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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푸른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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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3


1부

사과 깎는 법 10
지워지지 않는 쪽 12
내 몸에 나무를 심는다 13
빈 의자의 방향 14
닿지 않는 방식 16
독서실 사슴 18
검은 얼음 19
방부제 20
기울어진 중심 22
눈먼 바다 24
열대야 26
열리지 않는 손잡이 28
돌꽃 30
갤러리 32

2부

귀의 바깥 36
별 껍질 38
최고의 선물 39
정지된 시간을 끌고 간다 40
벽돌 한 장 42
가보지 않은 곳의 표정 44
통로 46
선창 48
책상을 태우다 50
시간을 재운다 51
다음 계절 52
뒤 54
끊어지지 않는 선 56

3부

유령의 탄생 60
몸속에서 작은 돌들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61
예단포 62
빈 곳 64
소래포구 65
AM 6시 50분 66
측면에서 68
먼저 떨어지는 것들 70
읽지 못한 여백 72
섬 73
나뭇잎에 박힌 눈 74
바람의 화법 75
서로의 온도 76
가르마 78

4부

기우는 저녁 82
월세 내는 날 84
한 겹을 더 입는다 86
초인종 87
비로소 88
빈 곳의 주인 90
탄성 92
세 개의 침대 네 명의 친구 94
검은 해 96
생각의 단면 98
들판은 넓었지만 100
거짓말은 옷을 입는다 102

■ 해설 _ 고광식
현상과 자아의 시간 104

저자 소개 1

2016년 새얼 백일장 시 부문 장원. 2019년 《문학과 의식》 신인상으로 등단. 2020년 인천문화재단 시집 발간지원 수혜. 시집 『한 번도 날개를 빌려주지 않았다』(예술가, 2020) 발간. (세종도서 선정) 2024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시 부문)수혜. 2026년 인천문화재단 시집 발간지원 수혜.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1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24g | 128*208*20mm
ISBN13
9791122028775

책 속으로

내 몸에 나무를 심는다



기침이 그치지 않는 하루 두려움에 눈을 크게 떴지만 살찐 어둠이 지배한다 가끔 나무에 붙은 옹이를 보면 큰바람이 베어간 자리

나이테는 정확한 시일을 가르쳐주지 않지만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나를 서성거린다

귓속에 작은 벌레가 윙윙거린다 나 아닌 누군가 내 몸에 나무를 심는다 숨을 다독이며 잠을 청해보지만 귓바퀴에 바짝 다가오는 파열 소리 설해목이 나를 향해 기울고 있다

찢어 놓은 일기장에
긴 가지를 그려 놓고
뿌리 굵은 힘줄에 발톱을 세운다

새들은 어디로 몸을 숨기는지, 바람은 마침내 어디서 만나는 것인지 이젠 몸이 먼저 감각한다 심연 아래로부터 나무가 쑥쑥 자란다

-

사과 깎는 법



사과 깎는 법을 처음 배운다

볼록렌즈의 허리를 한 손으로 받쳐 들고
과도를 측면으로 돌린다

똬리를 틀고 올라오는 것

껍질은 뱀을 만들고
옷을 벗은 사과는
흰 뱀을 품는다

줄이 끊어지면 새끼 뱀은 태어나지 못한다

깎아낸 몸은
휘어진 채 다시 붉어지지 않는다

뱀 다음엔 뭐가 있을까

말아 올리지 못한 것들이
형광등 아래에서 반짝인다

처음 배운 것은
상상을 끊어내지 않는 일이었다

-

방부제



계단 턱에 걸려 넘어지던 날
그날부터 일요일이다

길게 풀린 나선이
툭, 끊어진다

휘어진 채
뚫고 나갔던 통증
두꺼운 날들이 천천히 잠긴다

표피가 안쪽으로 벗겨지고
막이 없어진 경계

감겼던 자리의 곡선
단단하게 맞물린 자국
서로를 껴안은 흔적이 남아 있다

굳은 발목으로
새벽 산의 줄기를 밟을 수 있을까

묵직한 바닥
서 있는 나와
가장 오래된 곳을 연결한다

몸 안에 조용히 굳어가는 소리
드러난 단면이 새벽을 붙잡는다

-

지워지지 않는 쪽



어슷한 어둠을 기대며 창밖의 빌딩들이 병실로 기울어온다 알코올 냄새가 배어 있는 흰 벽의 모서리에 손바닥 무늬를 남긴다 화상 병동의 유리는 어둠 속에서도 내장의 흔적을 찍어낸다 축축한 목덜미에 시선이 내려앉고 반사경 속 일그러진 얼굴이 나를 가둔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 힐끔 쳐다보다 급히 소매 안으로 눈동자가 숨는다 급성으로 번진 소나기, 빗소리가 빗소리를 물어뜯고 나를 지우려 한다 창밖의 검은 비, 유리벽에 검은 흉터, 병동의 불빛과 치열하게 뒤엉킨다 나를 닦아내려 하지만 타는 냄새가 더더욱 또렷해진다

출판사 리뷰

■ 시인의 말

삶은 늘 굽이쳐 왔고 어제와 오늘도 그렇게 지나갔다
걸어가다 때로는 멈춰 서야 했다
사라지는 것과 남겨진 것 사이로 건너온 날들을 돌아본다
질문을 품고 오래된 길 위에 다시 선다
남은 길을 걷는다

2026년 가을
정옥희

추천평

옥희는 지젝처럼 시차적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본다. 그는 시적 화자를 통해 “나무가 있어도 새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는 저녁, 개다리소반에 차려진 젓가락은 짝을 이루고, 자취방 문은 열지 않아도 바람이 들어온다”(「초인종」)고 자신의 파편화된 상황을 처연히 진술한다. 밖은 늘 소란하다. 빗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끊임없는 소음을 일으킨다. 이토록 밖은 활기가 넘치는데 화자가 사는 자취방엔 초인종이 울리지 않는 적막강산이다. 울려야 할 초인종이 울리지 않는 것은 화자가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타게 기다리는 자아와 절대 울리지 않는 초인종이 모순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화자가 가지고 있는 욕망은 결핍된 순간을 맞는다. 시차적 관점에서 화자는 “긴 혀는 노 없이 항해를 시작하고/ 작은 입술이 기포가 되어/ 파도를 만들어 낸다”(「거짓말은 옷을 입는다」)고 도덕이라는 관점에서 비도덕의 대상을 비판한다. 거짓말로 조용한 바다에 거센 풍랑을 일으키는 상대의 잘못을 지적한다. 거짓말을 퍼뜨리는 사람의 심리는 관심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크다. 또한 너희는 모르지만, 나는 이런 정보를 알고 있다는 신호로 거짓말을 한다. 여기서 관심을 받고자 하는 사람과 거짓말로 피해를 보는 사람 간의 간극이 발행한다. 이처럼 지젝이 주장한 시차적 관점은 동일한 현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때 발생하는 간극과 모순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정옥희는 시차적 관점으로 자기 생의 지평에 펼쳐진 현상을 관찰한다. 현상의 종류는 다양하고, 현상 자체는 끊임없이 자라난다. 시인은 앞에 놓인 현상에 질문을 던지고 지젝처럼 조용히 응시하기 시작한다. - 고광식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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