견뎌내는 인간의 초상이며, 이는 작품이 현실의 단면을 반영한다는 반영론적 관점과 연결된다. 자기는 뜬구름처럼 떠돌면서도 타인을 위한 단비를 내려주는 모습에서 시적 화자는 깊은 연민을 느끼는데, 이는 대상을 통해 인간적 고뇌와 이타적 은총을 표현하려는 미학적 시도이다. 쑥부쟁이라는 자연물은 시적 화자의 내면과 인간 보편의 설움을 투영하는 훌륭한 객관적 상관물로 기능한다. 마지막 구절인 “삶은 늘상/ 파랄 수도/ 붉을 수도 없는/ 뒤섞인 연보라 꽃잎인 것을”은 이 시의 백미이자 구조주의적 이항대립의 해소를 보여주는 감각적 지점이다. 인생은 파란색이나 붉은색, 즉 기쁨이나 슬픔, 성공이나 실패라는 명확한 하나의 색으로 규정할 수 없다. 시적 화자는 상반된 두 세계가 뒤섞인 오묘한 연보라색을 통해 대립을 융합하고, 삶의 본질을 차분하게 수용하는 관조적 어조로 인생의 서정적 깊이를 선언한다. 다음은 「용마루길」의 의미를 탐색해 보자. 산빛 채운 폭포수 붓 발 삼아 곡선 나무다리 허리 들어서면 실존의 머리카락 날리며 열리는 사바세계 고행의 삶 잠시 내려놓고 숲 향기로 쉼의 틈새 채워보라는 동양화 한 폭 펼친 조화로운 설법 소나무 늘어져 손 양산 펼친 날 것 품속 지나노라면 벼룻길 견뎌온 비스듬한 고목들 바들거리며 벼랑에 선 발목에도 물살은 매양 당초 문양 빚어내고 왼쪽 갈참나무 오른쪽 상수리나무 단단한 생체 뚫고 두 번이나 몸을 섞어 어깨동무 정담 나누는 희귀한 연리지 자연의 신비는 오묘한 섭리 끝이 없는 여정의 살 떨림이 화폭으로 감싸인 수변을 휘도는데 속 허한 새 한 마리 물수제비뜨며 묵언 수행 호수면 자꾸만 입질한다. - 「용마루길」 전문 이 시는 실존적 해방감과 자연이 선사하는 오묘한 섭리를 동양화처럼 펼쳐 보인 작품이다. 시의 도입부는 현실적 고뇌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상태를 회복하고자 하는 실존주의 문학 이론을 충실히 담아낸다. 사바세계로 명명된 고행 가득한 현실의 짐을 폭포수와 나무다리라는 공간적 이동을 통해 내려놓는 행위는 세속적 억압에서 벗어나 본래적 자아를 찾아가는 실존적 해방의 과정이다. 이때 숲이 뿜어내는 향기가 ‘쉼의 틈새를 채우라’는 대자연의 설법으로 다가오는 현상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 구도로 보지 않고 대자연을 영적 교감의 대상으로 삼는 동양적 범신론과 생태주의 미학의 발현이다. 숲의 향기라는 후각적 자극을 청각적이고 종교적인 가르침으로 치환하는 문학적 전이를 통해, 시적 화자는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수용하는 겸손한 존재로 거듭난다. 이어지는 갈참나무와 상수리나무의 얽힘은 상호텍스트성을 지닌 전통적 소재 ‘연리지’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사례이다. 벼랑 끝이라는 위태로운 극한 상황에서도 서로의 생체를 뚫고 단단해지는 나무의 모습을 통해 시적 화자는 시련 속에서 더욱 성숙해지는 인연의 신비를 발견한다. 이는 외적 풍경을 단순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인간 삶의 보편적 진리로 승화시키는 문학적 형상화 기법이다. 마지막으로 호수면을 스치며 물수제비뜨는 ‘속 허한 새 한 마리’는 문학 이론가 T.S. 엘리엇이 정립한 객관적 상관물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내밀한 정신세계와 고뇌를 직접 노출하는 대신, 새의 움직임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형상화한다. 고요한 호수면이 자꾸만 입질한다는 표현은 고요함 속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수사학적 역설과 반어의 미학을 보여준다. 