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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3
1부 뱀 10 꽃샘추위 12 화분 14 진술서 15 방 하나 16 두부 18 별 헤는 오이 20 책 21 거실과 부엌과 베란다 22 도마 24 젓가락 26 성탄전야 28 책장 30 실내화 32 2부 감정 노동자 36 드라마가 있는 시간 38 환절기 40 바람 42 감정주점 탐방 44 달팽이 성토대회 46 시소 47 렌즈를 낀 거북 48 돌연변이 하마 50 비명 전문가 52 지퍼 54 하루살이 56 혐의 입증 58 중독 60 3부 숨 쉬는 달력 64 다초점 65 잠시 66 드라이플라워 68 슬픔의 무게 70 파격 71 모니터 감정 72 노을을 넘는 새떼의 자전거 74 너와 나의 방 76 액세서리 77 시계 78 거실이 품은 세계 80 가을, 소화불량1 81 블록 82 4부 서재 86 가을, 소화불량2 88 낚시 90 도로의 식성과 조리법 92 천변 풍경 94 주름살 정원사 96 셔터 98 헬스클럽 100 용궁역중절모 104 할머니와 보행보조기 106 오이가 던지는 질문 108 ■ 해설 _ 고광식 비인간의 시각 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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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살인 듯 살이 뼈인 듯
이런 의도를 어디선가 본 적 있어 전생보다 더 물렁물렁해진 전략은 진화하고 진화는 목숨 연명을 선물하거든 흰 속살이 단 한 번에 칼날의 가슴을 무너뜨리는 주방에서 백허그 당한 듯 일격이 끝난 후 칼날은 그의 다른 쪽을 고민했겠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끝나기 전에 끝을 모르듯 끝난 후에도 끝을 모른 채, 눈감고 여운을 느꼈을 거야 사라지는 아쉬움을 놓치며 실눈도 뜨지 않은 채 정신을 수습한 뒤에야 다시 맛보고 싶어 지그시 바라보겠지, 아무렴 ―「두부」 전문 - 잡식성이다 초식과 육식뿐 아니라 양념 대신 이념으로 버무린 괴상한 메뉴까지 혀를 칼로 쓰는 단백질 흉기가 더 잔인하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듯 칼춤을 추듯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감자와 양파와 무가 위태롭게 다녀가면서 산과 들 이야기 조금 남긴다 대화는 조용하게 식사는 품위 있게 남자와 여자와 노인과 아이가 불려 나오고 기대하던 고해성사는 끝내 하지 않는 미덕을 보인다 날카로운 칼날이 또 사정없이 내리친다 동강 났던 실내가 침묵으로 위치를 망설인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더 아프다는 주장들이 엄살만은 아니라 수긍하며 귀를 기울인다 바람 소리 들린다 파도 소리도 들린다 정적이 들려온다 귀를 뗀다 보이지 않는 상처의 쓰라린 무게를 증명하듯 온몸이 욱신거린다 ―「도마」 전문 - 한결같이 책을 꼭 껴안고 있다 많은 책을 다 읽은 양 고상한 자세로 앉아 있다 책들의 무언의 심중도 다 이해하는 듯하다 책꽂이가 얼마나 많은 페이지를 넘겨봤는지 얼마나 다양한 지식을 소화했는지 저 많은 책을 정말 다 읽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열었던 입을 다물 수 없다는 사실을, 책꽂이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늘 책들이 책꽂이의 입을 힘껏 벌리고 있었다 가지런한 치아처럼 질서정연하게 한 줄로 서서 속삭인다 이제 다 읽었느냐고 소화는 되었느냐고 들릴 듯 말 듯 귓속말로 질문한다 내가 잠들어도 책꽂이는 밤새 책을 읽을 것이다 되새김도 할 것이다 뜬눈으로 밤새워도 피곤하지 않은 표정으로 어둠 속에서 옛 형설지공을 상상하며 책꽂이는 죽는 날까지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이 가득 찬 입, 이빨 꽉 물고 참느라 잇몸까지 천천히 낡아가고 있다 ―「책장」 전문 - 때가 되면 다가오는 것들 기침과 코 막힘과 목캔디 같은 장갑 목도리 털모자 포장마차 같은 사랑과 다툼과 이별 같은 격렬함 뒤에 드러나는 후유증 같은 후유증에 섞인 허전함 같은 허전함 뒤를 따르는 쓸쓸함 같은 잊은 듯 놓치고 오면 안 되는지 물어볼까, 꽃 멀미하듯 비틀걸음으로 앞선 팔자걸음 뒤따르며 쓸쓸함을 밀어내는 고독 같은 사무치는 한기 같은 난방을 겹겹이 뒤집어쓴 이불 같은 기침에서 튀어나오는 파편 같은 파편을 닦아낼 휴지 같은 휴지와 함께 버려지는 추억 같은 발열까지 다 챙겨 오는 꼼꼼함이 이제 더는 생소하지 않다고 말해 볼까 때가 되면 가고 없는 것들 행방을 알고 싶지 않은 소품 같은 ―「환절기」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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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그로부터 멀어졌다가 붙들려 왔다. 강산이 변했어도 그는 여전히 무표정이다. 나를 붙잡고 왜 말이 없는가. 내 그림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인가. 가늠이 안 되는 깊고도 긴 침묵. 어느새 그는, 나를 묶어두고 사라졌다. 2026년 가을 박승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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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기존 지식이 옳다’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 베이컨은 검증되지 않은 지식을 우상으로 보고 이를 타파하고자 노력한다. 그가 주장한 우상은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다. 지금 이곳의 시인들은 종족의 우상으로 생기는 오류를 극복하고자 비인간의 시각으로 현상을 본다. 이는 시적 진리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적 실험이다.
비인간의 시각에 있어서 박승류의 시는 거실과 부엌과 베란다의 감정으로 현실을 노래하기도 하고, 현실과 대립하는 감정으로 상처를 드러내기도 한다. 시적 화자는 “거실이 앞 베란다를 널름 먹었다 베란다 의견은 안중에 없었다// 리모컨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텔레비전 목청을 줄였다 성대 걱정은 아니었다”(거실과 부엌과 베란다)처럼 철저하게 비인간인 사물의 시각으로 현실을 직시한다. 이처럼 세계를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사유의 날개를 편다. 날개를 단 사유는 자유롭게 사물의 입을 통해 현실을 성찰한다. 때로 비인간은 “한결같이 책을 꼭 껴안고 있다/ 많은 책을 다 읽은 양 고상한 자세로 앉아 있다/ 책들의 무언의 심중도 다 이해하는 듯하다”(책장)와 같이 인간의 위선을 파고든다. 따라서 시적 비인간인 화자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현실을 비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의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현실을 다시 보게 된다. - 고광식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