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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해서암행일기에 대하여 해서암행일기 서계·원단 별단 박만정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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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황해도에 출두하다
박만정은 1648년(인조 26) 서울에서 태어나 1717년(숙종 43)에 사망했다. 1683년(숙종 9)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쳤다. 1694년(숙종 20) 세자시강원에서 세자를 가르치던 관직인 보덕 자리에 있던 박만정은 장희빈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 일로 결국 보덕 벼슬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후 1년 6개월 정도를 아무런 직책 없이 지내다가 1696년(숙종 22) 느닷없이 황해도 암행어사로 발탁됐다. 한편, 1695년(숙종 21) 7, 8월 충청도 지방에 폭우가 계속 퍼붓고, 진주 지방에 눈이 내리고, 전국 각 고을에 밤마다 서리가 내리는 등 이상 기후로 인해 전국에 심각한 흉년이 들었다. 이 때문에 추수기인 가을에도 곡물 가격이 치솟았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에 숙종은 대신들과 구황 대책을 논의하고, 과거 시험 등 국가 행사를 연기했으며, 은자 1000냥을 진휼청에 내려 진자에 보태게 했다. 또 1696년 1월부터 3월 사이에는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 일곱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해 각 도의 실정과 민심을 파악토록 지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만정은 1696년 3월 7일 황해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흉년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의 실정을 살피고, 지방관들이 백성을 제대로 구휼하는지 여부 등을 염탐하기 위해 황해도로 파견된 것이다. 신분을 숨기고, 민심을 살펴라! 《해서암행일기》에는 박만정이 두어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여러 고충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려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황해도는 특히 흉년이 심했기 때문에 민심이 더없이 흉흉해 박만정은 추생된 고을을 암행하면서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헛간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어떤 때는 길에서 만난 행인에게 주변 고을의 수령 중 누가 구휼을 잘하는지, 누가 공무를 잘 처리하는지 등을 노골적으로 캐묻기도 했고, 하룻밤 묵는 집에서 철저히 신분을 감춘 채 주인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을 입수하기도 했다. 게다가 박만정은 지나는 곳곳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자들을 바라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특히 암행어사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점은 유난히 힘들었다. 그래서 박만정은 자신을 충청도 사람이라 칭하고, 흉년을 당해 먹고사는 것이 궁핍해서 관서 지방의 아는 수령을 찾아가 걸식이나 해 보려고 길을 떠나 왔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고, 신분이 노출될까 봐 일행과도 일행이 아닌 것처럼 따로 떨어져서 다녔다. 이처럼 박만정은 암행 기간 내내 사적인 행위를 거의 하지 않고 오로지 공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데만 집중했는데, 이는 19세기 초 평안도 암행어사로 파견돼 《서수일기西繡日記》를 남긴 박래겸이 암행 기간 동안 친분이 있는 기녀를 만나고, 명승지를 유람한 일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이다. 새벽에 신계 객사로 들이닥쳤다. 우리 일행이 왔다는 말에 아전들은 안절부절못했고 황급히 동헌에 나선 현령의 얼굴빛은 창백해졌다. 지금까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탐문해 본 결과, 신계 현령 심능은 백성들에게 심하게 비방을 당하고 있었다. 그 진실 여부를 확실히 알기 위해 각종 관아 문서를 모조리 가져오게 했다. 문서들을 일일이 점검해 보았더니 불법을 자행한 사실을 알 수 있는 문서 몇 장이 발견되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때는 거의 이경이 되어서였다. 곧장 객사로 들어서서 하인을 불렀으나, 어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선 새가 놀라고 쥐새끼가 숨듯 몸을 숨겨 한 놈도 보이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 |