겉으로는 침묵하고 있으나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번뇌를 다스리는 시적 화자의 성찰적 태도가 이 역설적 이미지를 통해 감각적으로 포착되며, 작품 전체를 한 편의 깊이 있는 동양화처럼 완성한다. 다음은 「풍경 소리」를 들여다보자. 풀빛에 잠긴 고요 호젓한 처마 밑 그곳에서도 결코 잊은 적은 없었노라 솔향 번져 나며 적요를 깨우니 공허한 세상이 아늑해진다 질긴 심지 품은 가슴속 늘 팽팽하게 눈금 겨루는 잡초들 조임줄 순간만 헐거워져도 기울지만 그저 내려놓으면 모두가 깃털이라고 산사 가지 깃든 새소리 곁들여 천년 녹색 기별 고즈넉이 전해준다 무시로 발길 닿는 사색의 숲 행간에 흐트러진 마음 모아 가던 길 헤쳐가라 사계의 층계에서 잠시도 머물지 않는 기름때로 무디어진 시간 톱니를 이슬 비친 바람 자락 온몸으로 받아내 한눈도 팔지 않고 몸 닳은 수행 비움의 공터에 차오는 소요유逍遙遊 만개한 시공 쇠 비늘에 부딪는 죽비의 모놀로그. - 「풍경 소리」 전문 이 시는 산사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를 통해 내면의 번뇌를 씻어내고 소요유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요유逍遙遊는 중국 고대 사상가 장자의 저서 『장자』 내편 제1편의 제목이자, 어떠한 속박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정신적 자유를 뜻한다. 작품 속 시적 화자의 정신적 지향점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문학을 철학적 사상이나 인간의 삶과 연결하여 바라보는 반영론적 관점이 두드러진다. 시적 화자가 세속적 번뇌를 씻어내고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상태를 도가 사상의 핵심인 ‘소요유’로 규정함으로써, 텍스트가 지닌 사상적 깊이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이러한 철학적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내적 요소들의 유기적 관계를 분석하는 구조주의 문학이론의 대립 쌍이 활용된다. 일상의 소음, 번뇌, 욕망, 시간 톱니로 대변되는 세속적 구속의 세계와 풍경 소리, 죽비, 비움의 공터, 소요유로 이어지는 절대적 자유의 세계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시적 화자는 바람을 받아내는 풍경을 통해 전자의 세계에서 후자의 세계로 이행한다. 이 이행의 과정에는 문학적 수사학의 핵심인 은유와 상징의 이론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가슴속의 번뇌와 욕망을 ‘잡초’로, 기름때 묻은 삶을 ‘시간 톱니’로 치환하는 은유법은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인 사물로 형상화한다. 나아가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 ‘풍경’을 단순한 사물이 아닌 수행자의 ‘상징’으로 격상시키고, 이 풍경 소리를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죽비’로 연결하여 시적 화자의 내면적 각성을 극대화한다. 동시에 청각적 자극인 풍경 소리가 공허한 세상을 아늑하게 감싸 안는 공간적 이미지로 확장되는 대목에서는 공감각적 심상 이론이 발견된다. 이러한 미학적 장치들은 세속의 때를 벗겨내는 정화 과정을 거쳐 어떠한 구속도 없는 절대 시공간을 완성하는 구조적 변모의 이론을 충실히 뒷받침하며, 글의 철학적 완성도를 한층 더 끌어올린다. 