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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마루
새는 지문이 없다 나무 위에 제 이름 한 자 새기지 못하고 오직 허공을 빌려 부리로 흔적을 남긴다 기류의 관절을 꺾어 비상의 대가로 바람의 나이테를 새긴다 지나간 자리는 이내 여백이라 하지만 바람의 결마다 새가 흘린 깃털의 문법이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동심원으로 박혀 밤새 파닥이는 소리를 낸다 그것은 지문 없는 존재가 생애를 다해 쓰는 투명하고도 역동적인 수표 땅 위엔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아도 새가 지나간 하늘은 온통 일렁이는 물마루 바람이 잠시 그 오목한 골에 머물렀다가 이내 푸른빛의 여백으로 흩어진다 - 앵그르의 바이올린 샤워하는 그녀의 등줄기에 나비 한 마리 앉는다 미끄러지는 물방울이 곡선을 타고 보이지 않는 현을 켠다 등을 보인 그녀는 팽팽한 활처럼 휘어지고 침묵 아래 잠들어 있던 음계들이 젖은 살결을 따라 천천히 깨어난다 조이면 조일수록 음악은 더 높이 차오르고 악보 없는 악기는 거듭되는 조율 끝에 봄을 향해 건너온다 물방울이 튕겨 올린 은밀한 공명 나비는 어느새 날아가고 젖은 등 위에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두 개의 f자 - 윌리엄스 증후군 본 적 없는 당신의 웃음이 내 시의 행간마다 먼저 와 앉아 있다 7번 유전자가 제 몸을 헐어낸 자리 그 빈칸을 채우려 누군가는 다정의 설계를 시작했을 것이다 지도는 그릴 줄 몰라도 바람의 무늬는 외우는 사람 당신에게 세상은 좌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연주회다 낯선 이의 소매를 붙잡고 안부를 묻는 것은 당신의 심장이 너무 뜨거워 혼자서는 다 식힐 수 없기 때문일까 경계라는 단어를 배운 적 없는 입술 위로 어제 본 구름의 리듬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퍼즐 조각은 제자리를 찾지 못해 흩어져도 당신의 귀는 숲의 미세한 숨결을 놓치지 않는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더 오래 노래할 수 있다는 뜻 지워진 유전자는 결핍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소음을 음악으로 번역하기 위한 당신만의 하얀 여백일지도 모른다 마주친 적 없는 당신이 내민 손이 오늘 밤 내 마음 안에도 따뜻하게 전해져온다 - 누락된 페이지 47쪽 다음은 49쪽이다 종이의 결은 온전하고 잉크의 농도는 일정하다 제본은 단단하고 서사는 매끄럽게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들이 앓았던 하루는 어디에도 없다 앞 문장은 기억을 잃고 뒤 문장은 부재를 봉합한다. 갈 곳 잃은 주어는 부표처럼 떠 있고 동사는 서둘러 마침표 속으로 숨는다 이 책의 배열을 지시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들이다 비워 둔 자리가 다음 행간의 간격을 결정하고 누락은 투명한 벽이 되어 읽어야 할 진술들을 가둔다 누구도 항의하지 못한 채 손가락은 무심하게 장을 넘기지만 책장 사이 어딘가에서 지워진 소리가 마른 뼈처럼 바스락거린다 파본의 세계는 이토록 정교하고 완벽하여 우리는 결코, 그 48쪽에 도착하지 못 한다 생은 늘 한 페이지가 모자란 채로 완성되고 우리는 누락된 그늘 위에 서서 서로의 이름을 오독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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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언어의 줄 위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막상스 페르민의 눈을 읽으며 때로는 낮게, 때로는 멀리 뻗어 나간 마음의 무늬들을 이곳에 묶는다. 2026년 가을 박선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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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와 말, 정보와 사건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타인의 비극은 화면을 통해 빠르게 소비되고 알고리즘은 다음 장면을 쉬지 않고 제시한다. 이런 환경에서 한 존재의 낮은 울음을 오래 듣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속도를 늦추고 무릎을 굽혀 나무의 그늘과 몸의 상처, 사라진 사람의 빈자리를 읽도록 이끈다. 그것은 시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시는 세상이 누락한 페이지를 찾아내고, 말할 수 없는 존재의 침묵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박선우 시인의 바이올린은 크고 화려한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무의 옹이에 감춰진 바람, 젖은 꽃이 땅에 닿는 소리, 할머니의 마른기침과 폐가의 툇마루에서 흐느끼는 바람을 연주한다. 쉽게 들리지 않는 가장 낮은 음을 끝까지 붙잡고, 그 떨림이 독자의 마음에 닿을 때까지 언어의 줄 위에 선다. 그 낮은 현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은 슬픔을 발견하는 시선이며, 지워진 생명을 기억하는 애도이고, 모든 존재가 자기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이다. - 황정산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