김애순 시인의 시 「귀소의 늪」, 「툇마루 달그림자」, 「등대」, 「마음 저 편」 이들 4편의 시들은 시인의 시적 탐색이 ‘존재의 시원(뿌리)에 대한 기억’과 ‘생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고독한 투쟁’으로 고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빛바랜 고향의 풍경과 아버지에 대한 추억(귀소), 그리고 거친 바다와 폐허 같은 일상 속에서 삶을 지탱해 나가는 숭고한 영혼의 자화상(등대, 마음 저 편)을 그려낸다. 이 네 편의 시를 관통하는 정서는 ‘상처와 치유의 길항拮抗’이다. 시인은 세월의 벽에 부딪혀 균열되고, 옹이가 박히고, 녹슨 풍경들을 응시한다. ‘귀소의 늪’, ‘옹이 박힌 나이테’, ‘부서져 내린 상처’, ‘폐허의 징표’ 같은 시어들은 시적 화자가 통과해 온 삶의 무게가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러한 소멸과 고통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기억을 ‘발효’시켜 그리움의 연꽃을 피워내고, 어둠을 밝히는 ‘등대’가 되며, 잘려 나간 고목의 가장자리에서 ‘새순’을 밀어 올린다. 상처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끝내 삶의 ‘화룡점정’을 이루어내려는 시인의 치열한 의지가 정제된 언어로 빛나고 있다. 그중에서 「귀소의 늪」을 감상해 보자. 도내기샘 흐릿한 허상 언 손에 들린 방망이질 환청 녹슨 철제 대문 밀고 드니 툇마루 구석진 곳에 동자꽃 햇살 내려와 몇 날을 누렇게 지새우다 희나리 되어버린 솔잎 무더기 꺼져가는 여생의 뒤안길에서 불쏘시개 모아 저승꽃 번져 혈기 잃은 삶의 더께에 무소유 꽃불이라도 피우고 싶으셨을까 맵찬 시절 거슬러 오르는 등 굽은 연어의 상처투성이 시계 바늘 아궁이 사라진 겹겹의 세월 벽을 뚫고 고추 당초 서러운 눈물 타박으로 자꾸만 뒷걸음질하는 귀소의 늪 억장 무너진 허공 너머론 마실 돌아와 산발한 목화 구름 해거름 그림자 길게 늘이며 첩첩 산골 타는 노을 불새로 든다. - 「귀소의 늪」 전문 이 시는 어린 시절의 공간과 늙어가는 부모, 혹은 시적 화자 자신의 여생을 겹쳐 보며 근원적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존재의 귀소본능을 서글프고도 장엄하게 그린다. 시의 도입부는 ‘도내기샘’의 허상과 ‘방망이질 환청’으로 시작되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데, 이는 인간이 태어난 근원적 공간을 향하는 신화적 영혼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원형비평적 관점으로 이어진다. 주인이 떠난 집의 ‘희나리 되어버린 솔잎 무더기’는 소멸해가는 것들의 쓸쓸함을 극대화하며, 온기 가득한 아궁이 사라진 빈집과 같은 시적 공간은 존재의 노쇠와 상실을 시각적으로 전하는 상징물로 기능한다. 세월의 풍파를 겪은 노년의 삶을 “저승꽃 번져 혈기 잃은 / 삶의 더께”, “등 굽은 연어의 상처투성이 시계 바늘”로 표출한 대목은 추상적인 시간과 노쇠의 과정을 구체적인 사물로 치환하는 수사학적 은유론을 명확히 보여준다. 특히 생의 마감 직전 고향으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이미지는 숙명적 귀환이라는 원형적 도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이 고단한 삶의 끝자락에서 시적 화자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무소유 꽃불’을 발견하는데, 이는 유한한 인간이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 앞에서 세속적 가치를 초월해 영혼의 본질을 마주하는 실존주의 문학 이론과 궤를 같이한다. 서러운 눈물로 ‘귀소의 늪’을 향해 뒷걸음질 치는 존재의 행로는 슬프지만 거역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의 운명이다. 마지막 행에서 타오르는 노을이 ‘불새’로 화해 산골로 드는 모습은 지상에서의 한 생애가 우주적 자연으로 아름답게 회귀하는 마무리를 보여주며, 소멸의 비장함을 거대한 자연의 질서 속에서 장엄한 가치로 승화시키는 미학적 숭고미를 완성한다. 이번에는 「툇마루 달그림자」의 의미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마당 가 흐드러진 감국 떨기에 뜰 가득 꽃내음 그윽하던 날 멋쩍은 아이 하나 찾아오곤 했었다 과묵한 아버지는 툇마루에 기우는 달그림자로 서둘러 보냈었지 고샅길 돌아가던 아이의 쳐진 어깨엔 박꽃 달빛만 흐드러지고 모래톱 쌓인 시간 강변 사무친 기억의 바지랑대 성성할수록 갈무리 못한 언어들 허공에 맴돌다 밤이면 이슬 맺혀 지상에 내리는지 젖은 풀잎 받아내며 오솔길 걷노라면 뇌리에 살아나는 옛 생각 그루터기 우연히 마주친 조우였다 해도 간절한 몇 마디는 여정의 갈피에 간직해둔 채 허물 실은 조각배는 멀리 흘려보냈건만 오늘은 옹이 박힌 나이테 똬리 풀며 발효되는지 태동하는 숨소리로 밤잠 못 이루는데 늪을 파고드는 한 줄기 햇살 연꽃 무리 진 어느 여름의 궁남지. - 「툇마루 달그림자」 전문 이 시는 과거 고샅길을 돌아가던 아이와 과묵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오랜 세월 가슴속에 묻어둔 그리움의 똬리를 풀어내고 있다. 시의 이면에는 텍스트 내부의 유기적 구조와 언어적 변용을 중심으로 정서의 추이를 추적하는 구조주의와 형식주의 비평 이론이 깊게 작동하고 있다. 언어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 복합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상징주의 시학을 바탕으로 시적 화자의 내면 변화를 이끌어낸다. 아버지의 엄격하면서도 서툰 사랑을 보여주는 ‘툇마루에 기우는 달그림자’와 아이의 처진 어깨에 흘러내리던 ‘박꽃 달빛’은 차갑고 슬픈 시각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는 시적 대상의 성격을 주변 배경이나 공간을 통해 대변하는 환유의 기법이며, 과묵한 아버지를 ‘옹이 박힌 나이테’로 구체화한 표현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결합한 전형적인 은유에 해당한다. 시간이 흘러 이 옹이 박힌 나이테가 시적 화자의 내면에서 서서히 ‘발효’되어 밤잠을 못 이루게 하는 ‘태동하는 숨소리’로 부활하는 과정은 과거의 상처가 고정된 기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된다는 문학적 변형 이론을 보여준다. 과거의 결핍과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내적으로 소화해내는 이 정신분석학적 애도의 과정은 마침내 공간의 이동을 통해 미학적 완성을 이룬다. 시적 화자의 시선이 과거의 늪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을 따라 ‘연꽃 무리 진 어느 여름의 궁남지’로 향할 때, 이 시는 극적인 반전을 맞이한다. 과거의 어둡고 성성했던 기억들이 연꽃이라는 순결하고 풍요로운 생명력으로 승화되는 순간은, 문학 작품이 지닌 미적 가치가 인간의 보편적 슬픔을 어떻게 치유하고 정화하는지 증명하는 카타르시스 이론의 구조적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는 「등대」의 정서를 살펴보자. 별을 삼킨 어둠에서 허우적댈 때 저 멀리서 깜박깜박 손짓하는 불빛 한 가닥 있었느니 천생으로 하늘 안은 수평선 은유의 몸짓으로 뒤척이다 물꽃 치켜들고 아우성치며 파도 층계 오르다 현기증 일으키는 볼살 얼얼한 낯빛에 다가선다 세월 삼킨 오장육부 염기로 견디며 바위 절벽 세찬 물살로 혼미한 순간도 기억 저편 가물가물한 너를 부르며 물풀 냄새 짙게 밴 수직의 물기둥 맞으며 가쁜 숨 내쉬는데 거품 물고 부서져 내린 상처마다 치유의 밀물 들어찬 밤에도 길눈 무뎌진 항해사 나침반 되어 하얀 밤 지새우는 외로운 성자 가슴에 품고 사는 그 이름 하나. - 「등대」 전문 이 시는 인류의 보편적 무의식에 자리 잡은 상징을 통해 텍스트를 해석하는 원형비평의 태도를 취한다. 거친 파도와 바위 절벽을 인간이 마주하는 삶의 위기와 혼미함으로 치환하고, 등대를 고난 속의 인도자로 읽어내는 방식은 자연 현상에서 인간의 운명적 시련과 구원의 원형을 발견하려는 문학적 시도에 닿아 있다. 특히 등대를 밤새도록 불을 밝히는 외로운 성자로 명명한 대목은 사물에 종교적·신화적 숭고함을 부여하는 원형적 상징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또한 텍스트의 의미를 시적 화자의 내면세계 및 영적 소명 의식과 연결 지어 규명하려는 표현론적 관점이 강하게 드러난다. 별마저 삼켜버린 어둠 속에서 멀리서 손짓하는 불빛 한 가닥을 발견하고, 바다의 염기를 온몸으로 견디며 수직의 물기둥을 맞는 행위는 세속의 혼돈을 구원하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숭고한 소명 의식과 내적 양심의 투사로 해석된다. 등대가 파도에 부서져 내린 상처마다 치유의 밀물을 채워 넣는 주체로 그려지는 것 역시, 고통을 관조하고 치유하려는 시적 화자의 예술적·영적 감각이 발현된 결과이다. 구조주의 문학 이론에서 강조하는 이항대립의 구조도 이 글의 해석을 지탱하는 핵심 뼈대이다. 텍스트는 어둠, 거친 파도, 절벽, 혼돈으로 대변되는 부정적 세계와 불빛, 등대, 치유, 나침반으로 대변되는 긍정적 세계를 선명하게 대립시킨다. 이러한 구조적 대립 속에서 등대는 단순히 고립된 존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길 잃은 항해사라는 타자를 향해 헌신함으로써 두 대립 세계를 연결하고 혼돈을 구원으로 매개하는 숭고한 사랑의 실체로 격상된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시련의 바다를 비추는 등대의 수직적 존재감을 인간 구원과 문학적 구도求道의 결정체로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다음은 「마음 저 편」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자. 바람이었나 유영하던 가상의 터널 안에서 뭉그러진 기억을 술술 풀어내지 못해 미완의 몸부림에 남루해진 자화상 늘상 타다 남은 삶의 허기로 늑골 가득 품지 못한 한낮의 파장 밤에도 잠들지 않는 혼돈의 늪 속 기억 속의 풍경이 현현하면 무애의 강변에서 심연의 실타래 풀어헤치는 간절함 이렇듯 쌓인 고뇌가 고독으로 발효하는 심상의 파열음 어지럼으로 휘청이는 홀로 선 몸부림 갈기 성성한 흑백 영화 한 장면이 생애의 활처럼 휘어진 걸까 균열된 보도 블럭 옆길에 폐허의 징표 끈질기게 잘린 고목 가장자리 새순 하나 끊어질 듯 그루터기 내력 이어간다 아, 그 누가 구겨진 세월 벽 치유의 손길로 받아낼 수 있을까 한 줄의 화룡점정으로 살려낼 수 있을까 둘러보면 바람 소리 흔적 없는 이생의 발자국 소리. - 「마음 저 편」 전문 이 시는 미완의 몸부림과 고독으로 얼룩진 내면의 폐허 속에서,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려는 실존적 고뇌와 의지를 그린 철학적 깊이가 돋보인다. 가장 먼저 두드러지는 것은 실존주의 문학 이론이다. 남루한 자화상과 잠들지 않는 혼돈의 늪은 세상에 던져진 인간이 겪는 근원적 불안과 고독을 반영한다. 기억이 엉키고 생애가 휘어지는 절망 속에서도 생명의 내력을 이어가려는 모습은, 부조리한 운명에 맞서 주체적으로 의미를 창조하려는 실존적 결단을 보여준다. 이러한 고뇌는 원형 비평과 상징주의 이론을 통해 구체화 된다. 균열된 보도블록과 잘린 고목으로 대변되는 ‘폐허’는 파편화된 인간의 내면을 뜻하는 부정적 원형이다. 반면 그 속에서 피어난 ‘새순’은 죽음과 소멸을 넘어서는 생명의 복원력이자 희망의 원형적 상징이다. ‘구겨진 세월의 벽을 치유’하고 ‘한 줄의 화룡점정’으로 삶을 살려내려는 갈망에는 표현론적 관점이 투영되어 있다. 이는 현실의 상처를 봉합하고 세계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예술 철학의 발현이다. 결국 허무한 바람 소리뿐인 현실에서 새순을 포착해 낸 시적 화자는 삶의 화룡점정을 찍으려는 구도자적 존재이다. 이 결말은 허무라는 부정적 현실을 통해 오히려 생명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역설의 미학을 성취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김애순 제3시집 『곁, 문득 그리운』의 시들은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과 인연의 오묘함, 그리고 자연의 순환 속에서 피어나는 생의 서정을 깊이 있는 언어로 직조해낸 영혼의 기록들이다. 시인은 삶을 관조하는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을 탐구하며, 내밀한 고백을 담아내고 있다. 김애순 시인의 시 세계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적 인연에 대한 깊은 관조와 성숙이다. 표제작 「곁, 문득 그리운」에서 타인과의 거리감을 성숙의 과정으로 수용하고, 스스로를 ‘푸른 직녀’라 명명하며 운명의 피륙을 짜 내려간다. 「독백」에서는 ‘인드라망’과 ‘만다라’라는 불교적 사유를 음악적 선율에 얹어 삶의 연분을 아름답게 완성해 나간다. 둘째, 식물적 상상력을 통한 생명력과 삶의 본질 포착이다. 「봄날」의 ‘연두 버물림’과 목련의 개화는 겨울이라는 고통을 견뎌낸 생명의 역동성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 피어난 「각시붓꽃」은 낮은 곳을 향한 그리움의 환대이며, 설화 속 비극을 품은 「쑥부쟁이」는 자기를 희생해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이타적 은총을 보여준다. 특히 쑥부쟁이의 ‘연보라 꽃잎’은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인생의 오묘한 본질을 꿰뚫는 상징이다. 셋째, 시간의 흐름에 따른 소멸의 응시와 실존적 치유이다. 「꽃샘 눈」은 환절기의 소멸 앞에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쓸쓸함을, 「귀소의 늪」은 등 굽은 연어처럼 존재의 시원으로 회귀하는 인생의 뒤안길을 장엄하게 그린다. 「툇마루 달그림자」에서 사리 분별 정확하신 아버지에 대한 잊히지 않는 추억은 ‘궁남지 연꽃’이라는 풍요로운 생명력으로 승화된다. 나아가 거친 파도를 견디는 「등대」의 숭고한 사랑과, 폐허 속에서 ‘새순’을 밀어 올리는 「마음 저 편」의 의지는 시인이 삶의 균열을 받아들이고 문학적 ‘화룡점정’을 이루려는 구도자적 태도를 대변한다. 김애순 시인은 이생의 발자국 소리가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질지라도, 「풍경 소리」처럼 마음의 조임줄을 내려놓고 ‘소요유逍遙遊’의 절대 자유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는 상처와 고독을 발효시켜 끝내 치유의 세상을 열어젖히는, 격조 높고 숭고한 정신적 순례기이다. 김애순 시인이 앞으로도 여생 동안 시 창작하여 제4, 제5, 제6시집을 펴내면서, 시심 가득한 오솔길을 건강한 모습으로 행복하게 걸어갔으면 좋겠다. - 귀또리 소리 들려오는 초가을의 시심을 고맙게 여기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